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희의 첫 시집엔 한 여자가 시인에 이르는 아픈 시간의 궤적이 기록되어 있다." 문학평론가 정미숙이 손영희의 첫 시집 <불룩한 의자> 말미 해설 '오래된 정원의 합창'에서 적은 글입니다.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상처 받은 한 여자가 그 고통과 그 시간을 눌러 써 담은 시집이다."
표제작 '불룩한 의자'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칼금 선명한
빈터의 의자 하나
잘 여며졌다 믿었던 상처의 장물들이
거봐라
속수무책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내 몸의 바깥은 저리도 헐거워서
무심한 바람에도 쉽게 끈이 풀리고
누굴까
벼린 오기의
손톱을 세우는 자(전문)
'잘 여며졌다 믿었던 상처의 장물들'에 절로 눈길이 쏠립니다. 시(조)에서 찾기는 그이의 '상처'는 이렇습니다. "지독한 안개가 길을 지우고 있다// 나는 나까지 지워질까봐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그러나 지워지는 건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꽃이 되지 못하고 떠돌던 어둠의 ……(중략)……/ 지우고, 지우는 동안 또 쌓이는 상처가 있다". ('안개' 부분)
시집 마지막에 실린 작품 '보릿고개'와 첫 장에 오른 시조 '오동나무는 오늘도 징징거린다'를 보면 상처의 개인사까지도 조금 짐작이 됩니다. '보릿고개'에서는 "(임신으로) 배부른 어머니와 젖배 곯은 아이들"이 나옵니다. '오동나무는'에는 "목마른 천수답 하늘 물꼬를 기원하는/ 아버지, 또 우는 아이를 허공으로 던진다" 또는 "무너진 돌담 틈새 봉숭아 꽃씨로 숨겨논/ 찢어진 교복치마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등이 있습니다.
'몸 1-눈병'도 그렇습니다.
"그 숲은 물기 없는 마른 스펀지 같다/ 출렁이는 풍경들이 조형물처럼 낯설다/ 그것은 흘리지 못한 내 눈물 탓일까/ 누군가를 위해서 한 번도 울지 못하고/ 향기도 되기 전에 먼지처럼 말라 버려/ 빗물도 잘 스미지 않는 푸석한 내 눈물샘// 지금 당신에겐 남은 눈물이 없어/ 무표정한 의사의 얼굴 뒤에서 아버지가/ 읽다만 내 소설책들을 쌓아놓고 불사른다/ 어디선가 바람이 종일토록 불어와/ 타다만 상처의 꽃잎들을 물어 나른다/ 아, 굳게 닫혀버린 문, 읽히지 않는 기억". (전문)
이런 작품들은 쉽게 손에 걸립니다. '맨홀-버스 정류장에서'처럼.
"한 여자가 두 무릎을 끌어 안고 앉아서/ 화들짝 피어나는 연꽃을 보고 있다/ 어둠은 지는 게 아냐 피는 거지, 저 우물처럼// 늘 혼자여서 공명이 된 여자의 가슴으로/ 피다만 꽃잎들이 검은 건반을 두드리고/ 빗물은 흘러넘쳐서 누구의 발 적시며 가나// 뚜껑 없는 내 몸의 수로를 따라 떠내려 온/ 오래된 우물에서 길어올린 몽유/ 시간이 악취를 풍기며 내 흔적을 지우고 있다". (전문)
까치집의 풍요와 자신의 결핍을 한 데 버무린 '있니!'도 눈에 띕니다.
"1.
부엌 창문으로 빨간 의자가 보인다 여자 둘이 담소하는 파란 잔디 위, 아이가
놓쳐버린 풍선을 뒤뚱거리며 따라간다
헐벗은 느티나무 속 까치집이 보인다, 새끼들 입 속으로 어미가 넣어주는 피 묻은
살점이 보인다, 텅 빈 허공이다
2.
권태롭게 눈 뜨는 새벽 토해본 적 있니, 꾸역꾸역 입안으로 칫솔을 밀어넣다, 짠 눈물 메마른 목구멍에 삼켜본 적 있니!"
'태평동 2'는, 제 느낌으로는, 상처와 관련돼 있습니다.
"허벅지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소녀가/ 고무줄을 돌리며 골목길을 뛰어가네/ 바람과 햇살이 직조하는 시간을 굴리고 있네/ 고무함지 스티로폼 고개 숙인 식물들/ 남루함을 쓸어담던 몽당 빗자루 기대앉은/ 칩거의 파란대문이 말문을 트고 있네/ 세월은 깊어지고 기억은 고요해지네/ 내 영혼의 명주실 같이 반짝이던 순간들이/ 바람이 흩어놓은 길로 물길을 내고 있네". (전문)
시(조)라는 것이 근본 마음 가는대로 흐르는 것이라 누가 무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이 손영희 첫 시집에서 상처를 좀더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갈수록 깊어지고 따가워지고 아려오는, 아무리 익숙해지고 싶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상처이고 아픔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충분히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정미숙의 평론은 칭찬으로 이어집니다. "시인은 상처 입은 한 여자가 자신을 넘어서 주변과 세상으로 시선을 확장하고 마음을 넓히며 성숙해 가는 여로를 치열하게 그려낸다." 아마 이런 국면도 이런 칭찬하는 평론에 원인 제공을 했겠지 싶습니다만.
"기다려도 새 떼는 날아오르지 않았다/ 비가 오다가 곧 눈이 되었다/ 꺅오리 왔다간 자리/ 내버들 속 시리다// 눈바람이 벼랑을 쓸고 있는 동안/ 꽃눈이 혈관을 쪼으며/ 고개를 들고 있다". ('주남저수지에서' 전문) 참 좋습지요.
어쨌거나 손영희는 시집 한 권으로 너무 많이 나아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평론가 정미숙의 말이 이를 증명합니다.
"물 따라 바람 따라 떠돌며 시인이 얻은 것은 물처럼 바람처럼 기억되고 지속되는 사랑과 생명의 영원성이다. 서로를 향한 배려와 관심을 나누는 사랑만이 생명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상처만 드러내고 또 쳐다봐도 시집 한 권으로는 모자랄 텐데, 이렇게 다 깨달아 버렸습니다.
이어집니다. 정미숙의 말입니다. "시인은 구체적 대안을 여러 선배/선생들과의 깊은 대화인 독서와 성찰을 통하여 마련한다." 이를테면 "'오래된 미래'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사의 <오래된 미래>라는 책과의 대화를 통해 쓰인 시이다."
"이제 시인은 '수태하지 못한 여성'의 결핍을 넘어서 우리 아이들과 미래를 걱정하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사랑의 자세를 견지한 진정한 어머니, '어머니-되기'의 자세를 갖춘 자연의 품인 여자를 우리 앞에 세운다."('수태하지 못한 여성'은 '부레옥잠이 핀다'에 나옵니다.)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화해가 고향의 쇠락과 함께 이루어졌다면 어머니의 되새김은 자연의 영원성과 함께 드러난다."
"시인의 '여자'는 세상을 주유舟遊하는 동안 지금껏 지속된 삶이 어머니 혹은 자연의 웅숭깊은 그늘 덕분이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손영희 시의 출발은 앗긴 꿈의 실체, 타자인 여성에서 기원한다. 하나, 세상 밖으로 나와 모든 생명체에 깃든 고통과 고독을 응시하고 공감하는 가운데 결핍의 한 여인에서 벗어난다. 세상과 자연과 소통하고 귀환하는 여자는 이제, 자신을 키운 것은 자연의 품 어머니 사랑의 그늘이었음을 애틋하게 기억한다."
이쯤 되면 제가 보기에는 도통한 수준입니다. 정미숙은 손영희의 이런 경지를 두고 "초월적인 가치일 뿐 구체적인 삶의 방법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고 합니다. '구체적 삶의 방법'에 대한 멘트를 하나 붙이고 싶나 봅니다.
이어지는 멘트는 "이상을 구체로 실현할 길은 시인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할 험난한 과제로 남는다.", "바로 언어의 숲, 정갈하고 풍요로운 자신만의 색깔을 갖춘 숲을 만들고 가꾸는 길일 것이다. 알듯이, 시인이 내고자 하는 시인의 길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다."였습니다.
이런 정미숙의 말글에 비추면, 상처를 많이 보고 읽고 싶다는 제 기대가 이번 시집에서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나올 시집에서는 기대가 충족될 수 있을까요?
김훤주
※<경남도민일보>에 썼던 글을 많이 고쳤습니다.
불록한 의자 - 손영희 지음/고요아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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