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표성배의 공장이 왜 이토록 빛이 날까?

김훤주 2009. 8. 18. 09:02
반응형

1. 망치 소리가 피아노 바이올린 소리 같다고

누구든지 그이의 시집에서 '망치의 노래'라는 제목만 보면, 곧바로 '투쟁의 망치로 노동자의 하늘을 여는……' 하는 80~90년대 투쟁 노래 이미지가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한 번 보시지요.

누가 피아노를 치고 있는가

세상 처음 소리처럼 맑아
마음이 다 녹아내리는

누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가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바람 같은

선율이란 나도 몰래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나도 몰래 다리를 흔들게 하고
나도 몰래 온몸에 활기를 넘치게 하는

선율이란 이런 것이라는 믿음

땅 땅 땅땅
따아앙 따아앙 따아아앙

내 몸이

나도 모르게 긴장에서 풀어지는
저 소리는
나의 피아노 소리
나의 바이올린 소리(전문)

노동이 삶을 포섭하고, 삶이 노동을 포섭했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노동과 삶이 구분 없이 하나가 되는 승화를 이뤘습니다. 아름다운 노동이요, 즐거운 일상입니다.

지난 시절 노동시에서는 대부분 이렇지 않았습니다. 공장 노동은 인간의 비(非)인간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산 창원에 터잡고 사는 노동자 시인 표성배(43)의 다섯 번째 시집 <기찬 날>이 담은 세상은 달랐습니다.

2. 표성배에게 공장은 삶은 얻는 공간

공장은 표성배가 "열다섯에 일구기 시작한" 곳인데요, 거기는 "바람과 구름과 별과 들판과 푸른 물 대신/ 매연과 기름과 쇠들과 공구들과 악다구니들이 넘치는/ 삭막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서 "사랑과 함께 이별을 얻었고/ 동지와 함께 적을 얻었다네".('숲' 부분) 하네요. 그리고 "서로 속삭이며 어깨 다독이는 기계들의 숨소리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거기서 그이는 삶을 얻었고 일궜다고 해야 알맞겠지요. 평론가 고봉준은 책 말미 해설에서 "80년대의 노동시가 '공장'을 잃어버리는 공간, 착취와 강탈의 공간으로 표상한 데 반해, 표성배의 시는 '공장'을 얻는 공간으로 형상화하고, 지난날의 노동시가 '공장'을 계급투쟁과 혁명의 학교로 명명한 데 반해, 표성배의 시는 '공장'을 삶, 생명의 시간·공간과 일체화한다."고 했지요.

3. 고단함과 반짝임은 원래부터 동행하는가

그래도 고단함은 여전하답니다.
"성한 곳 하나 없네// 햇볕도 피해 가는 구석진 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안전화 한 짝,/ 살며시 다가가 쓰다듬으며 위안의 말 한 마디 건네자/ 우우 우우-/ 오히려 날 위로하네".('입동(立冬)' 전문)

지친 나날 한가운데 반짝이는 세상이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서 "반짝이는"이라 쓰기 앞서 "빛나는"이라 썼다가 지웠습니다. '빛나는'이라는 말에는 무엇인가 희망이 있어 보인다는 말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시에는 그래서 "빛나는"이 맞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희망이 있든 없든 그냥 사물 또는 현상이 그 자체로 '환하게 피어오르는' 장면을 잡아챈 작품 같았거든요.

"햇볕 따뜻한 봄날 토요일 오전 일 마치고 퇴근하는 길 낡은 아반떼 승용차 한 대 마산 봉암 공단 해안 길을 씽씽 달리는데, 숭어 떼가 은빛 비늘 반짝이며 장단 맞추듯 숭숭 치솟는다".('기찬 날' 전문)

4. 가여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표성배는 책머리 '시인의 말'에서 바람을 적어 놓았습니다. "사람이든 꽃이든 새든/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엾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런 마음으로 천천히 다가갈 수 있기를…… 지금까지 애써 그랬지만, 앞으로도 한결같기를 바랄 뿐".

가여우면 어떻고 가엾지 않으면 또 어떻습니까. 저로서야 주는 느낌 그대로를 고맙게 받아들일 뿐이지요. 이를테면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월이었다 일천구백칠십구 년 마산에는 눈 대신 비가 내렸다 빗속에 키 작은 한 소년이 공장에서 먹을 도시락을 들고, 책가방 든 아이들과 뒤섞여 시내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리며 한참을 바라보던 중년의 사내가 가만히 우산을 내려쓰고 있었다".(전문)

시집에 있는 시인 사진을 찍었습니다. 실물도 아주 잘 생겼습니다.


이런 장면은 어떻습니까. '한 몸'입니다. "그가 배운 유일한 일은/ 쇠와 쇠를 붙이는 일인데/ 쇠와 쇠를 붙이는 일은 쇠와 한 몸이 되는 일인데/ 정작 자신은 어디에도 붙지를 못했다// 한 점 불꽃이 화살처럼 가슴을 파고드는 날은/ 캄캄한 무덤 속을 거닐 듯/ 마지막 한 발을 어디에 놓을 것인가 고민하며/ 부르르 진저리 치기도 했던// 그가 위 쇳덩이에서 아래 쇳덩이 위에 떨어져 눕자/ 위 쇳덩이와 아래 쇳덩이는/ 그가 불을 지펴 놓은 용접봉처럼/ 불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의 몸뚱이에서 흘러나온 피는/ 위 쇳덩이와 아래 쇳덩이에/ 혈관처럼 살아 꿈틀거리며/ 뼈가 된 용접봉을 타고 흘렀다// 그와 쇳덩이는 비로소 한 몸이 되었다// 그때서야/ 이미 그가 붙여 놓은 쇠와 쇠들이/ 상주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전문)

'그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전문입니다. "쌩쌩 불을 뿜으며 돌아가던/ 그라인더가 멈추어 섰다// 가만히 그의 등을 쓰다듬어 보았다// 한 생生이 어둠처럼 왈칵 밀려왔다// 쏟아지는 눈물,/ 오롯이 내 가슴에 고여 출렁이던// 다시 맞아야 할 내일이 있다고/ 쉽게 말하지 못했다". 편견도 선입견도 없이 그냥 풀어쓰는 기교가 대단합니다.

시집 마지막에는 '가지런한 아름다운'이 있습니다. 자식과 공구가 나란히 놓입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공구통 문을 열자// 가지런히 누워 있던 드릴들이 화들짝 눈을 뜬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과 눈을 맞춘 지 꽤 되었다/ 가지런히 가지런히 공구통 속 드릴처럼 한 방에 누워 아침을 맞은 때가 언제였던가// 아이들은 가방이 무겁고 나는 날이 갈수록 아이들이 무거워진다// 공구통 속 가지런한 드릴들을 쓰다듬어 본다 눈빛이 반짝반짝// 너무나 너무나, 가지런하고 아름다운".

5. 그이 공장은 서정 덕분에 빛난다

표성배는 그러니까 그라인더도 쓰다듬고 드릴도 쓰다듬고 아이들도 쓰다듬습니다.(앞에서는 낡은 안전화도 쓰다듬었군요.) 이렇게 쓰다듬는 이야기를 줄기차게 하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공장을 팔아 쓴 시'가 일러주고 있습니다. 3연과 마지막 4연입니다.

"내가 공장을 팔고 또 팔아도 사실 돈이 되지 않았다 돈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부터 그만둘까도 생각했으나, 내가 공장을 팔지 않으면 공장은 잊혀지고 말 거라는 두려움 같은 것이 내가 공장을 파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게 했다// 사실 내가 공장을 파는 까닭은 다른 데 있다 공장 안에서 기계를 돌리고, 그 애틋한 눈망울이 읽히지도 팔리지도 않는 공장 이야기지만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그들, 그들이 있어 나는 공장을 파는 일을 그만 둘 수가 없다".

여기, 서정으로 빛나는 공장이 있습니다.

김훤주
※ <경남도민일보>에 실었던 글을 많이 고쳤습니다.

기찬 날 - 10점
표성배 지음/애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