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실지렁이와 우렁이가 사는 논(畓) 보셨나요?

김훤주 2009. 7. 19.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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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도 습지랍니다. 당연하지요. 물기를 머금어 젖은 땅이 바로 습지(濕地)니까요. 그래서 2008년 11월 경남에서 열린 제10회 람사르 협약 당사국 총회에서는 '습지 시스템으로서 논의 생물다양성 증진에 관한 결의문'이 채택되기도 했습니다. 논을 습지로 인정함으로써 생태적 가치를 드높이고 보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논이 습지라면 갖가지 다양한 생명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인 물을 머금고 있는 땅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이지요. 뒤집어 말하자면 아무리 물에 젖어 있는 땅이라 해도 이런 생명체가 살지 않는다면 습지라 할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므로 화학 농약을 치고 화학 비료를 뿌리는 논은 제 구실을 다하는 온전한 논 습지라 하기가 어렵습니다. 화학 농약은 논을 아무런 생명도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고 화학 비료는 땅의 숨통을 막아 미생물들이 활동할 수 없도록 바탕을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도 일부에서는 논농사를 지으면서 유기농이나 무농약·저농약 농법을 따르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이래 관행으로 굳어버린 화학 농업(관행 농업)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실이지요.

이것이 바로 2008년 람사르 총회에서 '논 습지 결의안'을 채택할 때 한국이나 일본을 뺀, 벼농사를 짓지 않는 많은 다른 나라 참가자들이 반대의견을 낸 까닭 가운데 하나랍미다. 주최국인 한국 정부가 관행 농업을 버리겠다는 생각과 발표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상이 이렇습니다. 경남도 통계연표를 보면 2007년 현재 경남 전체 논 면적은 11만1445ha에 이릅니다. 그리고 같은 해 쓰인 수도용(水稻用) 농약은 21만8000kg이랍니다. 논 1ha(3000평 남짓)에 농약 511kg을 쏟아부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여기에는 종자소독제도 포함돼 있습니다. 씨앗부터가 농약 '칠갑'을 하는 셈이지요.

토착미생물이 들어 있는 흙.

논에 뿌리는 효소가 들어 있는 장독.


고성군(군수 이학렬)이 2008년 생명환경농업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른바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필요한 사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2012년까지 고성의 전체 논 7635ha에 화학 농약과 화학 비료를 전혀 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13일 만난 고성군농업기술센터 허재용 소장은 "올해는 388ha가 생명환경농업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전체의 5%쯤 되는 비율입니다.
 
허 소장은 목표를 달성할 자신이 있다고 했습니다. "농업인들에게 절대 강요는 않지만, 효과가 좋은데 왜 안하겠어요?" 지난해 벼농사를 지어봤더니 생산비는 60%가 줄어든 반면 생산량은 6%가 늘었다고 했습니다. 3000평에 평균 16만5000원 정도 비용이 들었는데 지난해는 생산 경비가 10만원 줄어든 6만5000원밖에 안 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양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질도 좋아졌다고 덧붙였습니다.

관행농업에서 친환경농업으로 전환한 첫 해에 생산량이 늘었다는 얘기는 제가 처음 들었기에 어떻게 해서 그런 성과가 나왔느냐고 물었지요. 굳어진 정설에 따르면, 사람뿐 아니라 논도 관행농업에 젖어 있어서 땅에서 화학 비료·농약 기운을 빼는 데 두세 해는 걸리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약 기운이 빠지는 서너 해는 지나야 소출이 나아진다는 얘기입니다.

대답은 이랬습니다. "핵심은 '토착 미생물'입니다. 충북 괴산 자연농업학교에서 배워왔어요. 고운 흙을 담은 나무상자를 한지로 덮어 대밭 같은 데 두면 토착 미생물이 꾑니다. 이것을 알맞게 배양해 300평에 150kg씩 뿌립니다. 벌레나 풀뿐 아니라 화학 비료 성분까지 먹어치워 분해합니다. 친환경농업 자재 업체들 장사를 시켜 줄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 자연산 퇴비를 미생물과 10:1 비율로 뿌려주면 금상첨화랍니다.

거름을 만들 때도 사람이 먹지 못하는 성분은 섞지 않는답니다. 사람뿐 아니라 기르는 작물의 권리까지도 소중하게 여겨야 좋은 성과가 난다고 했습니다. 돌나물, 아카시아, 계피, 생강, 마늘, 감초, 당귀, 미나리, 고등어 따위가 그것입니다. 굴껍데기, 달걀 껍데기, 소뼈, 콩대숯 등이 더해집니다. 종자 소독도 농약 대신 열탕 처리로 하고 벌레도 자연에 있는 독초들로 만든 자연 농약으로 잡는답니다.

제초 작업을 하고 있는 우렁이들.

마찬가지 우렁이들입니다.


농법도 깊이 가는 심경(深耕)에서 얕게 가는 천경(淺耕)으로 바꿨습니다. 논바닥을 얕게 갈면 벼의 자생력을 높아져 뿌리가 깊이 박힙니다. 자연 비료도 많이는 뿌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땅을 가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석유)도 줄어들고 비료가 과포화 상태로 버려지는 것도 막으니 생태 환경에도 좋은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생명환경농업을 하는 논에 가 봤더니 과연 그랬습니다. 관행농업으로 짓는 논보다 벼가 훨씬 클 뿐 아니라 부채살처럼 어깨가 펴져 둥치도 더 있었습니다.

농업기술센터 이문찬씨는 "6월 5일 처음 심었을 때는 생명환경농업 벼가 포기 수도 적었지만 지금은 훨씬 더 잘 자랐습니다." 했습니다. 뽑아봤더니 진짜였습니다. 나중 가을 낟알도 이삭마다 180개가 달려 관행농업의 100알보다 훨씬 많다고도 했습니다.

아래 보이는 조그만 것이 실지렁이입니다.

생명들 푸덕거리는 바람에 물결이 일었습니다.


또 하나, 관행농업을 하는 논은 조용한 반면 생명환경농업을 하는 논은 시끄럽고 바빴습니다. 벼 말고 다른 생명들도 살아 있느냐 아니냐는 차이였습니다. 관행농업 논에는 개구리밥만 둥둥 떠 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생명환경농업 논에서는 실지렁이와 우렁이가 바닥에서 제초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청정 논의 상징이 되다시피 한 긴꼬리투구새우랑 풍년새우도 있고, 소금쟁이나 '맹근쟁이'(서울 사투리로 뭐라 하는지는 모릅니다만)도 있고, 그밖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갖은 생물'들도 파닥거렸습니다. 그 바람에 논물은 잠깐 잠잠해졌다가 금방 흔들리곤 했습니다. 고성과 경남은 물론 우리나라 모든 논이 이렇게 벼 말고 다른 생물도 함께 사는 터전으로 탈바꿈하는 실마리를 여기서 봤습니다.

왼쪽이 관행농업 논이고 오른쪽이 생명환경농업 논. 자세히 보면 오른쪽 벼들이 더 크다.


실제로 뽑아 봤습니다.


김훤주
※<경남도민일보> 7월 15일치에 실은 글을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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