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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세상

벌써 새싹 돋은 화왕산 참사 불탄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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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왕산 억새밭은 사람들 놀이터?

사람들에게 화왕산은 관광지고 놀이터였습니다. 사람들은 좀 더 즐겁게 놀아보려고 1995년부터 화왕산 꼭대기에다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지요. 반대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지만,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목청에 묻혀 버렸습니다.

2월 9일 정월 대보름 화왕산 억새 태우기로 말미암은, 5명이 숨지고 60명 남짓이 다친 참사의 원인은 바로 자연 생태계를 놀이터로만 여긴 데에 있지는 않을까요? 만약(이제 와서 이 말이 무슨 소용 있을까만), 숱한 생명체들이 살아가고 또 자연물들이 어울리는 보금자리로 여겼다면 여기다 불을 지르겠다는 생각은 아예 못했을 테니까요.

지난 15일 일요일 아침, 화왕산 불탄 자리에 올라가 봤습니다. 한 시간 남짓 올라가면서 거기 살았던 생명체와, 생명체는 아니지만 지구 탄생 이래 줄곧 자리를 지켜왔을 바위 같은 자연물들을 생각했습니다.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돌아보기, 그리고 참담, 으로 요약이 될 수 있겠습니다.

화왕산성 동문에 들어서니, 정월대보름 참사가 일어난 지 엿새가 지났는데도 조금은 비릿하면서 바삭바삭한 탄내가 아직도 나고 있었습니다. 5만6000평 넓이 화왕산 억새 평원은 산꼭대기 북서쪽 비탈만 남겨두고 죄다 꺼멓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들판 가득 억새들이 황금빛을 내뿜으며 가끔씩 햇살을 튕겨내는 장면을 연출했겠습니다만.

배바우에서 화왕산 마루를 바라보고 찍은 사진입니다. 왼쪽은 그래도 불타지 않았군요.

조금 느끼한 느낌을 끼치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냄새를 맡으며 불탄 자리를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찔레 같은 떨기나무들은 선 채로 시커멓게 숯이 돼 있었습니다. 살짝 스치기만 했는데도, 옷에는 여기저기 검댕이 묻어났습니다. 갈대나 억새 같은 풀들은 대부분 포기까지 타버리고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 키 높이까지 자라 있던 이런 풀들이 사라지고 나니까, 여태 묻혀 있던 쓰레기들이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만 이왕 이렇게 불타 버렸으니 여기 이 쓰레기라도 제대로 걷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억새밭이 동·식물에게는 무엇일까?

불탄 억새밭에는 주로 까마귀만 ‘까악까악’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먹이가 아마 많기 때문이겠지요. 여느 때라면 아침에 일찍 오르면 꿩도 있고 작은 산새들도 노닐고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박새 같은 작은 새들은 이날, 불타지 않고 남은 가시덤불이나 억새밭에서만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창녕환경운동연합을 창립하고 의장을 맡았던 배종혁 씨에게 17일 물어 봤습니다. 억새밭이 새들에게 과연 무엇인지를. “억새덤불은 보금자리지요. 쉬고 머물고 잠자기도 하는 곳이며 바람이나 눈(雪)을 피하는 곳이기도 하고 새순 씨앗 벌레 따위가 풍성한 먹이터이기도 합니다.”

“개개비 검은닥새 사촌흰뼘오리 등등 억새 덤불에 기대어 겨울을 나는 철새가 열여섯 가지라 해요. 이들에게 억새 태우기는 그야말로 재앙이지요.” 사람들의 억새 태우기는, 이를테면 새들의 안방을 불태우고 이불을 걷어내고 밥상을 걷어차 엎어버리는 일이었던 셈이 됩니다. 배 씨는 이런 주장을 줄기차게 해온 ‘덕분에’ 거의 왕따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만.

짐승의 똥.

토끼 똥.


그런데 덤불이 새들에게만 보금자리 구실을 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돌아다니는 여기저기서 들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똥무더기를 만날 수 있었거든요. 또 서문에서 배바우로 올라가는 언덕배기에서는 토끼 똥이 빽빽하게 널려 있었습니다. 짐승들도 억새밭에 깃들어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식물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화왕산 억새밭을 다녀 온 뒷날 부산대학교 조경학과 최송현 교수에게 전화로 물었습니다. “수풀이나 덤불은 식물 생태에서 ‘종자 은행’ 구실을 하지요. 불 지르기는 ‘씨를 말리는 일’입니다. 덤불에 떨어져 싹을 틔울 가능성이 있는 여러 많은 씨앗들을 없애버리는 것이지요.”


“화전민이 불을 지르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토지 확보와 아울러 (곡식 아닌) 다른 씨앗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이런 개입을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 하고 있는지는 제게 자료 정보가 충분히 없어서 모르겠네요. 자연 발화는 좀 있습니다만.”


식물 생태계의 발권(發券)은행에다가 불을 지른 셈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최 교수는 화왕산 억새 태우기가 ‘치명적’이지는 않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화왕산 억새 태우기가 자연 생태계를 해코지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지요.

3. 억새 태우기가 세시풍속의 재현이고 전설의 실현일까?

앞에 있는 물웅덩이는 용지龍池입니다.


창녕군청 홈페이지에 보면 억새 태우기를 두고 “화왕산이 예부터 불의 뫼라고 하여 이곳에서 불이 나야만 풍년이 깃들고 평안하다는 전설에 따라 1995년부터 개최한 행사”라 하고 있습니다. 또 산림청에 낸 행사 개요에는 ‘세시풍속 재현’이라는 표현이 있답니다.

그러나 이런 전설은 없었습니다. 창녕이 낙동강에 달아 있기 때문에 소벌(우포늪)을 비롯한 습지가 많았고, 또 창녕읍과 붙어 있는 대지(大池)면까지 큰물이 자주 들었기 때문에 이를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비보(裨補)하느라 산 이름을 화왕(火王 또는 火旺)이라 했다는 얘기 정도는 있었지만 말입니다.

아울러, ‘세시풍속’도 화왕산 꼭대기에 불을 놓는 일은 없었습니다. 제가 창녕 출신이라 잘 압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정월 대보름 쥐불놀이나 달집태우기는 있었지만 화왕산에 불지르는 풍속이 있다는 기록은 84년 간행한 <창녕군지>뿐 아니라 창녕을 소개하는 어떤 자료나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창녕군지에 나와 있는 여러 민속놀이. 화왕산 억새태우기는 없습니다.

잘라 말하자면, 화왕산 꼭대기를 불 지르는 행사를 하기 위해 꾸며냈다고밖에 할 수 없겠습니다. 화왕산 억새 태우기는 95년 시작됐습니다. 해마다 열리는 행사로 기획돼 이듬해까지 한 다음 위험하다든지 생태계에 나쁜 영향을 준다든지 하는 이유로 잠정 중단됐다가 2000년 3년마다 하는 행사로 다시 시작됐습니다.


올해로 여섯 번째지요. 사람이 죽는 일은 이번에 처음 일어났지만(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슬픔과 충격을 줬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애매하게 까닭도 모른 채 나무와 풀과 벌레 같은 곤충을 비롯한 짐승들이 타 죽는 일은 여태 여섯 차례나 되풀이돼 온 셈입니다.

4. 불길은 배바우 너머까지 건너갔었다

앞쪽 솥을 담은 마대도 오그라붙었고 멀리 밥이 담긴 스티로폼도 불길에 녹았습니다.


억새밭 불 지르기는 그 자체로도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확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행사 당일 솥이랑 밥이 있었던 자리도 불길이 지나갔더군요. 아마 그것들은 가장 안전한 자리에 놓여 있었겠지만, 불길은 그곳을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또 그 안전한 자리 바로 옆에 경찰들 이른바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사람이 여럿 죽었습니다. 불길에 밀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면서 죽고 다쳤으리라는 제 짐작과 달랐습니다. 아마 불길이 사람 움직임보다 더 빠르게 덤벼들었고, 밀리는 사람들을 헤쳐나가지 못하면서 그리 참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불타다 만 소나무. 배바우 아래 쪽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불길은 억새밭 있는 안쪽에만 머물지도 않았습니다. 배바우 바로 옆에는 마루금을 타고 넘어 아래쪽 산비탈까지 불이 지나간 자취가 남아 있었습니다. 3m남짓한 소나무 여러 그루가, 아랫도리를 꺼멓게 불타 버린 채 서 있었습니다. 그 때 바람이 계속 남쪽으로 불었다면 산불은 도저히 걷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끔찍합니다.


옛날, 제가 어릴 적, 화왕산에 산불이 난 적이 있습니다. 밤에 장터에 있는 집에서도 잘 보였는데 탁구공 만한 불덩어리가 이쪽으로 넘어왔다가 너머 저쪽으로 넘어가기를 뒤풀이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산꼭대기에서 아래로 3분의1 지점까지 시커멓게 바뀌었는데, 그 검은 빛이 완전히 가시기까지는 아무래도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5. 억새밭을 생명들 보금자리로 여기기를

이번 참사로 활기찬 창녕/행복한 군민이 무색해져 버렸습니다.

창녕군수는 이번 일을 당해 “억새 태우기 행사를 중단하겠습니다.”라 선언했습니다. 반가운 일이기는 하지만,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 생태에 대한 인식이 완전 바뀌었다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사람이 여럿 죽고 크게 다친 충격이 가시고 상처와 아픔이 아물면, ‘경제 활성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언제든 불 좀 질러 보자고 다시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울러 창녕환경운동연합 전 의장 배 씨는 “화왕산 정상 일대는 습지”라고 했습니다. 습지는 생명의 자궁이라 합니다. 그래서 주요 보호 대상으로 삼지요. “산성 한가운데 세 군데 용지(용늪)는 이미 잘 알려져 있고, 산성 동문 바깥에서도 습지가 발견”됐다는 얘기입니다. 정밀한 식생 조사와 평가 작업의 필요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끼는 여기가 습지임을 방증한답니다. 화왕산 마루 올라가는 길에 찍었습니다.


적어도 이번 화왕산 참사에 대해서만큼은,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느 누구도 없을 것입니다. 불을 지른 주체도 그렇고 불을 지르는 데 찬성한 사람도 그렇고 반대한 사람도 그렇고 별 생각이 없었던 사람도 그렇습니다. 구경하러 온 이들은 더 말 할 것 없이 마찬가지지요.


심하게 말하자면, 자기를 중심에 놓고, 생각에 따라 이런저런 얘기만 몇 마디 거들었을 뿐이 아닙니까? 우리 인간들이 말이야 어떻게 했든, 실제로는 화왕산을 놀이터 또는 관광지로 삼았지 갖은 생명체들이 어울려 사는 공동체로는 전혀 대접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저처럼 불 지르기를 께름칙하게 여겼거나 환경단체들처럼 나름대로 반대를 했다 해도, '처벌받아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자치단체를 바꿀, 그런 자치단체를 비판하고 싸워서 그런 정책을 바꿔야 하는 책임이 있다, 제대로 그것을 반대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서경식의 책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에서 표현을 빌렸습니다.)

6. 놀라운 복원력이 또 그래도 된다는 근거가 되지 않기를

두 시간 남짓 둘러보고 동문으로 나오는 길목에서 바닥 그루터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조금 색다른 느낌을 주기에 가까이 들여다봤더니, 불탄 대궁에서 새로 순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고, 남향 양지바른 언덕에 뿌리내린 것들이 먼저 그랬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못한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생명력이 저는 마음 한편으로 반가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썩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왜냐고요? “그까이꺼, 불 한 번 크게 지른다고 무슨 대수겠어? 곧바로 새로 싹이 나고 순이 돋잖아!” 하는 주장의 근거가 될까 싶어서입니다.

꺼멓게 타버린 자리가 언제쯤이면 푸르게 될까? 앞서 말씀드린 최 교수에게 물었더니 이리 답했습니다.

“산불 종류는 크게 관상화재와 지표화재가 있어요. 관상화재는 96년 강원도 고성 산불처럼 큰키나무까지 모두 깡그리 불타는 것이죠. 지표화재는 떨기나무나 풀이 타고 땅 밑에 있는 뿌리나 씨앗은 타지 않은 경우입니다.


화왕산 억새 태우기는 정도가 덜한 지표화재에 해당합니다. 불탄 화왕산에서는 먼저 억새가 씨앗이나 뿌리에서 자라날 것이고 이어 찔레 같은 떨기나무도 살아나겠지요. 그러나 생장 속도가 빠른 억새에 떨기나무들이 밀리기는 할 것입니다.”

동문 밖 허준 촬영 세트 앞에 있는 연못과 버들강아지.


이날 산행은 아무래도 도저히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고통스러운, 그런 산길이었습니다. 또 혼자 가는 길이라서 외롭기도 했고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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