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일제 침략은 나쁘고 베트남 침공은 좋은가

김훤주 2009. 2. 19. 16:25
반응형

2006년 5월 ‘재일 조선인’ 서경식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경남대학교 사회학부 김재현 교수 소개로 만나 인터뷰 기사를 썼었지요. 밤늦게까지 얘기를 나눴는데 만나서 뿌듯하다는 느낌과 함께, 참으로 미안하다는 생각이 꾸물꾸물 기어 올라왔습니다. 거북했습지요.

그리고, 그 때는 전혀 몰랐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이는 대한민국 지식 풍토에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개념을 들여놓은 여럿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 명입니다. 디아스포라. 모르시는가요? 우리말로 옮기면요 ‘난민’쯤이 되겠습니다.

대문자 디아스포라는 ‘유대 난민’이라는 좁은 뜻이지만 소문자로 시작하면서 ‘난민 일반’으로 뜻이 넓어졌다 합니다. ‘뿌리 뽑힌 이’지요. 그러므로 재일 조선인 서경식도 난민이고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독일에 머문 음악가 윤이상도 난민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도 더할 나위 없는 디아스포라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고국에서 뿌리 뽑혀 일본군 주둔지로 끌려간 데 더해 고국에서 한 번 더 버려졌으므로 ‘이중’ 난민이라 해야 하겠지요.


‘난민’ 서경식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묻습니다.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제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중 기준인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일본의 조선 침략은 나쁘지만 대한민국의 베트남 침략은 좋다, 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반공(민주) 세계 수호’ 따위를 내세워 베트남 침략을 합리화합니다. 그렇다면 일제에도 명분과 까닭이 뚜렷하게 있습니다. ‘황색인종 대동단결’입니다. ‘미영축귀(米英蓄鬼-짐승이나 악귀 같은 미국 영국)’에 맞서려면 ‘대동아 공영권’을 구축해야 했었습니다.
 
 난민 서경식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보내는 물음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게다가, 우리나라 ‘국민’은 재일동포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는 일본 정부는 ‘욕하면서도’ 우즈베키스탄이나 베트남 몽골 같은 데서 온 이들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는 우리나라의 처사에 대해서는 대부분 ‘당연하게’ 여긴다지요.

우리가 지난날 겪은 ‘고통’을 ‘기억’하고 있다면 지금 다른 이들이 겪는 ‘고통’과 ‘연대’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고 서경식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경식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깊으면 깊을수록 아프고 불편한 까닭이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서경식은 이렇게 짚습니다. “우리가 일본에 요구하는 것이 바로 그거(사과와 보상)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본에 요구하는 것하고 베트남전쟁하고 이중 기준이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87쪽)

그러면서 현실을 핑계 삼아 이중기준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려는 경향에 대해서는 이렇게 일러줍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데 못 하는 것하고, 어차피 못 할 일이니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하고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릅니다.”(87쪽)

현실을 기준으로 삼아 옳고 그름이나 당위성 여부를 갈라서는 안 된다는 얘기로 읽힙니다. 그러나 우리 앞 현실은 “정의를 정의로서 얘기할 수 없는, 정의를 정의로 얘기하면 웃음거리가 되는 사회”(249쪽)이지요. 암담합니다.

“여기(한국)도 일장기는 안 되지만 영국 사람들이 유니온잭(영국 국기)을 가지고 오면 오히려 호감 가질 사람들이 많이 있죠. 하지만 그 때(일제 강점기) 배후에는 제국주의자들끼리 거래가 있었다는 겁니다.”(86쪽) 전체를 전체로 봐야 합당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얘기라고 저는 받아들입니다만.

“프랑스에 갔을 때 베트남 요릿집을 중국 요릿집으로 잘못 알고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호치민(胡志明)을 닮은 주인이 웃으며 ‘일본 사람입니까?’ 했어요. 저는 ‘일본 사람이냐?’ 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절대 아니다. 나는 일본 사람이 아니다.’고 해 왔는데, 그 때만큼은 ‘일본 사람이 아니고 한국 사람이다.’ 하기가 너무 어색하고 불편했어요.”(59쪽)

“‘학살 행위에 직접 책임이 있는 사람이 대통령으로 있는(있었던) 국가, 그 국가에서 준 여권을 가지고 다니는 내가 이 국가가 한 행위하고 나는 상관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처벌받아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정부를 바꿀, 그런 정부를 비판하고 싸워서 그런 정책을 바꿔야 하는 책임이 있다. 제대로 그것을 반대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60쪽)

서경식의 이 책은 ‘국가, 국민, 고향, 죽음, 희망, 예술에 대한 서경식의 이야기’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희망’에 대한 사고는 아주 독특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이의 세계관과 바로 이어져 있는 듯합니다. 비관주의.

“희망이 ‘hope’일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희망의 희(希)자가 희박하다는 ‘희’자이지요. ‘little’, 거의 없다는 겁니다. 절망(切望)은 전혀 없다는 것이죠. 끊어버렸다는 것이 절망이고, 소망이 거의 없다는 것이 희망이에요. ‘우리의 언어에는 희망이 거의 없는 것하고 절대 없는 것, 이 두 가지밖에 없다.’”(163쪽)

그이는 끊임없이 묻습니다. 해답은 내놓지 않습니다. 아마 해답은 그이도 갖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2007년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가 주관한 연속 강좌 강의록을 가다듬어 펴낸 책이 이것입니다.

그이의 바람은 책머리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조국에 머무는 동안 여러분들에게 던진 물음은 아마도 아직 ‘소화 불량’인 채로 남겨져 있을 것이다. 그 소화가 덜 된 물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안고 갔으면, 하고 바란다. 한국에서 만난 우리들이 주어진 답을 공유하는 ‘우리’가 아니라, 어려운 물음을 공유하는 ‘우리’로서 되풀이 만남을 이어가기 위하여.”

이 책은 현실을 진지하게 여기면서 세상을 사는 이들뿐 아니라, 지식 생각 감수성 상상력 따위를 ‘겉멋’으로 여기는 이들에게도 보탬이 될 것 같습니다. 사서 그냥 얹어만 놓아도 책꽂이가 훤해질 테니까, 말입니다. 하하.

김훤주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서경식 (철수와영희, 2009년)
상세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