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현 정부의 잔인한 현실은 누가 그릴까?

김훤주 2009. 6. 1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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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의 정체성은 뿌리뽑혀 떠돎(diaspora)에 있습니다. 서경식은 재일조선인으로 국적은 대한민국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도 그이는 환대받지 못합니다. 스스로를 '재일조선인'이라 규정하는데, 여기 '조선'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넘어서는 그런 나라를 뜻하고 있습니다.

서경식이 조선인임을 포기하지 않으니까, 자기가 살고 있는 일본에서도 대부분은 그이를 외면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제가 알기로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실은 그이에게는 천형(天刑)일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 일본에 살게 된 원인이 그이에게 있지 않고, 일본 식민지배 그리고 어버이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천형이 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집단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독립된 개인으로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면에서는 말입니다. 이런 서경식이 서양 근대미술 기행집 <고뇌의 원근법>을 펴냈습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에 이어 세 번째라고 합니다. 저는 그이의 독립'된' 면모를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경식은 이 책을 위해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응시한 화가들을 찾아서' 유럽을 돌아다녔습니다. 서경식은 "이들의 예술을 보고 '잘 그렸다'거나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대신, "정신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격렬한 고투를 봤던 것"입니다. "대상을 철저하게 응시하는 힘"을 느꼈던 것입니다.

서경식에게 '미의식'은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었습니다.(원래 말뜻도 그럴 것입니다.) "'무엇을 미(美)라 하고 무엇을 추(醜)라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서경식에게 '미'라는 것은, "'얼마나 절실한 그림인가' 또는 '얼마나 치열한 그림인가'라고 감탄하게 만드는" 그런 것들입니다.

서양 근대 미술에는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서경식이 적은 글을 그대로 옮긴다면 이렇게 됩니다. "'예쁜' 작품들을 그려서 사람들을 위로하려 하지 않았다." "진실이 아무리 추하더라도 철저하게 직시해서 그리려 했다. 그것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거기에서 '추'가 '미'로 승화하는 예술적 순간이 생긴다."

독일 화가 오토 딕스(1891~1969). 1911년 니체에 빠집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자원 입대해 1915년 서부전선에 투입됐습니다. 주로 서부전선에 있다가 1918년 12월 제대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눈으로 보기 위해" 참전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이는 말 그대로 차마 겪지 못할 것들을 겪었습니다.

딕스는 1920년부터 '전쟁'을 담은 작품들을 내놓았습니다. 전쟁은, 잔인했으나 전쟁은 한편으로 일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네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 나날들이라 일컬어지는 그런 것입니다. 1933년 나치 집권 이후 '퇴폐미술작가'로 몰렸고 제2차 세계대전에 끌려갔습니다. 전장은 달랐지만 아들들도 전쟁포로가 됐고 딕스도 함께 전쟁포로가 됐습니다.

1946년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그이는 동독 출신이면서도 서독에 남아 디아스포라로서 "분단된 화가"로 살았습니다. 우리랑은 달라서, 그래도 독일은 분단 상황에서도 딕스가 동서를 오갈 수는 있었는가 봅니다. 동·서독일 양쪽에서 인정을 받았지만, 동독은 그이의 반자본주의적 측면만 활용을 했고, 서독에서는 추상주의가 물결치면서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독가스의 희생자들.


서경식에 따르면, 레마르크가 쓴 전쟁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가 딕스의 작품들과 놀랍도록 공명하고 있습니다. 동판화 '독가스의 희생자들'(1924년) 앞에서 서경식은 소설 구절을 읽습니다. "야전병원에서 무서운 모습을 봤다. 독가스에 당한 병사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목이 졸려 죽을 듯한 고통을 겪으면서, 화상을 입어 허파가 조금씩 썩어 들어가고 문드러지는 모습이다."

앞에, '독가스를 마시며 전진하는 돌격대'라는 동판화도 있습니다. 여기서도 서경식은 레마르크의 소설 한 구절을 읽습니다. "독가스탄의 둔중한 파열음은 폭탄의 파열음과 함께 뒤섞여서 들린다. 가스 마스크를 쓴 최초의 2~3분이야말로 죽음과 삶의 경계이다. 이 마스크에 가스가 스며들지는 않을까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전쟁의 잔인함이 읽힙니다. 도대체 누가 무엇을 위해서 전쟁을 일으켰을까요. 식민지를 위해? 더 큰 지배를 위해? 자본의 탐욕을 더욱 확실하게 보장해 주기 위해? 도대체 누가 고통을 받을까요. 전선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전선의 앞 또는 뒤에서 폭력에 말 그대로 노출되고 마는 사람들은 또 누구일까요.

여성반신상.

'여성반신상'(1926년)은, 보기에는 '전쟁' 그림이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무엇보다 더한 '전쟁' 그림입니다. 보니까 어떻습니까. 보는 눈동자를 어디에다 맞출 수 있을까요? 서경식은 말합니다. "'이 여성은 잠시 후 강간당할 것이다.' 그런 상상이 집요하게 떠올랐다. 그녀의 눈앞에서 집은 파괴되고 남편은 살해되고 어린 딸은 강간을 당했다. 남자들은 냉혹한 눈을 그녀에게 돌려 '다음은 너다. 옷 벗어!'라고 소리지른다. 완전히 절망한 그녀는 이제 막 강간당하려 한다.

물론 이건 나의 상상에 지나지 않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여성들이 실제로 당한 고통과 굴욕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그 몇 배에 이르는 고난이 여성들을 덮쳤다. 이 그림은 마치 그런 사태를 예견이라도 하는 듯하다. 일본의 침략전쟁, 베트남 전쟁, 유고슬라비아 내전 등 모든 전쟁에서 여성들이 실제로 겪어야만 했던 고통이다. 오늘도 전쟁이나 분쟁이 계속되는 세계 곳곳에서 여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다."

딕스는 전쟁말고 '늙은 연인들'(1923년)도 그렸습니다. 서경식은 말합니다. "'사랑'이나 '성욕'을 둘러싼 미사여구, 이를테면 '노인에겐 성욕이 없다'는 사이비 도덕관이나 '서로 사랑하는 이들은 아름답다'는 위선을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형태로 철저히 파괴한다. 그 파괴는 잔혹할 정도다. 노인에게도 성욕은 있고 사랑은 종래의 의미대로 아름답지도 않다."

늙은 연인들.

"나치는 열등한 존재로 본 '유대인'이나 장애인, 동성애자는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동성애자를 적대시한 건 이들이 생식과 결부되지 않은 성애를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생식능력이 없다고 간주된 노인(특히 여성)의 성행위는 (유럽에서) 전통적 세계관으로 보면 소름끼치는 반윤리적 행위였으며, 나치적 세계관으로 보면 반사회적이기까지 했다."

어떻게 보면, 나치의 폭력은 그리스도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유일신 사상은 상대를 배타합니다. 다른 신을 믿거나, 신을 믿지 않는 존재들을 무시합니다. 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인간은 존재가치가 없다고도 봅니다. 성교(성애)는, 그리스도교 경전에 따르면 번식을 위해서만 해야 합니다. 그러니 늙은이의 성교는 침뱉어 버릴 대상이었습니다.

서경식은 문제의식을 '여기' '이 땅'으로 돌립니다. "한국에서 내가 본 미술은 왜 그렇게 예쁘게만 마감되어 있는 것일까?" "한국의 근대미술은 '지나치게 예쁘기만 하다'는 것이다. 민중미술의 일부는 예외라 할 수 있으나, 내가 본 한에서 민중미술운동은 현재의 한국에서는 이미 역사화되었으며, 그 맥락이 현재도 계승·발전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예쁘다'는 찬사가 아니다. '예쁘다'는 것은 보는 이가 그다지 저항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루하다는 뜻도 된다. 미술도 인간의 영위인 이상, 인간들의 삶이 고뇌로 가득할 때는 그 고뇌가 투영돼야 마땅하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하다."

머리를 때리는 대목은 이렇습니다. "조선 민족의 근대는 결코 '예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현재도 우리의 삶은 '예쁘지' 않다. 미술에서 '위안'이나 '치유'를 구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필요는 없다. 그것도 미술의 가치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미술의 가치라고 한다면 오늘날 위대한 작품이라고 인정하는 대다수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서경식이 묻습니다. "예술적 역량이란 원래 무엇인가. 기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독창적인 수법으로 그려내는 인간적인 역량이다. 근대의 진정으로 위대한 예술가들은 이러한 역량을 발휘했다."

여기에 대한 화답 또는 응전은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끔찍하지 않았다고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명박 정부 들어 더욱더 끔찍해진, 전쟁 같은 우리의 일상은 누가 그려줄까요?

건당 30원 인상 수수료 원상회복을 요구하다 화물연대 박종태가 음독 자살을 했고, 주거권을 확보하려다 용산 참사로 목숨을 잃은 철거민이 여럿이고, 심지어는 대통령을 지낸 노무현조차 이명박 정부의 살기 어린 조롱과 모욕을 참다 못해 자살 서거하는 현실입니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소주잔을 돌리는 안온함(?)은 없어진 지 오래지요. 잘리지 않은 손가락 발가락이 고마운 시절입니다. 이런 대한민국 현실을, 어떤 대한민국 사람이 그릴까요. 전혀 예쁘지 않은 이런 모습을.

서경식이 쓴 <고뇌의 원근법>은 이밖에 에밀 놀데, 에른스트 루트비히 카르히너, 지크프리트 노이엔하우젠, 헨드리크 테르브뤼헨, 헤렛 빌럼스존 헤다, 로비스 코린트, 캐테 콜비츠, 조지 그로스, 오토 그리벨, 펠릭스 누스바움 등도 다뤘습니다. 제가 보기에, 절실함은 다 같았습니다.

김훤주

고뇌의 원근법 - 10점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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