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주대환 "마침내 좌우대결의 시대가 왔다"

기록하는 사람 2009. 7. 20.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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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출신의 진보정치 사상가인 주대환 씨(55·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 이후 존칭 생략)가 다시 마산·창원을 떠난다. 그는 오는 26일 가족과 함께 서울 수유리에 얻어놓은 전셋집으로 이사할 계획이다.

그에게 떠나는 이유를 묻자 "그냥 튀는 거지 뭐"라고 대답했다. 1980·90년대 수도권에서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을 하다 여러번 감옥에도 다녀온 그는 1994년 심신이 지친 상태로 마산으로 돌아온 후에도 줄곧 진보정당운동에 매진해왔다.

그동안 세 번이나 직접 선수(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던 그는 "그동안 엉뚱한 일을 많이 벌여 주위에 민폐도 많이 끼쳤고, 사람들에게 빚도 지고, 은혜도 받았는데, 그걸 갚을 길이 없으니 튀어버리는 거지 뭐"라고 덧붙였다.


17일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에서 인터뷰 중인 주대환 전 민노당 정책위원장.


그가 이런 식으로 '튀어' 서울로 떠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서울대 종교학과를 다니던 중 학생운동으로 제적당한 그는 1979년 마산에 와 있던 중 부마민주항쟁 때 계엄군에 붙잡혀 구속됐다. 박정희 피살 이후 풀려난 그는 1980년 봄 잠시 대학에 복학하기도 했으나 전두환 일당의 등장으로 다시 제적돼 마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1985년 연말까지 마산에서 '산동네그룹'이라는 이념 학습모임과 <마산문화>라는 무크지 운동을 하던 중 1986년 1월 1일 지역활동을 정리하고 서울로 '튀었던' 것이다.

그렇게 떠난 주대환은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을 조직하고, 1990년대 들어 한국사회주의노동당과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장을 맡는 등 본격적인 진보정당운동을 벌였다. 그런 활동으로 1992년 또 감옥에 다녀온 그는 1994년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마산으로 돌아왔다. 그런 그가 15년만에 다시 마산을 떠나겠다는 것이다.

◇선수 생활 접고 스테프로 돌아가겠다 = "사실 민주노동당에 있는 동안은 마창지역에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이 있었지요. 그런데 (지난해) 민주노동당을 포기하고 나니 지역에서 할 일이 없어요. 그래서 떠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는지도 모르죠. 아이들도 이제 다 컸고…."

그는 '인생 3막'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결혼(1980년) 전 27년이 1막이었다면, 그 후 27년은 2막이었고, 이제부턴 3막이라는 것이다. 그는 서울에서 뭘 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정치는 포기한 것일까?

"선거에 선수(후보)로 나가는 것은 이제 끝내야지요. 골도 못넣는 선수가 팀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이제 선수생활은 접고 스태프로 물도 떠나르고 코치도 하고, 뭐 그래야죠."

그는 지난해 민주노동당의 종북 논쟁으로 당이 깨지자 탈당한 후 무소속으로 마산 갑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한 후 진보신당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무속속으로 있다. 그런 그가 스태프으로 일하겠다는 곳은 '사회민주주의연대(사민연)'라는 사상운동단체다. 그는 이 단체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광화문에 있는 '좋은정책포럼'과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는데, 거기서 상근을 할 겁니다. 아직 정식 창립은 않았지만 회원이 150명 정도 됩니다. 정치인도 있고 학자도 있고, 운동가들도 있는 사상단체라고 보면 됩니다. 신기남 전 의원이 상임고문으로 있는 신진보연대와 합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들이 목표로 하는 사회민주주의는 쉽게 말해 북유럽식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사상이다. 시장경제 만능주의 입장에서 보면 약간 좌파 성향으로 보이고, 사회주의 운동권의 입장에선 변질된 개량 자본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주대환은 우리나라의 사상적 계파를 이렇게 구분하기도 했다. 즉 자주파(주사파)가 김일성계라면,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박헌영계, 사회민주주의는 여운형·조봉암계, 중도민족주의는 백범계, 우파인 시장경제주의는 이승만계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한국진보세력연구>라는 책을 펴낸 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은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좌파운동하는 사람은 여운형·조봉암을 공부해야 한다"면서 "(한국에서) 온건 진보세력이 단절됐는데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인 주대환을 통해 다시 부활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주대환은 언제부터 사회민주주의자가 되었을까?

"92년 검찰에 구속됐을 때 (이번에 검찰총장 후보에서 낙마한) 천성관 검사가 담당이었는데, 그 때 공식적으로 노선전환을 했어요. 기존의 사회주의 혁명노선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와 전위정당 노선, 폭력혁명 노선을 폐기한다고 선언했지요. 마치 검찰에 굴복하는 식이라 모양새가 좋진 않았지만, 나로선 그때부터 사상전향을 한 셈이죠. 당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내에서도 전 조직원 600여명이 토론을 거쳐 그런 결론을 냈죠. 지금 뉴라이트 쪽에 있는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도 당시 우리조직원이었는데, 그 친구는 너무 (우파쪽으로) 가버렸지만…."

◇우리편끼리만 싸우지 말고 상대편과 싸우자 = 주대환은 지난해부터 우파쪽인 <시대정신>이나 '선진화재단' 같은 단체와 만나기도 하고, 그쪽 매체에 글도 쓰고, 토론회도 함께 하고 있다.


그래서 좌파쪽 사람들은 그를 수상하게 보기도 한다. 신지호 의원처럼 완전히 우파쪽으로 변절해가는 수순이 아니냐는 의심이다. 오는 29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사민연 주최로 열리는 '죽산 조봉암 선생 50주기 기념 토론회'에도 우파쪽인 안병직 (사)시대정신 이사장이 격려사를 하는 걸로 예정돼 있고, 하태경 (사)열린북한 대표가 토론사회를 맡는다.


"싸우더라도 맨날 우리(진보)끼리 싸울 게 아니라 저쪽(보수)하고 싸우자는 거죠. 그쪽과 붙어봐야 우리 생각에 어떤 단점이나 허점이 있는 지를 알 수 있고, 또 저쪽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거죠. 요즘 경향신문도 좌우 소통을 들고 나와 이런 게 하나의 화두가 되고 있던데, 그걸 (내가) 조금 일찍 한 거죠."

그렇다면 그동안 그가 우파쪽 사람들과 만나고 토론해본 결과는 어땠을까?

"한국 교육이 엉망이다 보니 사실상 한국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지적 역량은 모두 미국에서 교육받고 온 엘리트들이 장악하고 있어요. 그쪽 (우파) 집단이 단순한 것 같지만 그리 만만하진 않아요. 진보쪽은 주로 유럽쪽에서 공부한 사람과 국내파들인데, 숫적으로 워낙 열세인데다가 돈도 없잖아요. 우파쪽은 경제단체 같은 데서 많은 돈을 들여서 연구지원을 하고 있는데, 노동운동세력은 상근자 월급도 아직 회사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연구지원은 거의 없다시피 하니 게임이 안되는 거죠."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왜 그는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사상운동에 올인하려는 것일까?

"악조건 속에서도 진보지식인의 강점은 있죠. 보수지식인 집단에 비해 헌신성이 높고 네트워크를 잘 할 수 있다는 거죠. 지금 사민연에 참여하고 있는 지식인이 150명 쯤 되는데, 앞으로 500명 정도만 되면 영국의 페이비언소사이어티(영국식 사회민주주의 지식인집단)에 버금가는 조직이 될 수도 있어요. 페이비언이 700명이라는데-."

주대환


◇본격적인 사상 대결의 시대가 왔다
= 주대환은 이미 한국도 사상을 놓고 본격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보고 있었다.

"종부세와 양도세 논란, 의료민영화 등 서구에서 진보-보수가 다퉈온 의제들이 우리에게도 문제가 되고 있잖아요. 누구에게 (세금을) 거둬 누굴 위해 쓸 것이냐, 그게 바로 진보-보수 대결이죠. 지금의 정당은 진보-보수로 나눠져 있지 않습니다. 민주당 안에도 한나라당 못지않은 보수주의자들이 많고, 심지어 친노세력 중에도 자유주의 측면에선 MB(이명박) 못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유시민도 자유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는데, 결국 그들의 이상주의는 미국식으로 가자는 것이 될 겁니다. 이제 한국은 어떤 유형의 선진국으로 갈 것이냐, 미국식이냐, 유럽식이냐를 놓고 크게 두 흐름이 정립된다는 거죠. 사민연은 그 유럽식으로 가자는 사람들의 중심이 될 겁니다."

그는 유럽식이라면서도 미국사회에 대해 "단점이 많지만 장점도 있다"고 했다.

"미국을 특징짓는 것은 총기 소유를 허용하는 나라라는 겁니다. 최후의 순간에는 결국 개인이 알아서 자기 생명과 재산을 방어하라는 거죠. 철저한 개인주의에 기반한 자유주의 국가입니다. 열심히 하는 놈은 열 배, 서른 배 월급을 받아 가더라도 문제삼지 않는 나라,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완전히 낙오한 사람들만 종교단체나 자선단체에서 챙기는 나라가 미국이란 국가죠. 그래서 미국은 항상 활력이 넘치죠. 유럽은 그런 활력이나 노력이 별로 없거든요."

그는 이런 싸움에서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의 최종 승리를 위해 보따리를 쌌다. 마산에서 전세금을 빼어 서울에 주택전세를 얻었더니 실평수가 32평에서 열 서너 평으로 줄었다. 그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라고 표현했다. 자신은 정작 어떻게 밥을 먹어 왔을까?

"한국사회에선 사상가를 건달 취급하는데, 사실 저도 누구보다 더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아내가 학원을 하며 돈을 벌었지만, 나 역시 열심히 가사노동도 하고, 책 읽고, 글 쓰고, 토론하고, 강연 다니고 했죠. 월 100만 원 정도는 원고료나 강연으로 법니다. 사민연에서도 100만 원씩 활동비를 받고요. 사무실에서 상근을 하면 더 달라고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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