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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세상

최인호 소설 <제4의 제국>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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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역사를 한 눈에 알게 해주는 책이 나왔습니다. 인제대학교 박물관 이영식(가야문화연구소 소장) 관장이 펴냈습니다. 제목은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 기행>입니다.

1. 가야 역사 빠진 '삼국시대' 표현은 틀렸다

이영식은 가야 역사에 대한 최신 정보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제대로 읽어보면 진짜 목적은 우리 고대 역사에서 빠져 있는 가야사를 있어야 마땅한 제자리로 돌리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답니다.

"고려시대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에 적은 것처럼 가야가 여섯 개가 아니고, 열두 개 이상 되는 가야 나라들이, 2000년 전부터 1400년 전까지, 그러니까 백제·고구려가 신라에 통합되기 100년 전까지 600년 동안 고구려·백제·신라 삼국과 함께 나란히 해온 고대사의 당당한 주체"라는 얘기입니다.


이영식은 말합니다. "100년 먼저 망한 것과, 그 6배나 되는 600년 동안 함께 우리 고대사를 이루어 왔던 역사 가운데 어느 쪽에 더 중요한 의미를 두어야 하는지는 분명할 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산술의 의미조차 존중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야의 역사는 홀대받아 왔습니다."

이어지는 기록입니다. "삼국시대(三國時代)라는 말이 대표적입니다. 우리의 고대사를 고구려·백제·신라 삼국만의 역사로 생각해 왔던 까닭에 가야의 역사는 빠지고 말았습니다. 가야사의 탈락은…… 600년 동안이나 가야로 불렸던 고대의 부산과 경남, 그리고 경북과 전라도 일부의 역사가 무시됨을 뜻합니다.


그렇게 한 결과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우리가 가야사를 거의 버려두다시피 하고 있을 때 일본은 가야사 탈락의 공백을 '임나(任那)일본부설'과 같은 식민사관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임나任那''일본日本''부府'는, 가야 땅(임나) 땅에 와 있던 왜(일본)의 사절단(부)일 뿐인데도,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라는 글자만을 근거 삼아 일본(왜)이 가야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기구(부)였다고 억지를 부린 것이지요.


이영식은 이 책에서 "전기(1~4세기)에는 김해가 '큰 가야'였고 후기(5~6세기)에는 경북 고령이 '큰 가야'였으며, 일본이 꾸며냈다고 생각하기 쉬운 '임나(任那)'도 실은 김해와 고령을 높여 '임(主)의 나라'로 부르던 데서 비롯된 가야의 대명사"라고 요약했습니다.


당연히 일본과 우리나라 양쪽 사례 모두를 들어 설명했습지요. <일본서기>는 물론이고, 고구려 광개토왕릉비,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의 '강수전(强首傳)', 신라 진경대사탑비에도 '임나' 표기가 나온답니다.

2. 이영식이 꼽은 가야 역사의 대표선수 일곱


김해·부산·고령·합천·창녕·함안·고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물론 경남 전역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가야 옛 땅의 자취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고장'이라면 정답이 되겠지요. 이영식 관장이 이번에 여기 이 일곱 군데를 돌아다녔습니다.

맨 처음 들른 데는 당연히 김해입니다. 가야 역사가 시작되는 고장이거든요. 구지봉에서 '구지가'를 거쳐 회현동 패총에 나온 중국 화폐 화천(貨泉)과 봉황대·관동리 유적의 항구 시설을 들어서, 고대에는 가락국(김해)이 거의 유일한 중개무역항이고 해상왕국이었다고 말합니다.


아울러 가락국 왕궁터로 봉황토성 자리를 짚으면서 처음 수로왕릉은 지금처럼 조그마했지만 여러 차례 개축되면서 지금처럼 커졌다는 짐작도 곁들였습니다. 그리고 수로왕과 허왕후의 출신지는 무슨 인도나 이런 데가 아니고 서북한의 고조선이나 낙랑·대방군이리라는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대한해협을 건넌 가야의 부뚜막 귀신'과 '일본에서 신이 된 가야인들'도 줄줄이 다룬 다음, "가야 산성으로 확인되는 최초 사례가 될" 김해 주촌면 양동산성 아래 양동고분군을 설명하면서는 주촌(酒村)이 원래는 배 주(舟)자를 썼고 고려시대까지 항구로 크게 번성하던 곳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김해평야가 당시에는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어 낙동강을 건너가 부산 동래 복천동 고분군을 만납니다. 이영식은 유물과 기록을 통해 동래는 거칠산국, 해운대는 장산국이라 하면서 5세기 전반까지는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지닌 독립국이었다가 그 뒤 신라로 편입됐다고 했습니다.


가라국이라 하는, 5~6세기 가야의 맏이 대가야였던 경북 고령. 가야 산신 정견모주가 천신의 빛을 받아 뇌질주일(朱日)과 뇌질청예(靑裔)를 낳아 '붉은해朱日'는 고령에 남았고 '새파란 후예靑裔'는 김해로 갔다는, 김해 구지봉과는 다른 신화를 소개하며 고령에 처음 반로(半路)국이 있었고 이것이 대가야로 발전했다고 해석했습니다. 청동기 시대 반로국이 있었다는 근거는, 알터라는 데에 남아 있는 암각화에서 찾았습니다.


또 임금의 우물(어정御井=왕권이 성립되기 전에는 공동체 구성원과 제사장이 구분없이 같은 물을 썼겠지만)과 가야의 피라미드라는 지산동 고분군, 그리고 거기에서 이뤄진 대규모 순장을 죽 보여주며 대가야의 규모와 실력을 얘기해 줍니다. 지산동 고분군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가실왕과 가야금과 우륵을 다룬 데서는 작곡을 지시한 가야금 12곡의 이름이 가야 12개 나라 이름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의령군 부림면 신반(산반해국) 출신인 우륵은 친백제 노선이던 대가야 가실왕에게 굴복을 당했기 때문에 나중에 친신라를 했으리라고도 했습니다.


<삼국사기>는 물론 <일본서기>에도 562년 신라의 대가야 병합 뒤에는 가야에 대한 기록이 아예 없다고 합니다. 이영식은 532년 김해 가락국의 신라 투항 이후 562년 대가야 멸망까지 부산·경남·경북·전북에 있던 가야 여러 나라들은 신라 또는 백제의 회유와 침략 앞에 격파돼 갔으리라 봅니다. 고령 대가야가 마지막 가야라는 얘기입지요.


합천 쌍책면 다라리 고분군. 다라리에는 다라라는 가야 나라가 있었습니다. <일본서기>를 따르면 6세기 전반 함안 아라국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외교사절도 보냈고, 중국 양무제 때 그려진 '양직공도'에도 백제·신라·대가야와 함께 백제 둘레 이름난 나라로 나와 있습니다. 곧바로 옆에서 온전 고분군도 발굴됐는데, 4세기 전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200년 넘는 동안 가야계·신라계·백제계로 갖은 유물을 쏟아냈답니다.


창녕 교동 고분군 전경과 출토유물.


다음은 비사벌로 불러야 맞는 창녕. 기원 전후 전기 가야에서는 불사(不斯)국이었으나 창녕 지역에서는 고고학 발굴 조사가 늦은 시기 대형 고분만 팠기 때문에 관련 자료는 거의 없는 형편이랍니다. 비사벌은 창녕 교동 고분군 조성 시기인데, 일본 녹나무 목관이 나온 7호분(5세기 전반), 고구려 환두대도가 나온 11호분(5세기 중반), 신라 은제 허리띠가 나온 12호분(6세기 전반)을 차례로 이어가면서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을 떨쳐내며, 독자 세력이었던 가야를 지배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설명했습니다.


창녕 진흥왕순수비를 두고는 가야를 공략하는 신호탄이라 했습니다. 그것도 마지막 신호탄이겠지요. 561년 창녕비를 세우기 앞서 신라는 이미 555년에 창녕 땅에 하주를 설치했습니다. 창녕비문에는 스님 일행과 진흥왕을 따라온 중신(김유신의 할아버지 무력치武力智 따위)과 사방 군주(四方 軍主) 이름이 나타납니다.


창녕 비사벌 군주는 물론이고, 고구려·백제와 치열하게 맞서고 있던 한강 유역의 한성 군주까지 불러왔습니다. 한강 유역 쟁탈전과 맞먹을만큼 급박하고 중요한 일이 창녕 비사벌에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안변의 비리성 성주, 상주의 감문 군주도 죄 불러 모았습니다. 창녕을 베이스캠프 삼아 남쪽 함안 아라국과 북쪽 고령 대가야로 창끝을 겨누는 군사 퍼레이드였습니다.


전기도 후기도 모두 번영을 누렸던 함안 아라국. 말산(末山) 고분군에서 말산은 말이산(末伊山=머리)의 잘못이라 했습니다. 왕을 머리에 모시지 끄트머리에는 모시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또 있지도 않은 허구일 뿐인 '가야연맹설' 탓에 함안 아라의 대단함이 묻혔다고도 했습니다.

연맹(聯盟=league)은 '함께'가 있어야 하고 또 '맹주'도 있어야 하는데 가야 역사에는 '함께'와 '맹주'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허구 덕분에 후기 대가야 고령과 전기 대가야 김해만 눈길을 끌었지만, 실제로는 아라가 한강 이남 78개 나라 가운데 랭킹 5위에 드는 큰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소가야가 아닌 쇠가야 고성. 지금 이름 고성(固城)은 단단한 성이라는 뜻이고 조선인지 고려인지 한 때 이름이었던 철성(鐵城)은 쇠로 만든 성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스님이 적은 소가야는 쇠(철)의 가야로 봐야 맞다고 이영식은 말했습니다.

이것은 제 생각인데요, 이전 이름인 고자(古自) 고차(古嵯) 고사포(古史浦) 따위도 죄다 곧-굳(固)을 이르는 어간을 물고 있습니다. 물론, 이영식이 책에서 말하는 바는 이런 고자(古自) 고차(古嵯) 고사포(古史浦) 따위가 (포항 호미곶처럼 툭 튀어나온 뭍을 뜻하는) '곶'이라는 것이지만, 저는 그렇기만 할까? 이리 여기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소'가야가 아니고 '쇠'가야임을 뒷받침하는 유적이 있답니다. 바로 동외동 패통 유적 아랫단 야철지와 윗단 제사터에서 발견된 새 두 마리 청동 장식이랍니다. 이 대목에서, 그리고 바로 앞 함안 말산을 이르는 대목에서, 저는 사실 이영식이 가야 옛 땅에 사는 현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덜 떨어진 것들아, 선조들 욕보이는 잘못된 이름을 그대로 붙들고 있다니!"


책은 여기서 끝이 납니다. 나머지 가야는 둘러보지 못했습니다. 독로국(거제)·사물국(사천)·다사국(하동)·사이기국(의령)·산반해국(신반)·탁순국(창원)·골포국(마산)·장산국(기장·동래)과 산청·함양·거창, 전남 곡성·구례, 전북 남원·임실·장수·진안은 나중에 해야겠지요.


3. 가야가 '제4제국'이라는 최인호도 틀렸다


사실 앞선 얘기 따위는 가야 역사를 공부하는 학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 기행>의 값어치를 높이는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물곤 쉽고 재미있다는 측면도 제대로 평가를 받아야 하겠고 잘은 모르지만 이영식에게만 있는 독특한 측면이 있다면 이또한 높게 평가해야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책 말미 한 표현이 책의 값어치를 결정적으로 높였습니다. 가야를 '제4 제국'이라 이르는 등 사실보다 부풀리는 바도 옳지 않다면서 못을 박은 대목입니다. 이런 생각은, '삼국시대'라는 잘못된 표현과 마찬가지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과 가야가 아닌 다른 역사를 부당하게 깎아내리고 외진 구석으로 내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느 소설가가 외치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제4제국'이라니요? 요즈음 가야가 좀 잘 나간다 해도 제국은 아니었고, '4국시대'라는 말도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 나오는 소설가는 바로 최인호입니다. '경아'가 나오고 눈이 '난분분 난분분' 내리는 최인호의 소설 <별들의 고향>을 읽은 어릴 적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만, 2006년 발표된 <제4의 제국>은 좀 찜찜했습니다.


이 소설은 같은 해 9월 가야세계문화축전 임진택 집행위원장이 총감독을 맡고 연극인 이윤택이 연출을 담당해 <사랑의 제국>과 <태양의 제국>으로 구성한 대형 연극으로 꾸며지기도 했습니다. 또 이에 힘입어 KBS는 2008년 3월 창사특집 다큐멘터리로 <제4의 제국 가야>를 방송하기도 했습니다.


이영식은 그리 하면 안 되는 까닭도 함께 밝힙니다. "우리 고대사에는 고조선을 이은 천년 왕국의 부여도 있었고, 옥저·동예·탐라 등의 역사도 있었습니다. 4국이라 하여 부여사를 제외한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을 꾸미는 사람들이 좋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통일되면 부여사를 넣어 다시 '5국시대'로 해야 할까요? '제4'나 '4국시대'는 지금까지 '3국시대'라는 말 때문에 가야사가 차별받던 것과 아주 똑같은 논리와 역사 인식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저는 아주 멋진데…….

김훤주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여행 - 10점
이영식 지음/지식산업사


제4의 제국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최인호 (여백,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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