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학살 유족 "지리산을 동해에 던지고 싶었다"

기록하는 사람 2009. 1. 18.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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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빨치산에 협조했다는 명목으로 국군과 경찰에 의해 무참히 학살됐던 경남 함양군 민간인희생자 86명에 대한 명예회복이 60년만에 이뤄지게 됐다.

알다시피 함양은 1951년 2월 7일에도 유림면과 휴천면에서 인근 산청군 금서면 주민을 포함한 민간인 705명이 무참히 학살된 지역이다. 한반도의 남쪽 내륙지방인 함양에서 왜 이렇게 많은 민간인학살사건이 일어났을까?

함양은 1953년 휴전 이후에도 가장 오랜 전쟁을 치른 곳이었다. 빨치산 토벌이 거의 마무리되는 1954년까지도 함양군은 전쟁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함양군민에게 한국전쟁은 가히 '7년 전쟁'이라 할 만 하다. 하지만
함양 사람들 중에는 '15년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함양읍 당그래산 학살현장.

마천애향회가 1994년 펴낸 <마천향토지>는 "다른 지역에서는 한국전쟁이 3년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마천을 포함한 지리산 일대의 산골주민들에게는 여순사건부터 1963년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가 붙잡힐 때까지 15년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군인에 의한 집단학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순반란사건 이후 반란군이 토벌군에 쫓겨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로 입산해 빨치산 투쟁을 벌이면서부터 벌어졌다.

이 시기에는 경찰과 우익단체 간부들이 빨치산에 의해 학살되는 사건도 끊임없이 발생했다.

여순반란군으로 구성된 빨치산에게 민간인이 희생된 첫 사례는 1948년 12월 19일 마천면소재지인 땅벌(당흥)마을에서 전매국(연초조합) 직원 6명이 학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경찰과 토벌군(3연대) 자신들이 빨치산에게 당한 것을 보복이라도 하듯, 수없는 민간인들을 빨치산과 내통했거나 식량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집단학살하기 시작했다.

또한 빨치산의 보급투쟁 근거지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마을을 불태워버린 경우도 허다했다. 마천면과 휴천면에서 불탄 가옥만도 251호였다고 <마천향토지>는 기록하고 있다.

군경은 또한 수동면 도북마을과 내산마을(치라골)에서도 각각 32명과 17명을 학살했으며, 이들 마을 주민들 역시 강제이주당했다. 백전면 백운리 신촌마을과 운산리 중기마을에서도 각각 9명과 12명이 경찰에 붙들려가 경찰과 군인에 의해 집단학살당했다.


이처럼 여순사건 반란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군경의 학살은 마천·수동·백전·휴천·서하·지곡면 등 함양군 전역에 걸쳐 이뤄졌다.

인근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에서 발굴된 피학살유골.


이에 대해 <마천향토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순폭동사건과 6·25전쟁 중에 빨치산으로부터 죽음을 당한 주민들의 숫자보다 아군에게 죽음을 당한 주민들의 숫자가 많았다"면서 마천에서도 여순사건 후 10여 명이 빨갱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는데, "당시는 이승만 정권에 찬동하지 않는 이들도 빨갱이로 매도했고 또한 확증도 없이 좌익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씌워 처형시킨 예도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함양사람들은 이토록 오랫동안 많은 주민이 희생된 데 대해 '지리산과 덕유산이 있는 지리적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심지어 <함양군지>는 "오죽하면 '차라리 원자력의 힘으로 지리산과 덕유산을 통째로 들어내 동해에 빠뜨려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말까지 있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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