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처가 쪽 결혼식이 있어서 전주에 다녀왔습니다. 여러 어르신 만나고 새 신랑 축하도 했습니다. 아침 7시 나서서 시외버스를 타고 오갔는데 모르는 길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피곤하더군요.
그래도 집에 있는 아이들 생각에 저녁 6시 마산 시외버스 터미널에 닿자마자 올해 중3 올라가는 딸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오늘 저녁 돼지고기 어때?” 이렇게 말입니다. 집에서 돼지 삼겹살 구워먹을까? 묻는 얘기입니다.
우리 식구는 집에서 돼지고기 구워먹기를 오래 전부터 즐겼습니다. 다달이 두 차례 정도? 제가 주로 굽습니다. 아내랑 아이들은 두께가 3cm쯤 되는 자연석으로 구워 놓은 고기를 먹습니다. 물론 지금 아내는, 몸이 아파 꼼짝 못하기 때문에 먹지를 못합니다만.
우리 식구 넷은 그러면서 많은 얘기를 주고받습니다. 아이들도 많이 얘기하지요. 만약 우리 집이 다른 집보다 부부 부모자식 형제 사이 조금이라도 의사소통이 잘 된다면 모두 돼지고기 덕분입니다. 또 서로 이해하는 바가 조금이라도 더 많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7년 전 가을에 찍은 아들(오른쪽)과 딸 모습. 나이 차이는 세 살이고 학년 차이는 4학년입니다.
2.
좀 있다 대답이 왔습니다. “우왕~ 내 싸랑 돼지고기 ㅋㅋ” 그래서 저는 이번에 고3 졸업한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아들, 동생이 돼지고기 먹자는데 어때?” 현지한테 물어봤더니 바깥에 나갔다 해서 이리 했지요.
조금 있다 아들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집에서요?” 그렇단다, ○○(아들 여자친구)랑 같이 있니? 이렇게 답을 했겠지요. 다시 문자가 왔습니다. “좀 있다가 말씀드릴게요.” 그러더니 “미안해요. 점심 때라도 말씀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다음엔 꼭 같이 먹어요.” 이럽니다.
옛날 같으면 당장 전화를 걸어 화를 버럭 내면서, 아 얼마나 자주 같이 먹는다고 이래, 옛날에는 안 이랬잖아, 바로 들어와 어쩌고 이랬을 텐데, 이제는 압니다. 그래 들어와 봤자 판은 식을 대로 식어 버리고 관계만 더 어색해진다는 것을요.
아니, 그보다는, 아이들이 옛날과 다르도록 많이 컸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지금 아들은, 집안 식구보다 여자친구하고 같이 있고 싶은 나이가 됐음을 제가 아는 것입니다. 집에 와서 딸이랑 삼겹살을 사러 나갔습니다.
웃으며 얘기했습니다. “딸, 오빠가 오늘 같이 안 먹는다니까 아빠가 지금 기분이 좀 이상하다.” 딸은 별 말이 없었습니다. 딸도 처음에는 “그러면 먹지 말아요.” 했다가, 피아노를 조금 치고 나더니 “아빠, 고기 사러 가요.” 이랬습니다.
4.
저는 조금 기분이 ‘꿀꿀해서’ 처음 계획에 없던 소주를 한 병 챙겼습니다. 딸은 사이다를 한 병 집었고요. 그리고는 삼겹살 1만원 어치와 쌈을 사서 집에 와 구워 먹었습니다. 첫째가 없었어도 그런 이상한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둘 다 배가 많이 고팠거든요.
한참 먹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딸이나 저나 처음에는 첫째가 먹지 않는다니 김이 샜습니다. 그래서 딸은 먹지 말자 했는데, 그런 다음 피아노를 조금 치더니 기분이 나아져서 고기 사러 가자고 자세를 바꿨습니다. 반면에 저는 좀 섭섭하다고나 하는 감정을 그대로 안고 소주를 샀습니다.
이를테면, 딸은 악기로 풀고 저는 술로 풉니다. 그래서 말했지요. “아빠는 니네가 그림도 곧잘 그리고 피아노도 자주 치고 해서 참 고맙다.” 딸이 “왜요?” 물었습니다. “악기를 다룰 줄 알거나 그림을 잘 그리면, 울적한 기분이든 즐거운 기분이든 손쉽게 표현하고 풀 수 있거든. 안 그러냐?”
딸이 “그림은 오빠가 잘 그리지 저는 못 그려요.” 했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 하고 나서, “아빠는 그렇지 못해서 즐겁거나 괴롭거나 하면 술을 먼저 마시고 그래서 힘들어.” 했습니다. 그랬더니 딸이 다시 “그렇지만 아빠는 글을 쓰잖아요?” 물었습니다.
제 대답입니다. “맞다. 그런데 딸아, 아마 알지 싶은데, 악기를 다루거나 그림을 그릴 때는 그다지 힘들거나 어렵지 않고 또 하다 보면 기분까지 절로 좋아지고 하잖아? 하지만 글쓰기를 할 때는 오히려 괴로울 때가 많거든? 쓰고 나서는 때로 즐겁기도 하지만.”
딸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딸도 피아노 치기나 그림 그리기보다 글쓰기가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아나 봅니다. 아니 어쩌면 학교 교육 때문에 더욱 그렇게 만들어졌는지도 모릅니다만. 실제 아이들이 고맙기도 했지만, 딸이 제 평소 생각을 알아 주니 저는 기분이 좀 좋아졌습니다.
둘째인 딸은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나이가 됐고, 첫째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갈 나이가 됐습지요. 물론 그러나, 삼겹살 덕분인지는 몰라도, 아버지하고 얘기를 즐겨 하고 또 듣기도 하는 점만큼은, 아들딸 또는 첫째둘째 구분 없이 즐겁습니다.
5.
이리 글을 쓰고 있는데, 첫째 녀석이 들어왔습니다. 어제 못한 해명을 하려 했습니다. “어제는 진짜 일이 있었어요. ○○이랑은 그 전에 있었고요. 저녁에요, 이번에 같이 졸업한 학교 애들이랑 남은 문제가 있었어요. 오해를 풀 일이 있어서요. 그래 늦었어요.”
“오늘은요, ○○하고 같이 저녁 먹고 집에까지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어요. 그러고는 거기서 우리 집까지 계속 뛰어 왔어요.” 그러고 보니 아이 얼굴이 전에 없이 붉어져 있었습니다. 또 덥다면서 찬 바닥에 앉았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거짓이 없음을 믿습니다.
건널 수 없는 그런 거리도 느끼지 않습니다. 저는, “그래 알았어, 이 친구야.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된단다.”라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러고는 아들에게서 친구 사이 여러 얘기도, 힙합에 대한 여러 얘기도 즐겁게(때로는 진지하게) 주고받았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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