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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궁사건' 대법원 판결에도 재판은 계속된다

기록하는 사람 2008. 12. 8.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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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법부와 한 판 싸움 벌이는 박훈 변호사

창원에서 5년째 노동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박훈(43·창원시 상남동 코아빌딩 5층).


하지만 그는 요즘 이른바 '석궁 테러'로 알려진 전 성균관대 교수 김명호 사건을 맡아 대한민국 사법부와 끈질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박 변호사는 이 사건에 대해 "이건 석궁테러가 아니라 박홍우 판사와 재판부에 의한 '사법테러'라고 불러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수사 단계에서부터 재판과정과 판결에 이르기까지 최소한의 기본도 안된 황당한 사건일뿐 아니라, 수사기관과 재판부가 진실을 밝히기 보다는 진실을 뭉게버린, 법치주의에 대한 정면도전이라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기억에도 가물가물해져 버린 사건의 주인공 김명호는 성균관대 교수로 있던 중 1995년 1월 대학입시 본고사 수학문제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후 그는 부교수 승진에서 탈락하고 이듬해 재임용에서도 탈락했다.

김명호는 이에 불복,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2007년 1월 12일 항소심에서도 패소하자 사흘 뒤인 15일 저녁 항소심 재판장이었던 박홍우 부장판사를 집앞에서 석궁으로 쏴 아랫배를 다치게 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창원 상남동 코아상가 5층 사무실에서 만난 박훈 변호사.


사건 직후인 19일 전국 법원장들은 회의를 열어 이를 '사법부에 대한 테러'로 규정하고 '엄단'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박훈 변호사는 "재판의 공정성은 법관의 '예단 배제'에 있다는 게 상식이고, 헌법과 형사소송법에도 '무죄추정 원칙'을 명시하고 있음에도 사법부의 수장들이 사전에 유죄를 단언하고 엄단하겠다고 했으니, 애초부터 공정한 재판이 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피고와 변호인이 요청한 혈흔 감정과 석궁 발사실험 등은 재판부에 의해 모두 거부됐고, 심지어 2심부터는 재판과정의 녹음·녹취는 물론 속기록 공개도 거부됐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재판에 분개한 박훈 변호사는 항소심 최후변론에서 이렇게 말을 맺었다고 한다.

"재판장, 부끄러운 줄 아세요. 부끄러운 줄 알아요."

하지만 이 사건은 1심, 2심은 물론 대법원까지 모두 징역 4년의 실형 판결을 받았다. 그게 지난 6월의 일이다.

김명호 교수는 지금 의정부교도소 독방에 수감돼 있다. 이처럼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나오면 아무리 문제있는 재판이라도 그걸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김명호 교수와 박훈 변호사는 다시 대한민국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냈다. 수사기관과 재판부가 증거 조작과 불법적인 재판을 진행했으므로 이에 대한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취지다. 배상 요구액은 1억 5000만 원.

변호사 역시 법조계에서 벌어먹고 사는 입장에서 법원과 검찰을 상대로 싸운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일텐데, 박훈은 왜 이렇게 판·검사들을 물고 늘어지려는 걸까.

"석궁테러라고? 재판부의 사법테러다"

-판사들에게 찍히면 변호사 영업에도 별로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치진 않나?
△이 사건처럼 아주 터무니없는 재판이나 판결은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변호사 활동을 해오면서 판검사들에게 잘보이겠다는 입장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상대가 누가 되든, 그 분 입장이 옳다면 변호해야 한다.

-김명호 사건은 어떻게 해서 맡게 됐나.
△처음에도 선임의뢰가 왔지만, 창원과 서울의 거리도 멀고 해서 서울에 있는 변호사를 소개시켜줬다. 그런데 1심이 끝날 때 즈음 김 교수가 법원을 통해 다시 선임의뢰서를 보내왔다. 며칠 고민하다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기라도 하자 싶어 1박 2일간 접견을 해본 후 맡기로 결심했다. 그 때 김 교수가 '나보고 타협하라, 반성하라 하지마라. 난 죽어도 그럴 생각이 없다. 그래서 선처해달라는 변론도 하지 마라'고 했다. 거기에 나도 동의했다.

-항소심 판결 후 <오마이뉴스>에 재판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썼던데, 변호사가 자기가 맡은 사건과 관련해 그런 글을 쓴 것은 처음 봤다. 재판부로선 상당히 기분이 나빴을텐데, 특별한 반응은 없었나.
△전혀 없었다. 자기들 나름대로 무대응이 낫다고 판단했겠지, 뭐.

-대법원 판결 후에 낸 민사소송은 뭔가.
△수사기관의 증거조작과 재판부의 불법적인 재판 진행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이다. 지난 10월 재판청구를 하면서 원래 10원을 청구했는데, 여의치 않아 다시 1억 5000만 원으로 올렸다.

-대법원 판결 후 이런 식으로 재판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은데.
△의외로 이런 손해배상도 많다. 넓은 의미로 보면 간첩조작사건 같은 것도 그런 사건 축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개별적 사건에서 승소한 것은 별로 없다.

-승소 가능성이 낮은데도 하는 이유가 뭔가.
△승소가능성을 보고 하는 것은 아니고, 진실을 밝혀나가기 위한 하나의 작은 행동이고, 기록들을 축적해놔야 하는 의미가 있다.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리라는 건가?
△그렇다. 언젠가 사법부가 바로 서게 되면 진실은 꼭 밝혀진다.

증거 하나도 없이 유죄…진실은 꼭 밝혀진다

-이번 소송의 핵심은 뭔가.
△혈흔감정 신청이다. 그게 핵심인데, 형사재판 과정에서도 옷에 묻어있는 피가 누구 피인지 가리자며 혈흔감정 신청을 수차례 했는데 이유없이 기각됐다. 현재까진 그냥 어떤 남성의 피라는 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밝혀진 결과이다. 그 남성이 누구냐 정말 피해자냐 하는 것은 진실을 가리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그런데 재판부가 그걸 거부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말 그대로 피해자의 피가 아니라면 이건 아주 간단하게 끝나는 것이다. 반면 피해자의 피가 맞다면 그 다음 문제로 넘어가는 건데, 왜 그걸 안 받아들이는지 이해할 수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는데, 재판부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인기드라마인 CSI 같은 것을 보더라도 이런 정도는 당연한 절차 아닌가? 응하지 않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피해자의 피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라는 것도 말이 안된다. 형사재판에서 신체에서 피를 뽑는 건 압수수색절차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민사재판에서도 응할 의무를 정하고 있다. 단지 피해자가 판사여서 안한 것 말고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피해자인 박홍우 판사의 피가 아니라고 보는 것인가?
△그토록 혈흔감정을 하지 않으려는 걸 보면 그런 의심이 강하게 든다.

혈흔감정도 못하는 한국 법원, CSI가 웃겠다

-혈흔 말고도 어떤 의문이 남아 있나.
△부러진 화살이 증발됐다는 것도 그렇다.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불리한 증거물이 분실된 것이니까 판결이 위법하지 않다는 취지로 이야기하는데, 실제론 우리에게 유리한 증거다. 화살촉 끝부분이 부러졌다는 것은 사람 몸에 안맞았다는 것을 말한다. 벽에 맞으면 부러질까. 사람 몸에 맞은 화살이 부러진다는 게 말이 되나.

-그래도 옷에 피가 묻었고, 상처도 있다는데.
△그것도 웃긴다. 겉옷에는 있는 피가 속옷과 겉옷 사이에 있던 와이셔츠에는 아무런 혈흔이 없었다. 그게 말이 되나. 옷을 빨아도 혈흔반응은 나타나게 돼 있다.

-민사재판부에는 혈흔감정 신청을 했나.
△그렇다. 이미 내놨는데, 여기서도 결정이 미뤄지고 있다. 이것도 법원으로선 처음 있는 일이라 당황스럽긴 할 것이다.


-이 재판도 대법원까지 끝까지 갈 것인가.

△당연하다. 최소 3~4년은 걸릴 것이다. 김명호 교수도 의지가 확고하다.

-김명호 교수는 어떤 사람인가.
△고집이 세고 고지식한 면도 있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까지도 억지를 부리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적당한 타협을 모르고 원칙대로 끝까지 한다는 차원에서 고지식하다는 이야기다.

-그의 무죄를 확신하나.
△그렇다. 지금까지 나타난 증거로는 그의 죄를 입증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그렇게 몰고 갔다. 원래 형사재판이라는 것은 검찰이 유죄를 입증해야 한다. 피고인이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건 기본이다. 그런데 검찰은 공판 내내 항소 이유를 말한 것 외에는 아무말도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도대체 무슨 증거로 김명호가 석궁으로 박홍우 판사를 쐈다는 건지, 아무것도 나온 게 없다.

-화제를 좀 돌려보자. 창원에서 노동전문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데, 창원하고는 어떤 연고가 있나.
△아무런 연고도 없다. 2004년 5월 서울에서 금속노조 법률원에서 일하고 있던 중 지역의 요구와 수요 때문에 누군가 창원으로 와야 했는데, 거기서 일하던 변호사 5명 중 내가 가장 빨리 뿌리를 내릴 사람으로 찍혔고, 내가 자원했다.

-고려대 법대를 나왔지만 한동안 기업체에 취직도 해있었던 것으로 안다. 뒤늦게 사법고시를 친 이유는 뭔가.
△그 때 서른 한 살 때였는데, 인생이 재미가 없어보였다. 아파트 청약해놓고 거기에 번 돈 쏟아넣고, 승용차 사고, 주말에 놀러다니는 걸 유일한 낙으로 삼는 삶은 너무 전망이 없어보였다. 그렇게 몇 년만 더 살면 빠져나올 길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박훈은 꼬박 2년동안 사법고시 공부를 했고, 98년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생 시절부터 금속노조와 인연을 가지기 시작해 2001년 부평 대우자동차 노조 정리해고 반대투쟁 때 노동자들의 정당방위를 주장해 보수언론으로부터 '폭력투쟁을 선동한 변호사'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당시 대한변협에서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조사를 벌이기도 했는데, '다소 품위에 어긋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정당한 변호사 활동'이라는 결론이 났다.

그는 이에 대해 "변호사법 제1조에는 변호사의 사명이 '인권과 정의를 옹호한다'고 돼 있다"면서 "변호사로서 법이 유린당하는 상황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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