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언론/블로그 컨설팅

운동권이 블로그를 두려워하는 이유

기록하는 사람 2008. 8. 25.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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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도 '미디어로서 블로그'의 효용성을 알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6~7개월동안 블로깅을 하는 동안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민·사회·노동단체들이 웹2.0시대의 유용한 미디어 도구인 블로그를 거의 활용하지 못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나 진보연대처럼 블로그를 활용하고 있는 곳도 있지만, 이곳 역시 기대에는 못미치는 구석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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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블로그를 통해 대중을 상대하려는 시도나마 하고 있는 민언련 블로그.


다른 요인도 있겠지만, 이것이야말로 운동단체들이 사회의 변화와 대중의 진화를 앞장서 이끌기는커녕 뒤따라가지도 못하고(혹은 그럴 의지도 없는)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촛불집회 과정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던 이른바 구닥다리 진보의 경직성도 바로 이런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대중과 소통 거부하는 주류 운동권

블로그 하나 갖고 뭘 그리 비약하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무릇 운동(movement)이라는 게 뭘까요? 우리의 주장에 동조하는 대중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만들어나가는 과정이지 않습니까? 그러려면 끊임없이 대중을 상대로 발언해야 하고, 대중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소통'이죠.

그런데 과연 운동단체들이 대중과 소통이라는 걸 해오긴 했을까요? 제가 보기에 대중과 소통은커녕 자기들끼리만 알아듣는 언어를 통해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자기들끼리 자위·자족하고,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는 싸움질만 해온 것 같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언하느냐고 묻는다면 △이른바 진보지식인들의 난수표같이 난해한 글쓰기 습성 △80·90년대에 읽은 맑스주의 철학과 사회과학 책 몇 권으로 이미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교만함 △판에 박은 성명서의 남발과 상투적인 기자회견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고 작은 쓴소리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함과 폐쇄성 △족벌 뺨치는 운동권 연고주의와 파벌 △자신도 없으면서 발표만 거창하게 하는 '뻥'치는 버릇 △실제 일은 하지도 않을거면서 이름과 직책만 걸치려는 운동권 감투주의 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도 다 제시할 수 있지만, 그러면 개인이나 개별단체에 대한 공격이 될까봐 이 정도로 줄입니다.

다만 대중과 소통의 도구로서 미디어를 운동단체들이 어떻게 활용해왔는지는 한 번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솔직히 그동안 한국의 주류 운동권은 안티조선 운동에 한쪽 다리만 슬쩍 걸쳐놓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오지 않았습니다. 조중동이 아무리 악의적인 왜곡보도를 해도 별다른 대응은 하지 못했죠. 오히려 조중동이 좀 우호적인(?) 기사 한 줄이라도 써주면 감지덕지하는 모습까지 보여왔습니다.

그러면서도 한겨레나 경향이 어쩌다 쓴소리라도 할라치면, 아니 자기들이 원하는 식으로 기사가 나오지 않으면 거의 잡아먹을 듯한 표정과 행동을 보여 왔습니다.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전형적인 모습이었죠. 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조중동이야 원래 그렇다고 쳐도, 믿었던 한겨레나 경향이 이럴 수 있느냐."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볼 순 없을까요? "조중동이야 원래 그렇다고 쳐도, 한겨레나 경향마저 이러는 걸 보면 우리에게도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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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청래 의원은 총선에서 떨어진 후, 대중 앞에 발가벗고 나서기 시작했다.


조중동에 무시당하고 한겨레 경향에 얼굴 붉히는 

물론 한겨레나 경향의 보도가 모두 완벽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다보니 한국의 주류 운동권은 조중동에게 무시당하거나 경멸받는 대상이 되었고, 한겨레·경향과는 서로 얼굴 붉히는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국민과 소통은커녕 담당 기자를 설득시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성명서 발표하고 기자회견만 뻔질나게 합니다. 기자회견 형식도 청와대나 정부기관보다 더 딱딱합니다. 진짜 기자회견인지, 시위의 다른 방식인지, 아니면 TV나 신문에 얼굴 내밀고 싶어서 하는 퍼포먼스인지 헛갈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자회견 자리 말고 따로 취재를 위해 기자가 사무실을 찾아가면 바쁘다며 잘 상대도 해주지 않습니다. 제 경험상 전화를 해도 관료들보다 운동단체 간부와 통화하는 게 더 어렵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들이 만족할 기사가 나오지 않으면 언론 탓만 합니다. 국민이 자기들을 지지해주지 않는 것도 모두 언론 탓입니다.

그렇습니다. 언론, 문제 많습니다. 기자들도 문제 많습니다. 운동단체들이 언론플레이에 좀 서툴러도 기자들이 스스로 사명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취재해 진실을 국민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취재를 해봐도 운동단체가 국민을 설득할만한 논리와 대안을 내놓지 못할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자가 스스로 운동권의 싱크탱크가 되어 논리를 수혈해줄 수는 없지 않나요?

엊그제 배달돼온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서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한국의 운동권이 80, 90년대의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촛불집회는 운동세력에 대중과의 소통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우쳐주었다. '명박산성'만큼은 아닐지라도 운동세력과 시민들 사이에는 어떤 장벽이 놓여 있었다. 대중의 입장에서는 그 장벽을 넘어 소통해야 할 필요성이 별로 없다. 그러나 운동세력으로선 이 장벽을 넘어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명박 정부에 '명박산성'이라는 컨테이너 장벽이 있다면, 운동세력에게는 '언어장애'라는 장벽을 스스로 쳐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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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논리를 생산하고 있는 자유기업원도 이미 블로그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운동권의 심각한 언어장애, 이유가 있다

저는 소위 진보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단순한 이야기를 쓸데없이 어렵게 하는 것과 시민·사회·노동단체들이 쌍방향 미디어도구인 블로그를 활용하지 않고 일방적인 성명서만 줄창 내놓는 데에는 같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바로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중과 소통하는 게 두렵기 때문입니다. 대중 앞에 발가벗겨져 자신의 실력이 뽀록날까봐, 자기가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인지, 얼마나 대중과 유리되어 있는지, 자신의 언어장애가 얼마나 심각한 정도인지 깨닫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블로그가 올드미디어를 대체할 최종적인 대안이라고 보진 않습니다. 하지만, 현재로선 운동권이 대중과 소통하기에 가장 유용한 도구라고 봅니다. 앞서 제가 한국의 주류운동권을 싸잡아 비판하긴 했지만, 그렇지 않은 훌륭한 분들도 적지는 않습니다. 인용한 한홍구 교수도 글을 쉽게 쓰는 진보지식인 중 한 분입니다.

이런 분들이 주류가 되고, 시민·사회·노동단체의 모든 상근자들이 1인미디어로 블로거를 활용할 수 있다면 대중과 소통을 위한 첫걸음은 내딛게 되는 셈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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