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집권세력의 콤플렉스와 노스탤지어가 무섭다

기록하는 사람 2009. 1. 9.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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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수행 중인 군인이라고 해서 법적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민간인들을 마음껏 죽이거나 여성을 강간하고 마을을 불태워버릴 수 있을까?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일제의 '군 위안부' 동원과 각종 학살만행이 영원히 인류의 비난을 받는 이유는 그런 일들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반인권적 범죄이기 때문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8일 순천지역 여순사건과 관련해 439명이 국군과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집단 희생된 사실을 밝혀내고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은 이처럼 '진실 규명' 결정이 난 사건에 대해 '국가는 피해자의 피해 및 명예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하고, 가해자에 대하여 적절한 법적·정치적 화해조치를 취하여야 하며, 국민 화해와 통합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진실화해위는 '국가가 유족에 대한 사과와 위령사업의 지원, 군인과 경찰을 대상으로 한 평화인권교육 등을 실시할 것'을 권고했다.

전쟁 시기도 아닌 1948년, 국군과 경찰이 아무런 재판절차도 없이 민간인들을 쏴죽여버린 사건에 대한 국가의 조치라는 게 고작 '사과와 위령사업 지원, 평화인권 교육'에 불과한 것이다.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남편을 잃고 살육의 현장에서 겨우 살아남아 한맺힌 삶을 연명하다시피 살아온 유족의 입장에서는 수억, 수십억 원의 배상금을 받아도 풀리지 않을 것이다.

사람 죽여놓고 사과도 못하겠다니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소정골에서 발굴된 피학살 유해들. 모두 팔이 뒤로 꺽인 채 엎어져 있었다.


그러나 유족들은 이 정도의 조치에도 흔감해한다. 1년에 한 번 위령제 비용으로 얼마간의 예산지원을 해주고 시장이나 군수, 구청장이 참석해 술 한 잔 따라주고 입에 발린 추모사로 생색을 내도 유족들은 그냥 감사할 따름이다. 또 잡혀갈까봐 울음마저 속으로 삼켜야 했던 지난 세월을 생각해보면,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억울함을 인정해주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만큼 고마운 것이다.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죄없는 국민들을 무참히 살해해놓고도 수십 년이 지나 사과 한 마디 하고 제사 비용만 대주면 두고두고 생색을 낼 수 있으니 이것만큼 누이좋고 매부좋은 일이 있을까.


하지만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이런 '진실 규명'마저 중단시키기 위해 안달하고 있다. 과거사 관련 기구 통폐합과 인력·예산 감축 시도가 그것이다.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국가범죄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내가 볼 때 그건 콤플렉스(열등감)와 노스탤지어(향수) 때문이다. 불법적인 민간인학살이 대부분 이승만 정권 시절에 일어난 것이지만, 현재 정권과 기득권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런 학살의 시체를 밟고 주류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뿌리 또한 이승만의 자유당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사건의 진상이 드러날수록 자신들의 과거 죄상이 들통난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민간인학살은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인한 이른바 '국가범죄'다. 나는 우리나라의 주류 기득권 세력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식의 공권력 행사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감히 자신들의 권력에 대항하는 운동권 세력이나 촛불집회 참가자 등을 과거 이승만처럼 '빨갱이'로 몰아 싹 쓸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촛불집회나 최근 언론총파업 과정에서 '과잉 진압'이나 '부당한 공권력 행사'가 종종 논란을 빚는 것도 그런 것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그런 사람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한 '국가범죄'는 언제든지 또 재발할 수 있는 일이다. 이승만의 국민대학살 이후 30년만에 전두환의 광주대학살이 재발한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독재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사람들로선 그런 국가범죄가 자꾸 까발려지면 자신들의 노스탤지어 실현이 멀어진다고 생각한다.


함양군 수동면 도북마을과 치라골마을 50여 명이 학살된 당그래산 학살터. 이곳 역시 여순사건 반란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학살이었다.


이번 순천의 민간인학살처럼 '진실 규명'이나마 이뤄진 사건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다.

당장 함양·산청만 해도 지리산과 덕유산에 숨어든 여순사건 반란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군경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집단살육한 사건이 부지기수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경찰과 군인들이 무서워 진실화해위에 접수조차 못한 유족들이 더 많고, 일가족이 몰살하는 바람에 대가 끊겨 접수할 후손조차 없는 집안도 많다.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한 군대와 경찰을 가진 국가가 일부 집단의 콤플렉스와 노스탤지어에 좌지우지되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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