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가의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끄트머리에 요즘 잘 나가는 젊은 시인 김경주의 발문이 붙어 있습니다. 그림에서, 색채나 구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마음 깊은 곳을 읽는다는 얘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오래된 그림을 대하는 자들의 심연을 이렇게 바라본다. 그들은 잠수함을 타고 그림의 수면으로 내려가 화각 빚어낸 물감과 선으로 흘러간다. 잠수함을 타고 그림 속을 흘러다니면서 화가가 그림을 그리던 순간의 '시차'들을 찾는다. 어느 순간, 그 시절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의 눈동자와 정확히 시선을 마주한다. 이 때 그는 하나의 그림을 본다는 표현보다는 화가의 내면으로 가라앉아 그의 해저에 닿은 것이다,는 표현을 써야 할지 모른다. 아니 목격했다는 표현이 더욱 어울릴지 모른다."
<르누아르와의 약속>에서 지은이 아이잭 신은 르누아르(1841~1919)의 이야기와 자기가 창작한 스토리를 나란히 늘어 내놓고 있습니다. 1971년 서울 출생인 아이잭 신의 경력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렇습니다. "1998년 오랜 방황 끝에 비주얼 아트로 대학 졸업. 졸업장을 받아든 아버지, 그제야 아들의 전공이 미술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 반대하는 아버지와,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는 아들,의 맞섬. 뜨겁습니다.
2. 르누아르의 그림과 인생을 재구성하다
아이잭 신이 르누아르의 이야기와 나란히 늘어놓은 스토리는 어린 남매가 시골 다락방에서 궤짝을 열어서 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에 무슨 충격적인 물건이 들어 있었는데 짐작건대 아버지의 어릴 적 그림 습작입니다.(물론, 아닐 수도 있고요.) 이 때 습작을 보고 "완전 필 꽂"힌 어린 남매는 자라면서 모두 미술을 전공합니다. 구체적인 경로는 다르지만, 르누아르나 어린 두 남매는 그림을 향한 열정에서만큼은 다르지 않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어린 두 남매의 이야기가 머리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아이잭 신이 겪었던 사실이라고(그래서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미술 공부를 했다고) 간주한다면, 르누아르의 이야기와 어린 두 남매 스토리를 아이잭 신이 나란히 내놓은 까닭이 뚜렷해집니다. 어린 두 남매가 그림을 향해 나아가는 열정과 관점을 가지고 르누아르의 그림과 인생을 재구성 재배치했다는 정도가 되겠습니다.
<르누아르와의 약속>에서 아이잭 신은 르누아르의 그림으로 하여금 르누아르의 일생에 대해 이야기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찬가지, 르누아르의 일생 또한 이 책에서 르누아르의 그림을 이야기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아이잭 신의 이런 구성은 노린 바 의도를 충분히 이룩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냥 짐작일 뿐인데, 이렇습니다. 르누아르라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아마 인상파, 그림이 따뜻해 보이는 사람, 프랑스 화가,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가난하게 그림을 그렸지만 나중에는 인정받아 나라로부터 훈장도 받는 등 평가와 대접을 제대로 받았다는 점도 함께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마치 중·고등학교 시험 공부 하듯이 이 책을 텍스트 삼아 공부한다면 모르지만 그냥 대부분 사람들이 책을 읽는 방식으로 읽는다면, <르누아르와의 약속>이라는 책이 르누아르의 그림과 일생에 대해 앞에 적은 것보다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도록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두 가지 줄거리가 계속 겹치고 어긋나는 짜임새가 그런 지식 인식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기도 합니다.
3. 책을 읽고 다시 보니 그림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이런 효과가 있습니다. 대충 다 읽고 나서 책을 덮었습니다. 그랬다가 다시 책을 열어 거기 있는 르누아르의 그림들을 봤습니다. 책을 다 읽기 전에 거기 있는 그림들은, 그냥 점 선 면 아니면 흐릿하고 몽롱한 색채 덩어리 또는 조각으로 거기 그대로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눈이 갑자기 좋아졌을 리는 없을 텐데, 그림이 선명한 구체(具體)로 다가왔습니다. 게다가 어떤 그림에서는 분위기가 전해져 왔고 어떤 그림에서는 두런두런 얘기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림에는 완전 문외한인데다가, 이른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예술'에는 조금은 거부 반응이 체질화돼 있는 인간인데도 말씀입니다.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4. 이렇게 그림이 달라진 까닭
1890년 장미. 꽃 그림 앞에서, 고통으로 일렁거리는 손목에 붕대로 감아 놓은 붓끝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멘토 제공.
"선생님,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이제 좀 쉬세요."
"쉬다니? 열세 살 이후로 단 하루도 그림 그리기를 쉬어본 적이 없네."
"그게 아니라 선생님 손도 이 모양이신데……."
"이봐, 그림을 그리는 데 꼭 손이 필요한 건 아니야. 자, 옆에서 한 번 잘 지켜보라고! 이렇게 붕대로 손을 감으면 얼마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네. 자, 어떤가?"
"……"
"난 이제야 그림이 뭔지 좀 알겠네. 자, 그러지 말고 정물화 그릴 준비나 좀 해주게."
그러니까, 이렇게 됩니다. "1904년, 르누아르의 두 손은 붕대를 감지 않으면 비틀린 뼈가 살을 파고들 정도였다. 화가로서 치명적인 류머티즘으로 경련과 마비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 이 불치병은 르누아르를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혹독한 고통에 몰아붙였다. …… 고통과 마비에서 잠시 풀려날 때면 붕대를 감은 손에 붓을 끼워 그림을 그렸다."
김경주는 말합니다. "아이잭 신은 이 책을 쓰기 위해 '에콜 데 보자르'(르누아르가 다녔던 프랑스 국립 미술학교)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르누아르가 관절염에 걸려 떨리는 손목에 붓을 묶어 사용한 그 가느다란 붓털이 바람에 흩날리는 상상을 몇 천 번은 했을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르누아르의 장미 꽃병 그림을 보면 그 앞에 이지러진 손목이 하나 괴로움 속에서 덜덜 떨며 어른거리는 모습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책 읽기가 고통의 축제였던 까닭입니다.
이같이 르누아르의 그림과 인생을 얘기해 놓은 다음, '르누아르와 여인들' '르누아르를 둘러싼 당대 반항적 예술가들' '그림으로 들여다본 르누아르의 삶'도 아이잭 신은 덧붙여 놓았습니다. 전체 이해를 돕고자 애쓴 자취입니다.
김훤주
르누아르와의 약속 - 아이잭 신 지음/멘토프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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