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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2세 노인의 주름진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60년에 걸친 원한을 마침내 풀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결정이 났다는 전화를 받고, 전화통을 붙든 채 울었어요. 나뿐만 아니라 온 식구가 함께 울었지요."
함양군 수동면 도북마을 차용현 씨는 열 두 살 나던 해인 1949년 9월 20일 아버지와 당숙을 한날 한시에 잃었다.
큰아버지도 함께 끌려 갔으나 군인에게 돈을 써서 겨우 살렸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대위 계급장을 단 군인에게 돈을 주면서 아버지와 큰아버지, 그리고 당숙을 함께 풀어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날 큰아버지만 풀려나왔다. 돈을 받은 대위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한 사람만 먼저 풀어줬다"고 했다.
돈이 모자라서 그런가 싶어 다시 집으로 돌아와 돈을 마련한 후 아버지와 당숙이 붙들려 있는 함양읍으로 뛰어갔는데, 아뿔사 이미 도북마을 사람들 32명을 막 트럭에 싣고 떠나버린 뒤였다.
군인들은 함양읍 이은리 당그래산 골짜기에서 모두 총살한 후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시신을 태웠다. 열 두 살 먹은 아들은 멀리서 골짜기에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를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은 경찰의 서슬이 무서워 시신이나마 찾으러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게다가 마을에는 총을 든 경찰관과 죽창을 든 우익청년단원들이 몰려 들어와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냈다.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민란이라도 일으킬까봐 소개(疏開)를 시킨 것이다. 주민들은 대대로 살아온 마을에서 쫓겨나 먼 하교마을에서 남의집 살이를 해야 했다.
"그 때 3개월인가 남의 집 마당에서 살았어요. 남의 소 마구(마굿간)에도 살고, 우리도 남의 마당에 움막을 지어 살고 그랬거든. 소마구 앞에서 밥도 해먹고…."
한 달쯤 뒤 남편을 잃은 부인네들과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이 경찰의 눈을 피해 학살 현장에 가봤다.
"그 자리에 가서 보니 구덩이를 깊이 파지도 않고 다리 같은 드러나 보이도록 덮어놨데요. 조금 괭이로 긁으니까 시체가, 다리가 나오니까 부패되어 냄새도 나고…."
하지만 그 때도 시신을 수습하지는 못했다. 이내 경찰이 들이닥쳐 몽둥이로 두들겨 패며 유족들을 쫓아냈기 때문이다.
몇 년 후 유족들은 밤나무를 다듬어 이름을 새긴 후 혼백을 불러 묘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엔 시신을 수습한다든지,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은 없었나요?
△그 이후론 계속 죄인 자손이라는 죄인 같이 돼가지고 아무 맥을 못썼어요.
-피해자가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은 거네요.
△그래가지고 노태우 정권 시절에야 유골을 수습했지요. 1991년 12월에 발굴을 했고, 92년 1월 18일 합동묘를 써서 비석을 세웠어요.
-그 땐 경찰의 방해가 없었나요?
△그 때 유골을 찾을 때만 해도 민방위대가 산에 쫙 깔렸었지. 우릴 살핀다고. 그리고 내가 어디에 가면 맨날 내 뒤에, 그 때 강 형사다 뭐다 따라다니면서, 다방에 가면 다방에 오고, 집에 가면 집에 따라오고 계속 살폈지.
-강 형사? 함양경찰서에 있던 분인가요?
△예, 무슨 계인줄은 모르겠고, 형사인줄만 알지. 내가 그랬지. "이러지 마이소. 광주사태 이런 것처럼 난리 칠 것도 아니고, 우리는 우리 부모 유골 찾아 모시려고 하는데, 그러지 말라"고…. 그 뒤 서울도 올라가고 진실화해위 인권 뭐 생기고 나서 총회하러 올라가고 하면 항상 경찰서에서 날 살피는기라. '어데 갔노, 집에 있나, 면을 통해 알아봐라'는 둥.
-혹시 그 때 유해를 수습하기 전까지 죄인처럼 사셨다고 했는데, 실제 그 때문에 외국에 나간다든지 자식들이 취직을 한다든지 할 때 불이익을 겪은 사례들이 있나요?
△있지. 여기 임 교장 아들이라고 정섭인가? 거기는 경북 대구쪽에서 경찰 하고 있었는데, 청와대로 올라갈라고 하는데 신원조회가 딱 걸렸는기라.
-그 때가 언제였습니까?
△그 때가 김영삼 정권 때였을 거라.
-그 때까지 신원조회가 나오더란 말이죠?
△그게 다 연좌제 폐지됐다 해도 그게 나오더라고. 그리고 우리 큰 애가 군에 갔는데, 삼팔선 철조망 있는 철책선 거기서 못넘어가고, 혼자만 떨어져서 근무한 사례가 있었고….
-전시의 군인이라도 제네바 협정에 의해 보호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무기도 없고 저항수단도 없는 민간인을 아군이 이렇게 죽였다는데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죄인을 만들었어요. 무조건 끌고 가서 (빨치산에게) 쌀 줬지 하면서 목괭이 자루로 두들겨 패는 기라. 안했다면 고춧물을 들이붓고, 그래도 안그랬다고 하면 그 땐 전기고문을 하고, 그러면 줬다 줬다 하니 전부 부역자를 만들어버린 거지.
-49년이면 그 땐 전시도 아니었잖아요.
△전시도 아니었지. 그 때 여순사건으로 토벌군들만 안왔어도 다 이 사람들은 살아나올 사람들이라. 그 뒤에 또 끌려가고 한 사람은 또 괜찮았거든. 그 때 싹 군인들에게 넘겨주는 바람에 그리된 거지.
-마지막으로 국가에 바라고 싶은 게 있나요?
△이제 명예회복이라도 되었느니 60년 원한을 풀었어. 지난번 산청 사건(시천·삼장면 학살사건)은 진상규명이 됐는데, 우리 사건은 빠졌을 때 '아, 이젠 안되는구나. 내 죽기 전엔 명예회복이 어렵겠구나, 결국 아버지 오명을 벗지도 못하고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런데 엊그제 결정 통보 받고 목이 메어 말도 못하고 눈물만 나오더라구. 이게 꿈이냐 생시냐 싶었지.
그리고 참! 유족들 중에 그래도 밥 먹고 살만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 때 아예 가족 전체가 멸족돼버린 집도 두 집이 있고, 서너 집은 유복자로 태어나 이집 저집 다니면서 얻어먹고 사느라 지금도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 있어요. 과부가 된 어머니는 (재가를 해) 가버렸고, 그러니 병아리 같은 것들이 이집 저집 얹혀 살다보니 못먹어 가지고 무슨 병에 걸려 죽은 사람들도 몇이 있어요. 그런 자녀들이 출세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이번에 나라에서 잘못한 걸 인정하고 사과하겠다면, 그런 정말 어려운 유족들이나마 일자리를 주든지, 생계지원이라도 해주면 그게 정부로서 할 도리가 아니겠느냐, 그런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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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원회에서 결정이 났다는 전화를 받고, 전화통을 붙든 채 울었어요. 나뿐만 아니라 온 식구가 함께 울었지요."
함양군 수동면 도북마을 차용현 씨는 열 두 살 나던 해인 1949년 9월 20일 아버지와 당숙을 한날 한시에 잃었다.
큰아버지도 함께 끌려 갔으나 군인에게 돈을 써서 겨우 살렸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대위 계급장을 단 군인에게 돈을 주면서 아버지와 큰아버지, 그리고 당숙을 함께 풀어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날 큰아버지만 풀려나왔다. 돈을 받은 대위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한 사람만 먼저 풀어줬다"고 했다.
차용현(72)씨.
군인들은 함양읍 이은리 당그래산 골짜기에서 모두 총살한 후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시신을 태웠다. 열 두 살 먹은 아들은 멀리서 골짜기에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를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은 경찰의 서슬이 무서워 시신이나마 찾으러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게다가 마을에는 총을 든 경찰관과 죽창을 든 우익청년단원들이 몰려 들어와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냈다.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민란이라도 일으킬까봐 소개(疏開)를 시킨 것이다. 주민들은 대대로 살아온 마을에서 쫓겨나 먼 하교마을에서 남의집 살이를 해야 했다.
"그 때 3개월인가 남의 집 마당에서 살았어요. 남의 소 마구(마굿간)에도 살고, 우리도 남의 마당에 움막을 지어 살고 그랬거든. 소마구 앞에서 밥도 해먹고…."
한 달쯤 뒤 남편을 잃은 부인네들과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이 경찰의 눈을 피해 학살 현장에 가봤다.
"그 자리에 가서 보니 구덩이를 깊이 파지도 않고 다리 같은 드러나 보이도록 덮어놨데요. 조금 괭이로 긁으니까 시체가, 다리가 나오니까 부패되어 냄새도 나고…."
하지만 그 때도 시신을 수습하지는 못했다. 이내 경찰이 들이닥쳐 몽둥이로 두들겨 패며 유족들을 쫓아냈기 때문이다.
몇 년 후 유족들은 밤나무를 다듬어 이름을 새긴 후 혼백을 불러 묘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엔 시신을 수습한다든지,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은 없었나요?
△그 이후론 계속 죄인 자손이라는 죄인 같이 돼가지고 아무 맥을 못썼어요.
-피해자가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은 거네요.
△그래가지고 노태우 정권 시절에야 유골을 수습했지요. 1991년 12월에 발굴을 했고, 92년 1월 18일 합동묘를 써서 비석을 세웠어요.
자료사진 :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학살현장에서 나온 유골.
-그 땐 경찰의 방해가 없었나요?
△그 때 유골을 찾을 때만 해도 민방위대가 산에 쫙 깔렸었지. 우릴 살핀다고. 그리고 내가 어디에 가면 맨날 내 뒤에, 그 때 강 형사다 뭐다 따라다니면서, 다방에 가면 다방에 오고, 집에 가면 집에 따라오고 계속 살폈지.
-강 형사? 함양경찰서에 있던 분인가요?
△예, 무슨 계인줄은 모르겠고, 형사인줄만 알지. 내가 그랬지. "이러지 마이소. 광주사태 이런 것처럼 난리 칠 것도 아니고, 우리는 우리 부모 유골 찾아 모시려고 하는데, 그러지 말라"고…. 그 뒤 서울도 올라가고 진실화해위 인권 뭐 생기고 나서 총회하러 올라가고 하면 항상 경찰서에서 날 살피는기라. '어데 갔노, 집에 있나, 면을 통해 알아봐라'는 둥.
-혹시 그 때 유해를 수습하기 전까지 죄인처럼 사셨다고 했는데, 실제 그 때문에 외국에 나간다든지 자식들이 취직을 한다든지 할 때 불이익을 겪은 사례들이 있나요?
△있지. 여기 임 교장 아들이라고 정섭인가? 거기는 경북 대구쪽에서 경찰 하고 있었는데, 청와대로 올라갈라고 하는데 신원조회가 딱 걸렸는기라.
-그 때가 언제였습니까?
△그 때가 김영삼 정권 때였을 거라.
-그 때까지 신원조회가 나오더란 말이죠?
△그게 다 연좌제 폐지됐다 해도 그게 나오더라고. 그리고 우리 큰 애가 군에 갔는데, 삼팔선 철조망 있는 철책선 거기서 못넘어가고, 혼자만 떨어져서 근무한 사례가 있었고….
당그래산의 도북마을과 내산마을 희생자 명단.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죄인을 만들었어요. 무조건 끌고 가서 (빨치산에게) 쌀 줬지 하면서 목괭이 자루로 두들겨 패는 기라. 안했다면 고춧물을 들이붓고, 그래도 안그랬다고 하면 그 땐 전기고문을 하고, 그러면 줬다 줬다 하니 전부 부역자를 만들어버린 거지.
-49년이면 그 땐 전시도 아니었잖아요.
△전시도 아니었지. 그 때 여순사건으로 토벌군들만 안왔어도 다 이 사람들은 살아나올 사람들이라. 그 뒤에 또 끌려가고 한 사람은 또 괜찮았거든. 그 때 싹 군인들에게 넘겨주는 바람에 그리된 거지.
-마지막으로 국가에 바라고 싶은 게 있나요?
△이제 명예회복이라도 되었느니 60년 원한을 풀었어. 지난번 산청 사건(시천·삼장면 학살사건)은 진상규명이 됐는데, 우리 사건은 빠졌을 때 '아, 이젠 안되는구나. 내 죽기 전엔 명예회복이 어렵겠구나, 결국 아버지 오명을 벗지도 못하고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런데 엊그제 결정 통보 받고 목이 메어 말도 못하고 눈물만 나오더라구. 이게 꿈이냐 생시냐 싶었지.
그리고 참! 유족들 중에 그래도 밥 먹고 살만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 때 아예 가족 전체가 멸족돼버린 집도 두 집이 있고, 서너 집은 유복자로 태어나 이집 저집 다니면서 얻어먹고 사느라 지금도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 있어요. 과부가 된 어머니는 (재가를 해) 가버렸고, 그러니 병아리 같은 것들이 이집 저집 얹혀 살다보니 못먹어 가지고 무슨 병에 걸려 죽은 사람들도 몇이 있어요. 그런 자녀들이 출세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이번에 나라에서 잘못한 걸 인정하고 사과하겠다면, 그런 정말 어려운 유족들이나마 일자리를 주든지, 생계지원이라도 해주면 그게 정부로서 할 도리가 아니겠느냐, 그런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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