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저는 이제 서울로 '내려'갑니다

김훤주 2008. 3. 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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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서울 상징 엠블럼

대부분 사람들은 "서울에 올라간다."고 합니다. 반면 자기가 사는 지역으로 돌아올 때는 "마산으로 내려간다."고 합니다. 서울(수도권)은 높고 서울 아닌 데(비수도권)는 낮다는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은 광범하게 퍼져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무슨 구체 수치를 딱 들이댈 수는 없지만, 서울 아닌 데 사는 사람들의 까닭없는 주눅듦이 이를 나름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운동하는 이들의 말버릇 가운데 하나, '상경투쟁'

노동운동을 비롯해 사회운동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아무 생각없이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상경(上京)>입니다.(관청에서도 이런 말을 쓰기는 합니다만) 해당 지역에서 투쟁하다가 안 되면 '상경투쟁'을 벌입니다.

좀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상대방에게 좀더 세게 압력을 넣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서울투쟁'이라 하면 안 될까요? 제 생각으로는 안 될 까닭이 없을 것 같습니다.

철도와 보도매체는 여전히 상행-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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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잘못된 관성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데가 이밖에도 두 군데가 더 있다고 저는 압니다. 하나는 사회를 이끌고 여론을 형성한다는 보도 매체들이고 다른 하나는 날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나르는 한국철도공사입니다.

철도역에 가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서울로 가는 노선은 올라가는 상행(上行)선입니다. 서울에서 다른 지역으로 가는 노선은 내려가는 하행(下行)선입니다. 물론 이들의 '아무 생각 없음'은, 영국글로 스스로를 KORAIL로 적고 '한국철도공사' 대신 '코레일'로 불러달라는 얼빠진 행태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만.

고속도로를 다루는 한국도로공사는 바꿨습니다. 물론 예전에는 철도랑 마찬가지로 서울을 가장 높은 데 놓고 상행-하행으로 노선을 표시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2002년인가에 이런 표현을 싹 내다버렸습니다.

서울을 가장 높은 데 놓는 관성에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는 문제의식의 발로이지 않을까 짐작을 합니다. 대신 어떻게 했을까요? '방향'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상행> 대신 <서울 방향> 이렇게 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케이티엑스 '하행'선 영화객실 광고 포스터 부분

이처럼 고속도로에서는 상행-하행 개념이 폐기됐는데도 고속도로 교통사고 관련 기사에서는 상행-하행 표현이 버젓이 쓰이고 있습니다. 당장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상행선' 또는 '하행선'으로 한 번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무슨 고속도로 상행선 65km 지점에서 추돌 사고가 나서 사상 6명 발생" 따위 글이 줄줄이 뜹니다.

저는 앞으로 서울에 '내려'가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서울에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여태까지는 (서울이나 지역이나 평등하니까) '그냥' 가려고 애를 썼는데, 그렇게 아무리 해도 결과를 놓고 보면 자꾸 '올라'가기만 해졌기 때문입니다.

경남의 노동자 시인 가운데 표성배라는 이가 있습니다. 창원공단 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오래 전부터 "서울로 '내려'간다.", "서울서 '올라'온다."는 표현을 써왔습니다.(표 시인은 사실, '내려'가 아니고 경상도 표준말로, '내리'라고 말해 버립니다.)

세 해 전인가 이를 듣고 표 시인께 이르기를, "서울과 지역, 수도권과 비수도권은 원래 평등하니까 '그냥' 간다고 하면 되지, 굳이 <서울로 '내려'간다>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했습니다.

그 때는 제가 옳은 줄로 착각했습니다. 겪어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노조 전임을 맡고 출장이 잦아지면서 언론노조 본조가 있는 서울 나들이가 많아졌습니다. 서울 가서 사람을 만나면 인사로 던지는 첫 마디가 대부분 "'올라'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죠?"입니다. '그냥',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하는 이는, 제 기억으로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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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까, 저도 모르는 새에 그런 분위기에 젖어들어, "예, '올라'오는 데 길이 막혀서 혼났습니다."라든지, "아뇨, 케이티엑스 타니까 '올라'오는 데 세 시간밖에 안 걸리던데요.", 이렇게 지껄여지더라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같은 관성에서는 누구든 서울에 '그냥' 가기는 아주아주 어렵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가다 보면 출발에서부터 '올라'가게 되고 "이번에는 꼭 '그냥' 가야지." 작심하더라도 전체 분위기에 휩쓸리고 보면 어느 결에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게 되고 맙니다.

저는 그래서 거꾸로 "앞으로는 '내려'가야지.", 마음을 오지게 다져 먹었습니다. <서울에 올라간다.>는 말이, 지금 사회에서 틀리지는 않은 표현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없거나 좋기만 한 표현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얘기에도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자기 사는 지역 값어치를 가장 높게

그렇다면 개인 차원에서 이렇게 조금 무리를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오른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나무를 바로잡으려면 가운데로 가져다 놓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왼쪽으로 세게 잡아당겨야만 되는 이치처럼 말입니다.

제가 서울에는 '내려'간다 하고 제가 사는 창원이나 마산으로는 '올라'온다 하겠다는 바탕에는 무엇보다 먼저 서울을 가장 높은 데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음이 분명합니다. 아울러 하나 더 밝혀두자면 여기에는 제가 사는 마산과 창원 그리고 경남의 값어치를 가장 높이 치겠다는 생각도 더불어 들어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사는 데를 가장 높이 치고 가치롭게 여기면서 살다보면, 언젠가는 세상이 지금보다는 훨씬 더 평평해지지 않겠습니까?

김훤주(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지부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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