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봉하 발(發) 분노한 민심, 어디로 갈까

기록하는 사람 2009. 5. 25.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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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가 차려진 봉하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김두관 전 장관의 인사말은 "미안합니다"였다. 자신이 제대로 못해서 이렇게 됐다는 자책인 듯 했다. 그는 기자 외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그렇게 인사를 시작했다.

반면 배우 명계남 씨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그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에도 분통을 터뜨렸다. 오후 9시쯤 마을회관 뒤쪽으로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가 보내온 조화가 들어오자 "이거 뭐야! 떼!"라고 고함을 지르며 이름이 적힌 종이를 뜯어냈다. 민주당 장례지원팀 관계자들이 "왜 이러십니까"라며 만류했지만 그의 흥분은 식지 않았다. "강기갑이가 어떻게 여길 들어와. 지놈들이 한 일을 내가 알고 있는데!"라고 소리쳤다. 그는 앞서 민주당 의원들이 도착하자 "민주당이 여기 왜 와!"라며 오열하기도 했다.

시민들의 반응도 명계남 씨와 비슷했다. 오후 6시20분쯤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최철국 의원의 영접을 받으며 당직자들을 거느리고 마을로 들어왔다. 정 대표와 당직자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운구차를 기다리며 연도에 도열해 있는 시민들 가운데로 걸어왔다. 여기저기서 "막아!"라는 고함이 터져나왔다. "×새끼" "××새끼"라는 욕설과 함께 "잘 났다고 오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곧이어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와 심상정 전 의원, 조승수 의원이 도착했다. 그들은 정세균 대표 일행과 달리 도열해 있는 시민들 뒤편으로 조용히 입장했다.

◇자연발생적인 대중의 슬픔과 분노 = 정동영 의원은 시민들의 저지로 마을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돌아섰다. 한승수 국무총리도, 이회창 선진당 총재도 마찬가지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보낸 조화도 내팽개쳐졌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조화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10시쯤 '노사모 자원봉사자'의 명의로 '언론기자에게 드리는 글'이 배포됐다. 문상과 조화를 임의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물론 24일부터 모든 언론사의 철수를 요구했다. 실제로 자정을 좀 넘어 KBS 취재데스크가 시민들의 거친 항의와 퇴거 요구에 철수했으며, 중계차 역시 봉하마을을 떠나야 했다.

장례지원팀이 설치한 '취재기자석'도 수모를 당했다. 시민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몰려가 기자들이 앉아있는 천막을 흔들며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조선·중앙·동아일보 기자를 찾아 쫓아내겠다는 것이었다. 다른 자리 같으면 결코 지지 않을 기자들이었지만, 아무도 댓거리를 하지 못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천호선 전 청와대 대변인이나 민주당 당직자들에게 SOS를 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설득도 그다지 힘을 가지진 못했다.

취재편의를 위한 인터넷 연결은 물론 전원 공급도 되지 않았지만 불평을 제기하는 기자는 없었다. 일부 기자들은 공중화장실 안에 있는 전원을 연결시켜 화장실 입구에 앉아 기사작성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16절 종이에 빨간 매직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적어 들고 다니는 시민들도 있었고, '방상훈의 ×들은 오면 죽는다', '타도하자 정치보복 민주학살',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너희들도 죽으리라'라는 구호가 적힌 손팻말과 펼침막도 등장했다.

정동영 의원은 시민들의 저지로 결국 조문을 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NTM뉴스 제공


조화를 팽개치고, 문상을 저지하며, 취재진을 윽박지르는 이런 모습은 어떤 조직의 방침이나 지시와는 전혀 무관한 시민들의 자연발생적인 의사표시였다. 장례위원회도 구성되지 않은 상태여서 전체를 통제할만한 기구도 없었다. 다만 민주당 당직자들로 구성된 장례지원팀이 참여정부 출신 인사들과 함께 빈소에서 분향과 조문절차를 진행하고 있었고, 빈소를 벗어난 지역은 노사모가 자원봉사자 명패를 나눠주고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시민들의 그런 즉자적인 분노의 표출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이는 1960년 3·4월혁명과 1979년 부마항쟁 때 시위군중이 불켜진 상가와 주택의 창문을 향해 돌멩이 세례를 퍼붓던 상황과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민주항쟁의 정당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그냥 여과되지 않은 대중의 정서가 그렇게 드러난 것뿐이었다.

◇"그냥 가만히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 봉하마을에 모인 시민들 중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터넷카페 '부산·경남아고라'의 회원이라는 한 시민은 "나는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부치는 걸 보고 지지를 철회했다"면서도 "그러나 이번 그의 죽음은 이명박 정부의 정치보복에 따른 살인이 명백하다"고 말했다.

김해 진영읍에서 봉하마을 진입로까지 기자를 태워준 택시기사도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이명박(대통령)이 너무 심했죠. 그래도 한 나라의 대통령을 한 사람인데, 열 세시간 동안이나 가둬놓고 조져댔으니…. 사실 까놓고 말해서, 권력 내놓고 물러나는 대통령한테 퇴임 후에 좋은 일 해보라고 준 돈이 그렇게 큰 죄가 됩니까? 이건 진짜 아니죠."

봉하마을에 걸려있는 검은 펼침막.


그보다 앞서 기자가 처음 노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들은 것은 23일 오전 광주에서였다. 다른 볼 일로 광주에 갔다가 그 소식을 듣고 고속터미널로 가는 택시를 탔다. 그 택시의 기사는 누군가 아는 사람과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 저나 노무현이 죽었대. … 오늘 아침에…. 농담 아니라니까? … 봉하마을 갈 준비나 해야겄다."

전화를 끊은 그에게 물었다.

"자살이랍니까? 실족이랍니까?"

"자살이겄죠. 자살로 믿고 싶네요. 오죽했으면 그랬겠어요. 대통령 물러나면서 받은 돈, 그게 뭐라고…. 얼마나 시달렸겠어요? 그냥 가만히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사실 난 노무현 안찍었거든요. 그런데도 기분 참 꿀꿀하네요."

◇그들의 울음은 독기를 품고 있었다 = 봉하마을에 머물렀던 24일 새벽 3시까지 빈소와 노사모기념관의 임시분향소에는 조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정말 복받치는 듯 서럽게 울었다. 그들의 울음소리엔 한(恨)과 독기가 서려 있었다.
 
특히 남성 조문객들은 "이 ××놈들"이라는 욕설을 내뱉으며 울었다. 새벽 4시에 가까워 봉하마을을 걸어나가는 약 2km의 거리에도 마주 들어오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나가는 사람과 들어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간헐적인 울음소리와 함께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봉하마을에 켜진 촛불, 어디까지 갈까?


자신의 가족이 아닌 정치인의 죽음에 이토록 독을 품고 우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조병옥 박사가 선거 한달 전 갑자기 병사했을 때도 눈물 흘린 국민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3·4월혁명의 시초가 되었던 3월 15일 밤 마산 남성동파출소 앞에 모여든 시민들은 '유정천리'의 가사를 바꾼 노래를 처연하게 불렀다고 한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선생 뒤를 따라 / 장면박사 홀로두고 조박사도 떠나갔다 / 가도가도 끝이 없는 당선길은 몇굽이냐 / 자유당에 비가 오네 민주당에 꽃이 피네 / 세상을 원망하랴 / 자유당을 원망하랴 / 춘삼월 15일날 조기선거 웬말인가 / 천리타국 땅에서 객사죽음 웬말인가 / 시름없는 신문들고 / 백성들이 울고 있네."

그로부터 49년 후인 2009년 5월 23일 밤 김해 봉하마을의 노사모기념관에는 MBC 드라마 <고맙습니다>의 주제곡 '당신은 바보네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상과 함께 울려퍼지고 있었다.

"당신은 바보네요 / 정말 고맙습니다 나 하나밖에 모르고 / 아낌없이 다 준 사람 당신은 천사네요 / 때론 힘들고 지칠텐데 / 아무것도 볼 것 없는 사람을 변함없이 믿어주네요 / 이상하죠 그댄 눈물샘이 없나봐요 / 아파도 날 위해 늘 웃어주네요 / 그대 곁에서 난 행복해서 우네요 / 목끝에 차 있는 그말 정말 사랑합니다 / 표현도 못하는 못난 내 사랑 이제서야 말하네요."

49년 전 '유정천리'가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켰다면, 오늘 '당신은 바보네요'는 어떤 사회적 변화를 가져올 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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