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 라고 하면 저는 떠오르는 것들이 많습니다. 탱자는 봄철에 잎 먼저 꽃을 피웁니다. 그러고는 피고 지고 하다가 가을에 노란 열매를 달아 올립니다. 제게 탱자는 그래서 봄과 동시에 가을의 상징이기도 하다,고 저는 여깁니다.
탱자는 가시가 좋습니다. 5월 즈음 이 나무에 물이 잔뜩 오를 때 가시를 뚝 떼어서 살살 비비면 딱딱한 나뭇결에서 껍질이 떨어져 나옵니다. 이것을 어린 우리들은 칼과 칼집 삼아 서로를 찌르며 놀았습니다.
가시가 좋기 때문에 울타리로 많이 썼습니다. 어릴 적 다녔던 창녕국민학교 울타리도 탱자나무가 맡아줬습니다. 탱자나무 울타리에는 개구멍이 있게 마련이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한테 걸리면 얻어터졌기 때문에, 짜릿함을 더욱 느끼며 살살 기어다니곤 했습니다.
창녕국민학교 오가는 길목 포도밭도 울타리가 탱자나무였습니다. 옆으로 펼쳐진 청보리밭 색깔과 탱자나무는 같은 푸른빛이면서도 짙은 정도가 달랐습니다. 탱자 울타리는, 빈틈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여러 군데 허술했습니다. 가난한 시절, 포도가 먹고 싶던 우리에게 그런 허점이 보이지 않을 리 없었습니다.
우리는 가시에 찔리고 긁히면서도 철조망을 타고 올라간 다음 울타리 너머로 팔을 길게 내뻗었습니다. 손에 잡히는 포도알은 많아야 열서넛뿐이었고 그나마 시큼털털했지만 팔길질은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집에 와 보면 팔이 보기 안쓰러우리만치 불그스럼할 때도 적지 않았습니다.
탱자 여름철 열매는 파란색이었습니다. 아주 단단했습니다. 한 주먹 따가지고 지나가는 친구 녀석 뒤통수를 맞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실수로 한두 해 선배를 겨냥해 날렸을 적에는, 재빨리 ‘토껴야’ 했습니다.
가을이 되면 노랗게 익는 이 열매를, 우리는 못 먹는 줄 알면서도 해마다 까서 입에 넣어보고는 했습니다. 아무래도 노란색이 저토록이나 먹음직스러워서,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좀체 믿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탱자는 나무가 단단한 편입니다. 그래도 세로로 쪼개기는 쉬운 편입니다. 가을이나 겨울에 우리는 자치기도 하고 윷놀이도 했는데요, 자를 만들고 윷을 만드는 데 가장 알맞은 재료가 바로 탱자나무였습니다. 자치기에서는 주로 새끼자를 만들었는데, 어미자로 쳤을 때 나는 '딱' 소리는 아주 시원했습니다.
그 때는 몰랐지만, 아마 새로 사귄 친구들이랑 새 학기에 어울려 뛰어노느라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성 싶은데, 요즘 보니 이 탱자만큼 좋은 꽃도 없다 싶습니다. 가까이서는 별 같이도 보이고요, 멀리서 보면 무리지어 있는 모양이 나뭇가지를 덮은 눈(雪)과 꼭 닮았습니다.
푸르른 5월 느닷없이 찾아온 더위에 허덕거릴 때라도 되면, 멀리서 바라보이는 청백(靑白)의 대조가, 바라보는 눈(眼)을 시원하게 할 뿐 아니라 따뜻함에 늘어진 살갗에까지 소름이 오슬오슬 돋아나게 만듭니다. 탱자에는, 그러니까 봄부터 가을까지 가지가지 기억이 묻어 있는 셈입니다.
오늘, 때 이르게 핀 탱자꽃을 만났습니다. 아직 활짝 피지는 않았습니다. 햇볕이 많이 드는 곳 꽃은 벌어들졌고, 볕이 덜 드는 데 가지에는 꽃망울들만 송알송알 맺혀 있습니다. 저것들, 한 보름만 있으면 벌어질 대로 벌어져 아무도 감당 못할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나이 스물이 넘어서는 또다른 뜻이 여기에 덧붙었습니다. 위리안치(圍籬安置)입니다. 옛날 고려나 조선 시대 귀양살이라는 형벌에서, 있었던 가중(加重)형이랍니다. 울타리(籬)로 둘러쳐(圍) 가만히(安) 둔다(置)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안에 꼼짝도 하지 말고 있어야 하지 바깥나들이 따위는 일절 못하게 하는 형벌입니다. 이 때 울타리 치는 데 썼던 나무가 바로 탱자입니다. 그래서 탱자나무는 제게 쓸쓸함과 고달픔과 애달픔 들을 또 뜻하게 됐습니다.
지금도 탱자나무가 쓸쓸함과 고달픔과 애달픔의 상징이라 생각하느냐 물으시면 "아니오."라 답합습니다. 역적은, 귀양 갈 것도 없이 바로 죽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귀양살이는 임금 신임을 얻으려는 권력투쟁에서 패한 이들 정도는 돼야 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정국이 바뀌면 복귀를 했지요.
그이들이 위리안치돼서 주로 옲조렸다는 '님 향한 일편단심' 따위들에, 당대에 솟아나는 감정을 이입(移入)하면서 동일시해도 되는 나이는, 제가 이미 벌써 옛날에 지났나 봅니다. 지금은 탱자나무가 그저 좋을 뿐입니다.
창원 사림동 경남지방경찰청 뒷문에서 봉림산 기슭으로 올라가지 말고 왼쪽 창원대학교 또는 경남도립미술관 가는 길에서 찍었습니다. 고개를 치켜들고 오래오래 찍어 댔습니다. 한참을 한 다음 어쩌다 고개를 숙여보니 땅바닥에도 봄이 피어 있었습니다. 훨씬 촘촘하게 솟아났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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