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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월) 중간보고회 여는 산청 외골리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현장
지난 주 목요일(14일) 경남 산청에 다녀왔습니다.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소정골에서 이뤄지고 있는 민간인희생자 유해발굴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산청군 시천면 면소재지인 덕산리에서 지리산 중산리쪽으로 약 10여분간 더 차로 가다보면 이런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경남대박물관 이상길 교수팀이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의 용역의뢰를 받아 발굴 중인 이 학살 현장은 1951년 2~3월 사이 국군이 장갑차와 트럭을 앞세우고 10여 대의 버스에 태워온 민간인들을 모두 총살한 후 암매장했다는 곳입니다.
이처럼 한국전쟁 전후 전국 곳곳의 산골짜리에서 적어도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총살, 암매장을 당했습니다. 어른들이 흔히 큰일날 일을 했을 때 "너, 그러다가 골로 같다"고 하는 '골'은 '골짜리'를 뜻합니다. 즉 '골짜리에 끌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는 뜻이지요.
이 학살 현장은 지난 2000년 마산MBC 김석창 PD와 지역사회단체에 의해 암매장 터 한 곳이 발굴되기도 했으나, 출토된 유해를 달리 처리할 방법이 없어 현장에 다시 큰 관을 만들어 합장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의 1차 발굴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희생된 분들의 신원은 밝히지 못했습니다.
2000년 1차 발굴 후 다시 재매장한 곳입니다.
2000년 당시 굴착기 등으로 발굴하면서 유해가 많이 훼손된 데다, 재매장한 후 습기 때문에 더 많이 부스러진 상태입니다.
현장에서 함께 나온 단추와 고무줄.
발굴조사단이 유해를 수습해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번 유해발굴은 2000년 당시 1차 발굴 후 재매장한 곳 말고도, 나머지 4~5곳 정도로 추정되는 암매장 터를 추가로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또한 이번 발굴로 희생된 분들의 신원을 밝힐 만한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 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지난 14일 찾은 현장은 2000년 1차 발굴 합장묘를 다시 발굴해 유해를 분류하고 있었고, 추가로 3곳의 암매장터를 발굴해놓고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유해가 얼굴을 땅쪽으로 향해 있습니다.
이상길 교수가 발굴된 유해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개골에 총탄을 맞은 흔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발굴된 유해의 상태는 대부분 얼굴이 밑으로 향하고 있었고, 머리에 총탄을 맞은 흔적이 있으며, 두 팔은 등 뒤로 향하고 있는 걸로 보아 뒤로 묶인 채 꿇어 앉아 있는 상태에서 근접총살을 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또한 현장에서 수거된 탄피는 모두 카빈소총의 그것이었습니다. 당시 다른 학살 현장에서 발견된 탄피들은 대개 M1 소총과 카빈소총의 탄피가 섞여 있는 데 비해 이 곳은 단일한 카빈소총인 걸로 볼 때 좀 더 조직적인 군대의 소행으로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유해의 양 팔이 대부분 등 뒤로 향해 있습니다.
한 유해에서는 금니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날까지는 아직 희생자들의 신원을 알 수 있을 만한 유류품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발굴된 유해들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어린 아이인지도 감식할 수 없었습니다. 1960년의 신문보도와 학살 당시 목격자의 전언을 종합해보면 '이불과 남비를 든 부녀자와 아이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발굴에서 과연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의 유해가 나올지도 주요한 관심사입니다.
중간보고회에서 의문 밝혀질까 관심
발굴조사를 맡고 있는 경남대 이상길 교수팀은 25일(월) 오후 2시 현장에서 중간보고회를 열 예정입니다.
이 보고회에서 △과연 부녀자와 아이들의 유해가 있는지 △그들의 신원을 밝힐 만한 유류품이 나왔는지 △가해 부대의 소속은 어디인지 △그들이 학살된 이유는 무엇인지 등의 의문이 풀릴 수 있을 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특히 대구와 경북과 전북 지역에 계시는 유족분들은 특히 관심을 갖고 지켜보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60년 신문보도에 의하면 희생자들을 태우고 온 버스에 '신흥' '경북영' '전북영' 등의 차량번호판이 붙어 있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치아의 상태는 희생자의 나이를 감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2000년 5월 16일 제가 썼던 외공리 사건관련 기사를 덧붙입니다.
60년 5월 17일 자 <부산일보>는 “김종원 인솔군대가”라는 타이틀 아래 산청 시천면 양민학살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점동부락 뒷산 소정골짜기에는 84년(단기 4284년=서기 1951년 : 인용자 주) 3월 12일 피난민을 이민시켜준다고 양민을 끌고 와 500명을 송두리째 생매장한 학살사건이 김종원이가 인솔해온 11사단 9연대 화랑부대에 의하여 강행된 것이 알려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300명의 부락청년들을 인솔,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김남준씨의 산증언이며 84년 3월 12일 상오 10시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한 대의 장갑차를 앞세우고 [택시]에 ?을 실은 세 추럭에 ??들의 호위아래 11대의 버스로 이곳에 끌고 와 외공리 점동부락 뒷산 소정골자기 ???능선의 상봉에서 ??냄비까지 소지했던 아녀자와 어린이 등 500명을 총살하고 떠나갔다는 것이다."(물음표는 판독불가)
또 60년 5월 19일 <한국일보>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미 드러난 산청·함양사건 외에 또다시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와 점동 사이에 있는 계곡에서 남녀노소 수백명의 양민이 학살되었음이 알려졌다. 현장에는 지금도 직경 3m 내지 6m의 대소무덤 7개가 남아있는데 이 학살에 동원된 군부대 소속은 확인되지 않았다. 시천면 신천, 단천, 중산 등 현지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함양·산청사건이 있은 보름 후인 지난 84년 2월 21일 음력 정월 16일 2대의 장갑차를 앞세우고 3대의 추럭에 분승한 무장군인들이 세간살이까지 가지고 아이들과 부인들이 많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지리산 주변 주민들로 보인다고 한다. 부락목격자들은 또한 11대의 버스는 [신흥] [경북영] 혹은 [전북영]이란 넘버가 붙어 있었다고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증언했다."
또다른 자료(부산일보 김경렬기자, 다큐멘터리 지리산)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낮부터 내린 비가 오후 2시에는 빗방울이 제법 굵어졌다. 좁고 미끄러운 덕천벼랑의 가파른 길을 따라 한 대의 장갑차를 앞세운 긴 차량의 행렬이 오고 있었다. 장갑차에는 기관총이 실렸고, 그 뒤에는 택시가 한 대, 그리고 세대의 트럭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 뒤를 따라 11대의 버스가 줄을 이어 따랐다. 차량행렬은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점동마을을 지나 소정골짜기를 향하고 있었다. 버스에는 담요 냄비 식기 등 살림도구와 함께 어린이 등 남녀노소 500여명이 타고 있었다. 빗방울이 더 굵어졌는데도 버스에 실렸던 사람들이 모두 날비를 맞으며 내렸다. 별안간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사람의 피가 보태져 냇물처럼 흘렀다. 김종원 대령이 그의 부대를 이끌고 소정골짜기에서 내려왔다. 시천특공대원들과 마을에서 동원된 사람들이 현장을 흙으로 덮으며 울어주었다. 빗방울은 더 굵어지고 안개구름이 둘레를 감싸 금방 사방이 어두어졌다."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점동부락 뒷산 소정골짜기에는 84년(단기 4284년=서기 1951년 : 인용자 주) 3월 12일 피난민을 이민시켜준다고 양민을 끌고 와 500명을 송두리째 생매장한 학살사건이 김종원이가 인솔해온 11사단 9연대 화랑부대에 의하여 강행된 것이 알려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300명의 부락청년들을 인솔,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김남준씨의 산증언이며 84년 3월 12일 상오 10시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한 대의 장갑차를 앞세우고 [택시]에 ?을 실은 세 추럭에 ??들의 호위아래 11대의 버스로 이곳에 끌고 와 외공리 점동부락 뒷산 소정골자기 ???능선의 상봉에서 ??냄비까지 소지했던 아녀자와 어린이 등 500명을 총살하고 떠나갔다는 것이다."(물음표는 판독불가)
또 60년 5월 19일 <한국일보>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미 드러난 산청·함양사건 외에 또다시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와 점동 사이에 있는 계곡에서 남녀노소 수백명의 양민이 학살되었음이 알려졌다. 현장에는 지금도 직경 3m 내지 6m의 대소무덤 7개가 남아있는데 이 학살에 동원된 군부대 소속은 확인되지 않았다. 시천면 신천, 단천, 중산 등 현지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함양·산청사건이 있은 보름 후인 지난 84년 2월 21일 음력 정월 16일 2대의 장갑차를 앞세우고 3대의 추럭에 분승한 무장군인들이 세간살이까지 가지고 아이들과 부인들이 많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지리산 주변 주민들로 보인다고 한다. 부락목격자들은 또한 11대의 버스는 [신흥] [경북영] 혹은 [전북영]이란 넘버가 붙어 있었다고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증언했다."
또다른 자료(부산일보 김경렬기자, 다큐멘터리 지리산)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낮부터 내린 비가 오후 2시에는 빗방울이 제법 굵어졌다. 좁고 미끄러운 덕천벼랑의 가파른 길을 따라 한 대의 장갑차를 앞세운 긴 차량의 행렬이 오고 있었다. 장갑차에는 기관총이 실렸고, 그 뒤에는 택시가 한 대, 그리고 세대의 트럭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 뒤를 따라 11대의 버스가 줄을 이어 따랐다. 차량행렬은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점동마을을 지나 소정골짜기를 향하고 있었다. 버스에는 담요 냄비 식기 등 살림도구와 함께 어린이 등 남녀노소 500여명이 타고 있었다. 빗방울이 더 굵어졌는데도 버스에 실렸던 사람들이 모두 날비를 맞으며 내렸다. 별안간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사람의 피가 보태져 냇물처럼 흘렀다. 김종원 대령이 그의 부대를 이끌고 소정골짜기에서 내려왔다. 시천특공대원들과 마을에서 동원된 사람들이 현장을 흙으로 덮으며 울어주었다. 빗방울은 더 굵어지고 안개구름이 둘레를 감싸 금방 사방이 어두어졌다."
(2000. 5. 16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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