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원에는 국보가 하나도 없습니다. 보물도 겨우 하나뿐입니다. 불곡사 석조 비로자나불상(보물 436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밖에 봉림사 터 진경대사보월능공탑과 탑비가 보물 362호와 363호로 지정돼 있습니다만 일제 강점기 수탈 반출돼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창원 성주사(주지 원정 스님)가 대웅전 삼존불 등을 문화재청에 보물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5월 28일 복장 유물을 수습하면서, 만든 시기가 350년 전인 1655년으로 확인된 석가모니불상과 아미타·약사불상, 영산전의 석가모니불과 지장전 지장보살상이 대상입니다.

특히 대웅전 목조 삼존불 가운데 석가모니불 복장(腹藏)에서는 '창원 웅신사 신조 불상 시주기'(1655년)와 복장문(1729년) 등 유물이 발견돼 당시 시대상과 조성 경위 등을 일러줍니다. 대웅전과 영산전에 있는 불상을 개금하기 앞서 원정 스님과 고영훈(경상대 교수)·이영현(동아대 교수) 문화재위원, 김태종 신도회장 등이 입회한 가운데 복장 유물을 확인했을 때 이런 문서가 나왔답니다.

성주사 대웅전과 영산전 전경. 당연히 오른쪽 작은 전각이 영산전입니다.

성주사는 "복장 유물 확인에 입회한 문화재위원들에게서 대웅전 목조 삼존불상과 영산전 석가모니불상 등이 보존 상태가 좋고 불상 조각이 섬세해 예술성이 높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들 불상과 지장전 지장보살상을 보물로 지정해 달라고 문화재청에 신청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했습니다.

2.
발견된 유물에서 관심이 쏠리는 대목은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진 박문수(1691~1756) 관련 기록과 '웅신사(熊神寺)'라는 절간 이름입니다. 박문수는 1729년(영조 5) 복장문에 나오고 웅신사는 1655년(효종 5) 시주기에 나옵니다.

성주사는 835년(신라 흥덕왕 10) 무염(無染)국사가 왜구를 막기 위해 지은 절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주사를 두고 곰절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조선 시대 임진왜란 당시 불타 없어졌다가 1604년 다시 세울 때 곰이 나와 건축 자재를 옮기는 불사(佛事)를 했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창원 웅신사 신조 불상 시주기. 불교신문 사진.


이번 1655년 시주기에 나오는 글자 '웅신사'가 이를 확인해 줍니다. 1604년과 1655년 사이에 이름이 성주사에서 웅신사로 바뀌었음을 일러주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1729년 작성된 복장문은 '경상우도 창원 남면 불모산 성주사'로 시작됩니다. 불상을 처음 조성하던 1655년에는 웅신사였다가 70년 남짓 지난 1729년 개금 불사를 할 때는 다시 원래 이름인 성주사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지요.

이를 두고 김태종 신도회장은 "불상이 만들어진 시기를 정확하게 알게 됐을 뿐 아니라 절간 이름이 성주사에서 웅신사로, 웅신사에서 다시 성주사로 두 차례에 걸쳐 바뀌었다는 사실이 문자로 확인됐다는 의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진 박문수가 나오는 개금불사 복장문. 불교신문 사진.


3.
다음으로는 박문수가 됩니다. 박문수는 많은 이들에게 탐관오리(이를테면 <춘향전>의 변학도 같은)를 혼내주고 벼슬아치들의 가렴주구를 응징하며 가난한 서민 백성들 편을 드는 기특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얼마나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그린 만화책이 지금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습니다. 

1729년 복장문에 "본도 방백(本道 方伯) 박문수"가 나옵니다. 박문수가 1727년 영남 암행어사를 지냈고 이듬해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서 경상도 관찰사가 됐다는 사실에 비추면 동일 인물일 개연성이 아주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창원향토사연구회 권순학씨는 "당시 진행한 개금불사에 시주를 했어야만 복장문에 이름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며 "그렇다면 숭유억불이 엄청났던 당시 시대상에서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어사 박문수가 경상우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불상 개금하는 데 재물을 보탰다는 얘기입니다.

권순학씨는 이어 "박문수와 관련해서는 아자방이 있는 칠불암 등 절간 100여 개를 폐사하려고 지리산 화개동천에 갔다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는 등 여러 설화가 있는데, 이번에 복장 유물 연구를 통해 사실 관계가 어느 정도 밝혀지리라 기대한다"고도 했습니다.

권순학씨 이 말에는 박문수가 불교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경험을 했고 이로 말미암아 불교를 믿게 됐으며 그 결과 이렇게 시주를 하게 됐다는 뜻이 깔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아마 이번에 보물 신청과 맞물려 문화재청이 검토하는 과정에서 확인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아직 수습 조사하지 않은 복장 유물이 아주 많거든요. 

당시 경상우도 관아는 창원이나 마산이 아니라 진주에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창원은 군사기지였고 마산은 한적한 어촌이었을 뿐입니다. 진주에서 창원 성주사까지는 지금이야 한 시간 남짓밖에 안 걸리지만 그 때는 아주 먼 길이었습니다. 오가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성주사가 아주 큰 절이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하동 쌍계사보다 작습니다. 그래서, 박문수가 성주사랑 특별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시주를 했으리라 저는 짐작합니다. 관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규모도 크지 않은 절에 관찰사가 일부러 재물을 시주할 까닭이 뾰족하게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숭유억불 시절이라, 함양 일두 정여창 무덤에서 보듯 승안사 절터를 그대로 묘지로 쓰거나 거기 있는 석재로 바로 무덤 축대를 쌓아도 아무 말 못했습니다.  남명 조식 유두류록에서 보이듯이, 양반이 쌍계사에 들어가 법당에서 기생을 끼고 술을 마셔도 까딱없는 그런 시절에 이리 시주를 한 것은 아주 특별해 보입니다.

성주사 들머리 골짜기 그윽한 풍경.


4.
이들 불상이 문화재청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 보물로 지정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복장 유물도 이번에 수습한 문서들말고는 대부분이 그대로 있다는데, 문화재청 조사 과정에서 이들에 대해서도 연구가 잘 돼 박문수가 왜 시주를 했는지 확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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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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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daum.net/ahssk 유림 2009.06.17 13: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창원은 관광안내 책자가 휴게소에 있더군요
    서울 지하철 역에도 창원 광고가 붙어있고요
    마산은 ㅡ.ㅡ;;;

  2. Favicon of https://earthw.tistory.com 지구벌레 2009.06.17 13: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 갑니다.
    저역시 창원은 공업도시로 노동조합과 민주노동당 권영길의원으로 더 앞서 와닿는 도시입니다.
    하지만 이런 옛날 얘기가 훨씬 재밌네요..ㅎㅎ
    거기다 이런 궁금증을 일으키는 미스테리가 있으면 더욱...~~

  3. 까막눈 2009.06.17 14: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기요..
    심청전이 아니구 춘향전 아닌가요??

  4. Favicon of http://susia.tistory.com 바람나그네 2009.06.17 15: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항상 유용한 글을 써 주셔서 잘 보고 있습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 ^^

  5. 김태종 2009.06.18 18: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주사 신도회장입니다. 신문기사와 블로그에 있는 글도 잘 읽었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복장유물은 상당히 의미가 있어 조사를 잘 마무리하여 좋은 결과가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이름은 김태종이오니 수정바랍니다. 수고하십시요

  6. 31번국도 2009.06.24 18: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생님 글들을 가끔씩 접하면서 잘 읽고 있습니다..대부분 공감하면서 문제의식을 갖게하고..암튼 고맙게 읽고 있는데여..

    오늘 글의 18세기 박문수 어사 활동시기를 "억불숭유"로 적용하기엔 좀 무리가 있지않나 합니다..
    조선후기엔 불교가 어느정도 신앙의 자리를 차지하고, 특히 정치-경제적인 변동 등으로 사찰건축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 시기이거든여.. 새롭게 성장하는 부농이나 상공업계층의 후원하에..
    그리고 화엄사 [각황전]의 경우는 숙종임금이 직접 각황전이라 이름하고 현판까지 쓴 걸로 아는데여..

    암튼 조선후기사회를 '억불숭유' 틀로 바로보는 건 좀 무리가 있지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건승하세여~~ㅎㅎ

    • Favicon of https://100in.tistory.com 김훤주 2009.06.25 16: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맙습니다. 저는, 억불의 기세가 대한민국까지도 이어지는 줄 알고 있습니다. 성철 스님(제 기억으로는) 등등이 불교혁신운동을 벌이기 전에는, 절에 사람이 찾아가면 스님이 절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찾아간 사람이 스님에게 절을 올리는 지금으로 보면 영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뭐 그런 정도였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박문수보다 조금 처지는 시대 사람인 연암 박지원 글에도 억불하는 얘기가 많이 나오고요. 그리고 마찬가지 조금 처지는 시대 사람인, 초의 선사랑 교우했던 추사 김정희 같은 이들 글에서도 상대 스님을 하대하는 얘기들이 적지 않은 줄 압니다만.

      선생님 말씀하신 그런 대목도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만. 불교가 민간에서 신앙으로 광범하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 전기 후기를 통틀어 달라지지 않았을 테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책이 숭유억불이었다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요.

      그리고 어떤 임금 또는 왕후가 불교를 깊이 믿거나 해서 절을 짓기까지 하는 일은 조선 전기에도 꽤 있었다고 합니다. 숙종이 각황전 이름을 짓고 글씨까지 써 줬다는 얘기를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 같은 임금이 있었지요. 제가 알기로는 불경을 언해(한글로 풀이)하는 작업까지 진행했지요. 그냥, 그렇다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