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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오랜 관성을 단박에 깨는 상큼한 동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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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출신 시인 김륭의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 고양이>의 첫 느낌은, '상큼함'입니다. 형식도 내용도 상큼하고 사물과 사물 사이 또는 생각과 생각 사이를 잇는 상상력도 산뜻합니다. 낡음과 굳음, 느끼함 따위는 낄 여지가 보이지 않아 상큼하기까지 했습니다.

표제작 전문입니다.

우리 동네 구멍가게와 약국 사이를 어슬렁거리던 고양이, 쥐약을 먹었대요 쥐가 아니라 쥐약을 먹었대요 우리 아빠 구두약 먼저 먹고 뚜벅뚜벅 발소리나 내었으면 야단이라도 쳤을 텐데……

구멍가게 빵을 훔쳐 먹던 놈은 쥐인데 억울한 누명 둘러쓰고 쫓겨 다니던 고양이, 집도 없이 떠돌다 많이 아팠나 보아요 약국에서 팔던 감기몸살약이거나 약삭빠른 쥐가 먹다 남긴 두통약인 줄 알았나 보아요

쓰레기통 속에 버려진 고양이, 구멍가게 꼬부랑 할머니랑 내가 헌 프라이팬에 담았어요 죽어서는 배고프지 말라고, 프라이팬을 비행접시처럼 타고 가라고 토닥토닥 이팝나무 밑에 묻어주고 왔어요

동시에서 형식은 이래야 하고 내용은 이래야 한다는 교조(敎條)가 단박에 깨어지고 없습니다. 관성을 단숨에 돌파한 것입니다.

흔하디 흔한  풍경을 풍성하고 실감나는 입체와 짜임새를 갖출 수 있도록 하는 상상력과 형상력은 또 어떤지요.

앞마당 빨랫줄에 앉았던 어미 새 한 마리
갸웃갸웃 오 촉 알전구보다 작은 머리에
불이 들어왔나 보다

눈도 못 뜬 새끼들 배고파 운다고
동네 시끄러워 낮잠 한숨 못 자겠다고
나무에게 전화 받았나 보다

포동포동 살찐 배추벌레 한 마리 입에 물고
날아간다 꽁지 빠지도록
새끼들 찾아간다

나무의 가장 따스한 품속에 놓인 공중전화
벨소리 그치지 않는 둥지 찾아
날아간다

나무들도 전화를 한다
까맣게, 하늘이 새까맣게 타도록
전화를 한다
('나무들도 전화를 한다' 전문)

반전이 싱그러운 작품. 사물에 기대어 심리 움직임을 구성지게 그려냅니다.

자전거는 넘어지는데

안경은 왜 넘어지지 않는 거야

4학년 3반 새봄이 보고 싶은 마음은

왜 넘어지지도 않는 거야

안경다리 때문이야

아하 그렇구나 그래서 한 번씩

똑, 부러지는구나('안경다리' 전문)

'코끼리가 사는 아파트'는, 여태 많은 시인들이 아주 많이 다뤄 낡아져 버린 정서를 달라진 시대 풍경에 맞게 일신(一新)해 보여준답니다.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와, 훌쩍거리는 코와, 코가 길다란 코끼리가 하나로 묶였습니다.

  604호 코흘리개 새봄이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요
  6층에서 1층으로, 1층에서 다시 6층으로 코를 훌쩍거리며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고 있어요 훌쩍훌쩍
  코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어요
  엘리베이터를 비스킷처럼 감아올린
  코가 길을 잡아당기고 있어요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는 사람들 흘깃흘깃 쳐다보지만
  엄마가 타고 다니는 빨간 티코를 감아올릴 때까지
  새봄이 코는 길을 잡아당길 거예요
  집으로 오는 모든 차들이 빵빵
  새봄이 콧구멍 속으로
  빨려들고 있어요
(전문)


이런 작품은 읽다 보면, 좀 아픕니다. '달려라! 공중전화' 전문입니다. 실제 요즘 시골 학교에 가면 부모가 없는 조손(祖孫) 가정이 많다고 합니다. 늙은 어머니한테 자식 맡기고 나가는 아버지가 적지 않다는 실증(實證)입니다.

할머니 집과 학교 사이, 목발 아저씨가 지키고 있는 구멍가게 앞 공중전화를 보면 아빠 생각이 난다 회사에서 물먹고 돈 벌러 간 아빠, 잘 나가던 한 때는 찾아오는 친구들도 많더니 소식이 뚝 끊겼다 전화 한 통 없어 외로웠을 거다 훌쩍 엄마마저 떠나자 외로웠을 거다 너무 외로워 서울로 갔을 거다

나는 할머니가 준 용돈을 아껴 아빠에게 전화를 걸곤 하는데 오늘은 짝꿍 생일, 선물을 사는 바람에 빈털터리다 서울까지 달려갈 수도 없고 할머니에게 과자 사 먹는다고 조를 수도 없고

나는 공중전화 박스 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콧구멍을 벌렁거린다 외로운 아빠 품속처럼 독한 담배 냄새 진동하지만 참 따뜻하다 휴대폰에게 물 먹은 뒤 밤마다 달을 낳는 공중전화, 나는 반짝 이마가 빛나는 동전 한 닢이다 쌩쌩 찬바람 불고 있을 아빠 호주머니 속에서 둥글게, 둥글게 부풀어 오른다

달려라!

이밖에도 '맛있는 동화-누렁이가 개나리를 낳았다', '꽃 피는 눈사람', '은행나무', '애벌레 열 마리', '고추잠자리', '낮달' 등도 눈길을 잡아끕니다. 물론, 다른 작품들이 처진다는 뜻은 전혀 아니고요, 그러니까 저랑 취향이 맞지 않다는 말씀일 따름입니다.
 
김륭은 머리말에다 '눈사람의 윙크'라는 제목을 달고 말했습니다. "엉뚱하게도 요즘은 내가 사람이 아니라 눈사람이란 생각을 많이 합니다. …… 어린 시절을 도둑맞는다는 건 뜨거운 햇살 아래서 녹아내리는 눈사람처럼 참 슬픈 일인 것 같습니다. …… 눈사람이 완전히 녹아내리기 전에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말도 적었습니다. "무슨 동시가 이렇게 어렵냐고 눈살 찌푸릴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합니다. 시골 할머니가 입고 있는 빨강내복처럼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관습적인(?) 상상력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달아나 보고 싶었습니다. 울퉁불퉁 이야기가 있는 동시를 쓰고 싶었고 아이들보다 먼저 엄마 아빠에게 읽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 눈에는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어려워할 줄 모르겠습니다만.

이안 시인은 책 말미 해설에서 이랬습니다.

"김륭 시인의 동시집은 자신이 생각하는 동시를, 자기 방식대로 끝까지 밀고 나간 작품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귀하고 값지다. …… 여태까지의 동시 텍스트들이 일찍이 보여준 적이 없었던 자유로운 상상과 풍부한 언어 표현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층위의 토론 주제를 거느린 실험적 텍스트라고도 할 수 있다."

저도 대충 동의합니다. 문학동네. 107쪽. 8500원. 어른들에게 특히 재미있는 동시 모음입니다. 하하.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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