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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세상

‘워낭소리’에 들어 있는 여성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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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아들이랑 딸이랑 함께 ‘워낭 소리’를 봤습니다. 보고 나서 저는 아이들한테 싫은 소리를 좀 들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여태까지는 아버지가 가자 해서 가 본 영화가 대체로 좋았는데) 아빠한테 신뢰가 무너졌어요.”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재미있게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보는 내내 불편했고, 고3 졸업한 아들과 중3 올라가는 딸은 이런 게 무슨 영화야, 어리둥절해 했습니다.

보고 난 제 소감은 이렇습니다. “‘워낭소리’는 세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겠군.”

1. 40대와 50대의 고향 떠난 향수를 노골적으로 자극하고 있다

고향을 떠난 40대와 50대(어쩌면 30대 후반-그러니까 74년생까지도)의 대책 없는 향수를 겨냥한 영화다.(농담삼아 말하자면, 딱 이명박 수준이다.)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만 주로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남성-남편과 여성-아내의 관계에 대해서는 고개가 돌려진 영화다.
영화가 보여주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대체로 인간 중심적이었고 그런 성향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워낭소리’가 예상을 깨고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까닭이 저는 바로 ①과 ②에 있다고 봅니다. 짤랑거리는 워낭소리는, 저 같은 족속에게는 할아버지 소죽 끓이는 이른 새벽 그 그윽한 어둠이랑 이어져 있습니다.

이 짤랑 소리에, 어린 시절 사랑방과 거기 달려 있던 메주와 소죽 후끈한 열기와 고소한 냄새와 음매 소울음과 “야야 일어나거라.” 말씀과 뜨끈한 아랫목과 스멀스멀 기어드는 짚단 타는 연기 따위가 한꺼번에 일깨워집니다.

“이라 이라”, “자라 자라”, “어띠 어띠”, “워 워” 소 모는 소리가 이어지고요 “이 놈 소!” 틈만 나면 소한테로 가셔서 등 쓰다듬으시고 한밤중에도 날씨 추우면 일어나 소 등에다 담요 따위 덮으시던 할아버지 그런 손길 기억납니다.

저는 ‘워낭 소리’가 여기에서 더 나가 있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딱 여기까지였습니다. 물론 마지막 소를 묻는 장면에서 그리고 그 앞 어떤 장면에서도 눈물을 저는 흘렸습니다만. 크게 보면 그랬습니다.

소 주인인 최원균 어른은 평생을 농사지으신 분입니다. 일부러 무엇을 의식하고 인식하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영상에 담긴 것은 어떤 연출이 아니라 그 분의 일상임이 틀림없습니다.

2. 그 어른의 소 사랑은 시종 인간 중심이었다

그 분의 일상에는, 그 분의 소에 대한 사랑에는, 소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성(聖)과 속(俗)이 섞여 있습니다. 속은, 어른이 소를 가축으로서 아끼는 것이고요, 성은 어른이 소의 처지와 관점에서 아끼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울었습니다. 지금 이 글 쓰면서도 울었습니다.


성스러운 장면은 이렇습니다. 땔감을 해 가지고 오는데, 소의 달구지에도 조금 싣고 다리가 불편한 자기가 지게로도 좀 지고 오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소가 죽기 앞서 코뚜레를 빼 주고 목줄을 풀어주는 장면입니다. 감동스런 눈물이 올라옵니다.

속스러운 장면은 나머지 대부분입니다. 고급도 있고 성과 속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질을 꼽아보라면, 비가 오는 가운데, 읍내 병원까지 노부부가 이 소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가는 장면입니다.

아침에 소 팔러 가는 장면. 아름답나요?


이미 소가 기력을 잃고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한 번 더 읍내 장터로 가는데(소를 500만원에 팔려고) 이 때도 소의 주인 어른은 달구지를 끌게 하고 타고 갑니다.(흥정이 안돼 타고 또 돌아옵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거의 학대 수준입니다. 소의 주인 어른께서는 이를 사랑의 소치라고 여기고 하셨을 수는 있겠지만, 저는 좀 아닙니다. 제가 이리 말하면 어떤 이는 이렇게 반박하실 것입니다. “다큐멘터리인데 어쩌라고?”

있는 그대로 찍었다는 말씀이겠지요. 좋습니다. 나아가 이 ‘워낭 소리’에도 분명 기승전결이 있고 높낮이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기승전결과 높낮이를 이루는 부분 가운데 하나가 이런 장면들이니까 말씀입니다.

제 투정은 영화 자체가 아니라 소감에 대해서입니다. 소와 사람의 관계를 두고 말하면, 최원균 어른의 소 사랑이 대단하기는 했지만 크게 보면 인간 중심성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얘기를,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3. ‘워낭소리’는 드러내 놓고 여성을 차별한다

다른 하나는 이삼순이라는, 최원균 어른보다 세 살 아래이고 그 분의 아내이신 어른과 관련돼 있는 얘기입니다. 얘기를 하시는데 들어보니, 열여섯 어린 나이에 80리 길을 가마 타고 시집을 오셨다더구만요.

이러고 앉아서들 지청구를 합니다만.


소와 인간의 관계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바람에 이 어른의 존재는 하찮게 취급되고 말았습니다. ‘워낭소리’에서 이삼순 어른은 대체로 지청구를 늘어놓는 존재입니다. 이 지청구는 영화 내레이션(narration) 구실을 합니다.

아울러 이삼순 어른의 지청구는, 지청구를 하는 이삼순 어른을 우스꽝스럽게 만듭니다. 객석에서 터지는 웃음은 대부분 이 어른의 말투와 얼굴 표정에서 비롯됐습니다. 여기 나오는 고통(또는 불편)을 귓등으로 듣는 것입니다.

이삼순 어른 지청구에는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습니다. 속속들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소한테 영감의 관심과 애정이 넘어가 있는 데 대한 서운함, 늙어서까지 허리도 못 펴고 일해야 하는 고달픔, 여태 살면서 당신 주장대로 하지 못한 박탈감 따위입니다.

그리고 최원균 어른이 인간성 잘못이라거나 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냥 그러니까 여러 측면에서 여성차별을 보여줬습니다. 가장 압권은 이렇습니다. 늙은 소가 힘들게 달구지를 끕니다. 달구지에는 노부부가 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최원균 어른이 그럽니다. “내리!” ‘내려’의 경상도 ‘표준말’이지요. 이삼순 어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어이구…….” 이러면서 내립니다. 진짜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이런 순간이 얼마나 쓰라리고 따가운지를 말입니다.

남자 어른이 여자 어른에게 내리라고 다그치는 자리.

저는 스물네 해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경험을 전해 들은 바가 있기 때문에 조금은 짐작을 합니다. 이밖에도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당대에는 모두가(적어도 절대 다수가) 이런 식으로 살았겠습니다만.

최원균 어른은 기계로 농사를 짓자는 이삼순 어른의 요구를 깨끗하게 무시합니다. 최원균 어른은 농약을 치자는 이삼순 어른의 요구도 말끔하게 무시합니다. 반응이나 대꾸조차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최원균 어른이 소한테 기울이는 애정이나 관심은 대단합니다. 소꼴 뜯는 여러 장면에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최원균 어른이 이리 관심과 애정을 소한테 들일 수 있게 하는 이삼순 어른의 ‘돌봄 노동’은 없었을까요?

저는 우리 집 경험에 비춰볼 때, 이삼순 어른의 돌봄 노동이 없었다면 최원균 어른은 존재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에 대해서는 카메라가 한 번도 제대로 비춰주지 않았습니다.

4. 제작진의 철학과 관점에 문제가 있다?

‘워낭소리’ 끝날 무렵에 자막이 나옵니다. 이 자막이 모든 사태를 짐작하게 해 줬습니다. 영화를 보면서는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의 한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자막을 보고 나서는 영화를 만든 이들의 철학이나 관점이랄까에 문제와 한계가 있다고 믿게 됐습니다.

모두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거의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아마 중요한 부분은 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년의 우리를 위해 헌신하신 이 땅의 모든 소와 아버지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어머니는 어디 갔나요? 그리고, 헌신하신 사람과 짐승에게 이리 영화나마 바쳤으니, 이제 그 희생 위에 걸터앉은 우리는 그냥 속 편하게 지내면 그만인가요? 어쨌거나, 여성운동 한다는 인간들은 이런 때 다 어디 가고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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