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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총쇄록 24

함안총쇄록 답사기 (4) 함안읍성의 지금 모습은?

조 씨네 돌담 감나무밭 언덕 범상찮다 싶었더니 성벽이라네 산지 중심으로 자취 뚜렷 민가에도 일부 형태 유지 잡초·흙만 정리해도 옛 모습 회복 충분 1510년에 처음 쌓고 1555년에 다시 쌓은 함안읍성은 오횡묵 군수 시절에 이미 곳곳이 허물어져 있었다. 오횡묵이 1889년 4월 22일 읽은 에 7003척이라 적혀 있고 닷새 뒤 비봉산에서 내려다보며 "넉넉잡아 5리 정도(洽爲五里許)"라 했던 많은 구간이 그랬다. 다시 13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다른 지역 사람들은 물론 함안에 사는 사람들조차 함안읍성이라 하면 대부분 무너지고 허물어진 정도를 넘어 거의 없어졌다고 여기고 있다. 산지에 쌓은 읍성은 대부분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성벽과 치성에 더하여 마른해자와 명문 각석도 확인이 되었다. 옛..

함안총쇄록 답사기 (3) 함안읍성의 130년 전 모습

북쪽은 장대 남쪽은 달구경 명소 동서남북 4문4색 서문, 지금 '성고개'에 위치 비밀통로로 쓰다 허물어져 남문은 민관 어울리던 장소 등불 낙화 구경 등 함께해 방 내걸고 치안 살피고 사람 출입 잦았던 동문 북문은 위치 탓 이용 적도 북장대는 군사지휘소·피서지로 활용 무너지지 않은 지과정 남쪽 성벽 함안읍성은 1510년 경상도에서 삼포왜란이 터졌을 때 처음 쌓았고 1555년 전라도에서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고쳐 쌓았다. 오횡묵이 함안군수를 지낸 때는 이로부터 330년가량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읍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889년 4월 21일 부임 행로에 읍성이 나온다. “(무진정 방향에서 오면) 지과정 오른편(서쪽)이 읍성이다. 북문은 오래 전에 무너졌고 지과정 남쪽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동문은 절반쯤..

함안총쇄록 답사기 (2) 관아 건물과 공간의 재구성

기록 따라 그렸더니 선명히 드러난 읍성 진면모 옛 모습 전쟁·풍화로 상실 문헌 바탕으로 본보 재현 관광자원 활용 가치도 충분 함안읍성 안팎의 조선시대 관아 건물은 6.25전쟁 때 모두 불탔다. 담장·주추·비석 등 돌이나 흙으로 된 것은 타지 않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졌다. 지금은 객사·동헌을 비롯한 몇몇 누대가 이름 정도만 이런저런 그림과 글로 흩어져 있을 뿐이고 사람들 기억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을 살펴보니 130년 전 모습을 상당 부분 재현할 수 있었다. 군수 부임 행차 오횡묵은 1889년 4월 21일 함안읍성 동문 밖에 이르러 지과정에 올라 잠시 쉬었다 남문을 거쳐 성안으로 들어간다. 다시 태평루를 지나 객사에 먼저 들렀다가 동헌 정청(正廳)에 자리 잡고 부임 행사(=좌기취坐起吹)를 치른..

함안총쇄록 답사기 (1) 채원 오횡묵과 함안총쇄록

130년 전 군정 대소사 담은 수령의 흥미진진한 일기 공적 사건부터 일상까지 당시 군수 자세하게 기록 4년 역사 생생하게 담아 “역동적 활동사진” 평가 기록유산이 넘쳐나는 함안 함안은 아라가야 말이산고분군만으로도 이미 유명하지만 기록유산도 더없이 풍성한 고장이다. 첫머리에는 와 이 꼽힌다. 는 1587년 당시 군수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주동하여 136쪽 분량으로 펴냈다. 가장 오래된 현전 읍지(邑誌)로서 지역지 편찬의 모범이 되었다. 은 채원(茝園) 오횡묵(吳宖默)이 1889~93년 함안군수로 있으면서 적은 일기다. 형식에 매이지 않고 객관 정황에다 본인의 느낌까지 섞어가면서 수령의 하루하루를 기록하였다. 간송당 조임도(澗松堂 趙任道)가 1639년 펴낸 도 있다. 금라는 함안의 옛 이름이다. 함안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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