"언론인 리영희는 진정한 특종 기자다. 세계 정치의 맥을 잡아 혈을 찔렀다. 그런 특종 기사가 부지기수다. 국내 질서는 휘어잡았으나 국제 질서에서 비루했던 이 땅의 권력자들을 끝없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언론인 리영희는 참된 지식을 궁구했고 또한 기꺼이 나누었다. 독서의 넓음과 깊음은 현대사를 통틀어 따를 자가 별로 없고, 그에 바탕한 글쓰기는 비겁한 삶을 각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글은 방황하는 지식인에게 양심을, 주린 민중에게 밥을 주었다. 밥이 되는 양심을 나눠 주었다."
"언론인 리영희는 언론 밖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돈과 권력은 그의 영토에 둥지를 틀지 못했다.
가족을 돌볼 만큼의 돈과 권력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매정한 아들, 아비, 남편의 기억은 곧고 청빈한 그의 땅에서 유일한 회한이다. 그래도 언론의 길에 매진하여 진정한 문화권력을 이루었다. 그로 말미암아 기자라는 몹쓸 직업이 그나마 빛났는데, 지식과 양심으로 지어 올린 철옹성에서 그는 삿된 뜻이 없는 독재자다. 여전히 범접할 후배가 없어 권좌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세상 사는 누구나 다 마찬가지지만, 리영희(1929~ )는 그의 시대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선택하지 않은 그의 시대는, 홍세화의 표현을 빌리면, "잔인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고 해야 할 정도입니다.
"일제 식민지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분단과 전쟁의 한복판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폭풍과 암흑의 바다에 뜬 일엽편주처럼 그 속에서 개인이 지나온 발자취는 자기 의지의 항로가 아니라 초인간적 의지, 시대 상황이 그려주는 항로일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의 삶 전체에서 독재가 곁을 떠나지 않았듯이 가난 또한 떠나려 하지 않았다."
리영희는 "한비자의 '얕은 재주나 술수는 우직한 성실만 같지 못하다'는 말을 일생의 계언戒言으로 삼은" 사람이랍니다. 리영희는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확하게 한다'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랍니다. 리영희는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이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치는' 사람이랍니다.
리영희에게 인간의 반대는 동물도, 식물도, 무생물도 아닌 노예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노예로부터 벗어나 자유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교양 - 리영희 프리즘>은 자유인 리영희를 시대로 불러내는 책입니다.
리영희 선생의 팔순(2009년 12월)을 기념하는 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그이에게 바치는 책은 아니랍니다. 리영희에게 글쓰기는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라서, 이런 바치는 책이 바쳐지는 자리에 리영희 선생이 설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리영희 프리즘>은 '리영희와 생각하기' '리영희와 책읽기' '리영희와 전쟁' '리영희와 종교' '리영희와 영어 공부' '리영희와 지식인' '리영희와 기자' '리영희와 사회과학'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리영희가 몸소 부닥쳤던 국면을 골라잡아 과거와 현재·미래를 아울러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또 리영희를 일러 '아버지 세대의 선생님'이라 하는 20대가 쓴 '리영희와 청년 세대-냉소주의 시대의 우상과 이성'도 들어 있습니다.
"리영희의 글쓰기는 주의 주장에 가득 찬 글쓰기와는 달리 주어진 자료 안에서 합리적 판단을 내리려는 의지로 가득 찬 글쓰기였다." 그래서 리영희는 오늘날 청년 세대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고요?
"자신을 특권을 가진 주체로 인식하고 사회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했던 과거의 대학생들과는 달리, 대학 진학률 86% 시대의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파악하는 이성"과, "자신의 삶을 객관화하려는 성찰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리영희의 자세가 지금 청년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리영희는 자기 시대를 스스로 혹독하게 살았습니다. 그런 혹독함이 그이를 시대의 스승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게 살 수 있지는 않습니다. 또 누구나 그렇게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런 인물이 있고 이런 인물이 세상과 사람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어떤 영향이었는지를 꼼꼼하게 훑어보는 노릇은 보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머리로, 무언가를 캐내려 하지 말고 가슴으로 흠뻑 느끼려는 태도로…….
그이가 세상을 살아내는 방식을 이랬습니다. 스스로에게 가혹했습니다.
"예전부터도 글이라는 것을 한 글귀 쓸 때, 한 글자 한 글자 말도 못하게 고통스러웠어. 병으로 쓰러진 것도, 글 쓰던 것을 고치고 또 고치면서 골치를 썩히다가 머리가 말도 못하게 아팠어. 머리가 정말 깨질듯이 아프면서 열이 확 올라오는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지. 그렇게 쓰러져서 중풍이 된 거야."
그래서, 그이조차도 그렇게 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이런 국제 정세나 세계에 대한 글은 쓰고 싶지 않아. 국제 정세라는 것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마련이니까 그 변화에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어. 너무나 민감하게 있어야 하니까 참 힘들었지.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고고학을 해보고 싶어. 이를테면 몇 백 년 전에 침몰한 배에서 건져 올린 도자기를 보면서 오랜 시간을 들여 연구하고 그런 거 말이지."
"65세가 되어서야 수도꼭지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 문명의 혜택을 받아보았다"는 인간 리영희. 그로부터 말미암은 형형색색 프리즘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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