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문화유산 풍성한 아름다운 고성
요즘 들어 고성군을 몇 차례 들른 적이 있습니다. 고성은 자연이 아름답고 그만큼 역사가 오래돼 문화유산이 풍성한 고장이라는 느낌을 갈 때마다 받습니다. 공룡 발자국 화석은 '너무' 이름나 있거니와, 그 말고도 바다와 산과 들판이 한데 어울리고 옛 산성과 절간들도 곳곳에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읍내에 있는 송학동 고분군이랍니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발굴한 다음 말끔하게 정비한 봉분 3개가 크게 솟아 있습니다. 5세기 후반 대가야의 팽창으로 말미암아 줄어들기 전, 400년 앞뒤 100년 동안 일대를 다스린 최고 지배자의 위상을 일러주는 것입니다.
2. 고성 옛 이름이 과연 '소가야'일까
고분의 실체를 두고 사람들은 대개 '소가야(小伽耶)'라고들 합지요. 고성에 사는 대다수도 그렇게 압니다. 그런데 이토록 엄청난 크기로 무덤을 쌓아올린 옛 사람들이 자기네 사는 터전과 나라를 일러 과연 "작다(小)"고 했을까요.
올 봄에 이영식 인제대학교 박물관장이 펴낸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 기행>을 읽게 됐습니다. 낙동강에서 지리산과 섬진강에 이르는 가야 역사를 알기 쉽게 일러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이 관장은 박사 논문은 물론 석사 논문까지 가야에 대해 썼을 정도로 가야 역사 전반을 깊이 공부한 학자입니다.
송학동 고분군. 고성군청 홈페이지.
3. 일연 <삼국유사>에만 소가야라 돼 있다
이 관장은 당시 문헌에서 여러 증거를 들었습니다. △'소가야(小伽耶)'는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만 있는 표현입니다. △<삼국지> <일본서기> <삼국사기>에는 '고자'·'고차'·'고사'처럼 서로 통하는 이름이 나옵니다. △<삼국유사>조차 '고자국(古自國)'이라 적은 데가 있을 정도입니다.
다른 근거도 들고 있습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 고자군을 지금과 같은 고성(固城)군으로 바꿨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고성을 한 때 철성(鐵城)이라 이르기도 했습니다.(고성에 있는 철성 초·중·고교가 여기서 왔습니다.) 고성이나 철성이나, '쇠처럼 굳은 성'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소가야는 '작은 가야'가 아니라 '철의 가야'였다고 이 관장은 주장합니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유물도 물론 들고 있습니다. 고성읍 동외동 패총 유적이 그것입니다.
"74년 동아대박물관이 패총 유적 아랫단에서 야철지를 발견했고 95년 국립진주박물관이 패총 유적 중앙부 제사 유적에서 새 두 마리가 마주보는 청동 장식을 발굴했습니다." "전자가 1~3세기 쇠가야의 제철이나 야철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것을 다스리던 4세기쯤의 지도자의 존재를 보여줍니다."
이 관장은 아울러 고성 토기를 보기로 들며 당대 고성에 있던 가야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고성 토기가 멀리는 초기 백제 왕성으로 여겨지는 서울 풍납토성에서 발견됐고, 경남의 함안·의령·합천·진주·산청·함양뿐 아니라 전북 남원과 장수까지 진출해 있습니다.
이를 모두 고성에 있던 가야(이 관장은 '고자국'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만)의 영역이랄 수는 없겠지만 영향을 그만큼 광범하게 미치고 있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정명(正名)이 진짜 필요한 고성
이처럼 고성이 옛날에 '작은 가야'였느냐 아니면 '쇠의 가야'였느냐는 지금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옛 이름이, 적어도 고성에 터잡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자기 땅 역사에 대한 긍지와 자존은 드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고성은 공룡 발자국 등을 발판 삼아 관광 산업에 공을 많이 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고성으로 관광하러 오면서 '작은 가야'로 여길 때와 '쇠가야'로 여길 때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것이 더 좋을지는 누구에게나 뻔히 보이는 일입니다.
지금 송학동 고분군 옆에는 올해 준공을 목표로 '소가야 유물 전시관'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소가야 유물 전시관은 지금 이름일 뿐이고, 박물관 등록을 어떤 이름으로 할는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름대로 고증하는 절차를 거쳐, 고성에 있었던 가야에 걸맞은 이름을 달게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주제넘게나마 한 번 해 봅니다.
김훤주
※ <경남도민일보> 2009년 8월 21일치에 실은 글을 조금 가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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