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청수 경찰청장이 '존경받는 대한민국 CEO 대상'을 받는다는 기사를 처음 봤을 땐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 상을 주최하고 후원한 단체 중 '한국전문기자클럽'이나 '세계언론인재단'이 좀 생소하긴 했지만, 내가 무식해서 그렇겠거니 했다.
그런데, '어청수 청장 'CEO상'은 정체불명' 이라는 <미디어스> 곽상아 기자의 기사를 보는 순간 '이건 뭔가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청장과 함께 상을 받았다는 자치단체장과 (공)기업 사장들을 찾아봤다. 내가 사는 경남의 김한겸 거제시장도 들어 있었다. 전형적인 '돈 주고 상 받기'라는 직감이 왔다. 거제시장은 작년에 우리가 이 관행을 취재했을 때 한국언론인포럼 주관 '2006 지방자치대상'을 받고 홍보광고비 명목으로 1200만원을 줬고, 2007년 크레비즈인증원이 주관하는 '능률혁신경영상'을 받으면서 공동주관사인 <뉴스웨이>에 인터넷 팝업광고비로 500만원을 집행한 전력이 있다.
들러리 선 한국일보나 지식경제부는 뭔가
곧바로 이들 자치단체와 경찰청에 행정정보공개 청구를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몇몇 자치단체에서 회신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응모신청 안내문건에 아예 노골적으로 기업은 2000만원(부가세 별도), 자치단체는 1500만원을 광고료로 입금할 것을 명시해놓고 있었다. 이 안내에 따라 일부 자치단체와 공기업에서 돈을 입금한 사실도 드러났다.
즉시 기사를 인터넷으로 송고했고, 여기 저기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몇 시간 뒤 <미디어스>에도 별도의 정보공개 회신과 자체취재를 바탕으로 한 기사가 올라왔다. (이 부분에 대해 곽상아 기자에게 좀 미안하다. 같은 내용을 취재 중인 줄 알면서도 먼저 써버렸기 때문이다. 협의해서 동시에 송고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랬다면 우리 회사 구성원들에게 욕을 먹었을 것 같다.)
맨 아래 오른쪽엔 '세계언론인재단'의 마크와 로고가 선명하다. 너 누구냐?
어쨌든 나는 이 정도 사실이 밝혀졌으니 다음날엔 적어도 <한겨레>나 <경향신문> 정도는 따라붙을 것으로 생각했다. 특히나 이런 코미디같은 '상 매매' 관행에 <한국일보>(공동주최)는 물론 정부부처인 지식경제부(후원)까지 들러리를 섰다는 사실은 충분히 서울지역 언론의 취잿감이 될 것으로 봤다. 내가 굳이 추가취재를 하지 않아도 지식경제부가 후원기관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서울언론들이 밝혀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건 순진한 촌신문 기자의 착각이었다. <경향신문>의 한 기자로부터 요청을 받고 내가 입수한 자료도 보내줬지만 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기삿거리도 안 되는 걸 나와 곽상아 기자만 호들갑을 떨었던 것일까. 이런 게 '동종업계 침묵의 카르텔'이라는 걸까.
하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건 서울 기자들의 너무나 통큰 이해심 내지는 불감증이다. 명색이 기자라는 사람들이 '한국전문기자클럽'이나 '세계언론인재단'이 어떤 단체인지 호기심조차 없을까?
어쩔 수 없이 '촌'에 있는 내가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신문협회, 그리고 한국언론재단에 문의해봤으나 그 두 단체를 안다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더구나 이름부터 어마어마한 '세계언론인재단'이라는 단체는 정말 존재하는지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인터넷 검색에도 나오지 않고, 해외 언론단체들과 오랜 교류를 해온 한국신문협회 담당자도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하지만 이 상을 공동주최한 <한국일보> 광고에 보면 독수리 문양의 마크와 로고체까지 있는 단체였다. 한국전문기자클럽에 물어보니 "미국에 있다"고 하면서도 미국 어디에 있는지는 자기도 모른다고 한다. 이쯤 되면 더 이상 확인할 길은 없는 셈이다.
만일 있지도 않은 단체 이름만 지어냈다면?
이번에 대상을 받은 26명의 기관·단체장과 기업가들은 모두들 홍보자료를 배포하면서 '세계언론인재단'이라는 후원단체의 이름을 반드시 박아넣었다. 그래야 '뽀대'가 나니까.
그런데, 만일 주최측이 권위있는 상으로 보이기 위해 있지도 않은 단체를 이름만 만들어낸 것이라면 이건 '사기'다. 그렇다면 어청수 경찰청장과 18명의 시·군·구청장, (공)기업 사장들은 사기행각에 놀아난 격이 된다.
한국 경찰의 수장과 지식경제부, 선출직 단체장들이 무더기로 사기에 넘어갔는데, 이게 정말 기삿거리가 안된단 말인가.
나는 '촌'에 있다 보니 아무래도 이런 취재에 한계가 많다. 이거 하나만은 꼭 서울 기자들이 밝혀주기 바란다.
※미디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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