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함안총쇄록 답사기 (17) 한강 정구 놀았던 멋진 별천계곡

김훤주 2023. 5. 26.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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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망 두터웠던 

선배 군수 한강 정구

즐겨 찾던 유적에 흔적 뚜렷

오횡묵, 여러 번 들러 찬양

글자 새기고 시집도 펴내

 

오횡묵보다 300년 가량 앞선 시기에 함안에서 군수를 지낸 인물로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가 있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모두에게서 배웠고 따로 한강 학파를 이룰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다. 역대 함안군수 가운데 인품과 학문이 가장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함안 사람들은 지금도 한강 정구를 많이 기억하고 높이 받들고 있다.

 

한강 정구의 작품 <함주지>

함안 사람들에게 정구는 <함주지(咸州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함안군수로 있으면서 지역 역량을 끌어모아 <함주지>를 편찬했던 것이다. 함안의 산천과 인물·문화·산물을 담은 함주지는 지금껏 남아 있는 우리나라 읍지(邑誌) 가운데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함주지>는 함안을 기록유산의 고장으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편찬은 1587년 마무리되었으며 간행은 임진왜란이 지난 1600년에야 이루어졌다. 한강은 1580년 창녕 현감으로 있을 때도 <창산지(昌山誌)>라는 읍지를 만든 적이 있다. 그런데 <창산지>는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졌지만 <함주지>는 사라지지 않고 남았다.

 

창녕 사람들은 <창산지>를 지켜내지 못했지만 함안 사람들은 <함주지>를 지켜낸 것이다. 먼저 후배 군수 두 사람이 크게 이바지했다. 이휘진(李彙晉, 재임 1738~43이덕희(李德熙, 재임 1837~41) 두 군수가 100년 안팎 시차를 두고 <함주지> 증보판을 찍어냈다.

 

또 함안문화원에 따르면 조용숙(趙鏞淑, 1895~1960)이라는 분이 다시 100년이 지난 1939년 인쇄하였다. 일제강점 아래였지만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1950년 한국전쟁을 맞아 함안이 쑥대밭이 되는 난리통을 겪고서도 <함주지>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함안 선비들의 작품 <함주지>

<함주지>를 펴내는 과정에서도 함안 사람들의 이바지는 작지 않았다. 한강은 일찍이 <함주지> 서문을 통해 기초 자료 수집은 본인이 했지만 편찬·제작은 지역 선비들과 합동으로 했다고 뚜렷이 밝혔다.

 

모두 넷인데 한강보다 연배가 위였다. “여선 이칭(汝宣 李稱, 1535~1600)은 관대온후한 군자이고, 중사 박제인(仲思 朴齊仁, 1536~1618)은 덕이 있고 지조가 곧으며 여함 이정(汝涵 李瀞, 1541~1613)은 재주와 행실이 두루 높으니 모두 내가 경외하며 만날 때마다 즐거운 인물들이다. 태원 오운(太源 吳澐, 1540~1617)도 고을의 선진(先進)으로 지금 군학(郡學=향교) 제독(提督=지금 교육지원청 교육장 정도)으로 있다.”

 

이들과는 공사 구분 없이 자주 어울리는 사이였다. “내가 수집한 산천과 백성과 풍속에 관한 기록을 보고 이를 군지(郡志)로 편찬하지 않겠는가?’ 하는데, 바로 나의 뜻이었다. 의견이 합해지니 편집과 기록을 함께 하여 열흘만에 끝마쳤다. 열심하고 민첩한 이 분들의 정성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처럼 일이 빨리 이룩되고 이처럼 전체 실마리도 조리가 있었겠는가.”

 

각별한 마음 커다랗게 담은 청덕비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강 정구에 대한 함안 사람들의 각별함은 당대에 이미 대단하였다. 함안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워준 최초 인물이 조선 82대 군수인 한강 정구였던 것이다.

정구 청덕비.

선정비라 하면 사람들은 요즘 무슨 공로패 정도로 여기며 어지간하면 하나씩 안겼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횡묵이 부임 이튿날 읽은 <군지(郡誌)>를 보면 조선시대 함안군수가 오횡묵 본인을 빼면 242(실제로는 243명인데 <군지>에 제124대 이민행(李敏行) 군수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인데 선정비가 세워진 인물은 정구까지 쳐서 10명밖에 되지 않았다.

 

93대 박충준(朴忠俊), 102대 양신용(梁信容), 123대 김성(金城), 141대 변시태(邊是泰), 158대 이장(李墇), 222대 이봉억(李鳳億), 그리고 229·230·231대 정주묵(鄭周默한규직(韓圭稷양필환(梁必煥) 군수가 전부였다. 100명이 거쳐 가면 4명이 받을까 말까 하는 정도였던 것이다.

 

1589년 늦봄에 세웠는데 첫머리에 정구청덕비(鄭逑淸德碑)’라 새겨져 있다. 오횡묵 당시까지는 함안읍성 태평루 앞 삼수정(三樹亭) 남쪽에 있었다. 지금은 옮겨져 읍성 바깥 함안향교 드나드는 길목(봉성리 842) 한켠에 있다.

 

다른 선정비는 대부분 몸돌도 작고 머릿돌(螭首)과 받침돌(龜趺)도 장식이 간략하지만 정구청덕비는 몸돌도 크고 머릿돌·받침돌 장식 또한 뚜렷하다. 글자도 보통은 많아야 넉 자씩 여덟 구절 서른두 글자 정도지만 여기는 다섯 배를 웃도는 165 글자에 이른다. 당대 백성들의 정구에 대한 각별함이 이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한강 정구가 놀았던 별천계곡

별천(別川)계곡은 한강 정구의 자취가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별천은 여항산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너럭바위를 만나면서 지어낸 명승이다. 바위를 구르는 물소리는 명랑하다. 아래위로 넓게 트인 암반은 시원하다. 수풀은 우거져 좋은 그늘을 만들었다. 내리쬐는 햇살은 고루 퍼져서 따사롭다.

 

한강 정구가 나들이했던 흔적도 남아 있고 후세 사람들이 이를 기억하여 새겨놓은 각자도 뚜렷하다. 이처럼 놀기 좋은 자리에 으뜸 수령 한강의 자취까지 서려 있으니 후배 군수라면 누구나 한번은 찾아 놀고픈 유적이었을 것이다.

 

오횡묵은 부임 2년이 다 되어서야 별천계곡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던 모양이다. 봄이 무르익는 189139일이었다. “병곡면(竝谷面) 별천은 한강 정 선생이 머물러 놀던 자리다. 수석이 꽤 신기하다는 말을 듣고 한 번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하였다. 오늘 석성(石醒=지인인 김인길)과 함께 강지(康祉)에 이르러 진해를 버리고 길을 가서 물을 따라 들어갔더니 돌길이 위태롭고 비탈져서 가마가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 진해는 지금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일대를 이른다.

 

오횡묵은 바닥에 금계(錦溪)라 새겨져 있는 주리 서촌 시내를 지나 사각(巳刻)에 별천에 이르렀다. 고을 안팎의 선비 여섯이 먼저 와 있었고 시냇가 넓은 바위에는 주민들(居人)이 천막을 쳐놓고 있었다.

 

오횡묵은 선비들과 일대를 함께 산보하며 두루 살펴보았다. “근원은 여항산에서 나온다. 두 골짜기가 여기에서 합하여진다. 합해지는 데 반석(盤石)이 손바닥처럼 평평하다. 아래로 펼쳐지는 삼분의일은 물이 머무르는데 바위는 100명 남짓이 줄지어 앉을 수 있다.”

 

골짜기를 따라갔더니 한강의 자취가 있었다. “물가 바위에 함안군수 정아무라 새겨져 있으나 거의 다 마멸되어 사라지고 함안(咸安)’ 두 글자만 희미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말구유(馬槽)와 일산을 꽂았던 구멍(植傘穴)도 옆에 있는데 또한 한강 어른의 유적이라 한다.”

별천계곡 상류 두 물줄기가 합해지는 부분에 일산을 박았던 구멍 자리.

한강의 유적은 산기슭에도 있었다. 물가 것은 한강이 손수 남겼고 산기슭 것은 후세 사람들이 한강을 기려 남겼다. “산비탈 바위면이 담벼락처럼 많이 서 있는데 한강장구지소(寒岡杖屨之所)’라 새겨져 있다.” ()은 지팡이, ()는 짚신이니 지팡이 짚고 짚신을 신은 채 천석(泉石)을 돌아다니며 자연을 누린다는 뜻이다.

 

오횡묵이 놀았던 별천계곡

오횡묵의 눈에는 별천이 어떻게 비쳤을까? “계절은 늦봄이라 부드러운 바람이 화창하였다. 붉은 산마루와 초록빛 시냇물이 서로 비치니 매우 사랑스러웠다.” 도착한 시각이 사시(巳時=오전 10시 전후)였으니 햇살도 좋았을 것이다.

 

잔뜩 좋아진 기분으로 일행과 술밥을 함께하고 놀면서 시를 지었다. “()으로 심()을 얻었는데 땅이 그윽하고 깊기 때문이다. 주리(廚吏)와 관동(官僮)들이 일찍부터 시냇가 꽃을 따서 떡을 부치더니 낮이 되자 올렸다. 몇 순배 술이 돌고 나니 골동반(骨董飯=비빔밥)이 또 나왔다. 어느덧 석양이 산에 걸렸고 시령(詩令)이 매우 급하여 짓는 대로 두루마리에 올렸다.”

 

날이 저물었지만 곧바로 돌아올 수는 없었다. 함께 놀았던 선비들이 자기 집에 들렀다 가시라 청했기 때문이다. 먼저 들른 시내 동쪽 장의(掌儀=향교의 임원) 홍병로(洪秉魯)의 집에서는 주인이 술과 안주를 내어왔는데 매우 좋아서 산중의 맛이 아니었다.”

 

조금 쉬면서 한 번 더 시를 지은 다음 시내 서쪽 지남(芝南) 이유근(李有根)과 초산(樵山) 안제형(安濟瀅)의 집에 들렀지만 날이 어둑어둑해졌기 때문에 문에 들어서자마자 나왔다.” 시내 동쪽과 시내 서쪽은 지금으로 치면 각각 주동리와 주서리로 짐작된다.

 

오횡묵은 온종일 술을 낫게 마시며 세게 놀았다. <함안총쇄록> 어디에서도 흐트러진 모습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오횡묵이지만 이날만큼은 관아로 돌아오니 이미 술각(戌刻)이었는데 쓰러지듯 누워서 고달프게 앓았다(頹臥吟憊).”

 

오횡묵이 남긴 <별천속유록>

오횡묵의 별천 나들이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앞선 별천의 놀이에서 좋은 경치를 모두 찾지도 못하였고 함안에서 함께 감상할 만한 사람들도 많이 참석하지 않았기”(1891. 3. 20.) 때문에 이 날 다시 한 번 놀기로 하고 사각(巳刻)에 냇가에 이르자 문사들 가운데 모인 사람이 20명 남짓 되었다.”

 

그러고는 시문을 지어 책으로 모으기로 했다. 이름은 <별천속유록(別川續遊錄)>이라 붙였다. 놀이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한 부씩 갖도록 할 요량이었다. 전말과 성명을 자세히 기록하고 관아로 돌아오니 바로 저녁종(昏鐘)이 울릴 때였다.

 

전말을 보면 오횡묵이 별천을 찾은 까닭이 적혀 있다. “선생의 의연한 모습과 훌륭한 정사에는 미치지도 못하고 따르기도 어렵다. 하지만 (선생이 노셨던) 산수에 이르러 그 경관을 놀면서 구경하는 것은 발이 있으면 밟을 수 있고 눈이 있으면 볼 수 있다. 하물며 잘 돌아와 얻는 바가 있으니 바로 백세까지 이어지는 기풍을 느끼고 피어나고 일으키는 것이다.”

 

요컨대 선생의 드높은 경지에는 미칠 수 없으니 기풍만이라도 제대로 느끼고 싶다는 것이다. 제목에 나오는 이어질 속()’을 보면 한강에게 바치는 헌사(獻詞)임이 분명하다. 한강의 앞선 별천 놀이에 이어진 한바탕 놀음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앞서 보았던 한강의 유적에 대한 자세한 묘사도 남겼다. “작은 시내가 비단을 펼친 듯 흐르다 멈춘 반석에 말()처럼 오목한 데()는 선생이 말에 물 먹인 자리이며, 뚫린 구멍(穿容)은 일산을 꽂았던 곳이고, ‘함안각자(刻字)는 선생이 손수 새겼다고 한다.”

 

<별천속유록>은 한 달 남짓 지나 쓰기가 마쳐졌으니 스물네 권을 필사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만든 별천시품책자(別川詩品冊子)를 당일 모인 사람들과 추가로 시를 낸 24명에게 나누어주었다.”(1891. 4. 25.)

 

받은 이들은 이렇다. 박용하(朴龍夏) 박영락(朴永絡) 양익수(梁翊洙) 조용진(趙鏞振) 이장록(李璋祿) 이수형(李壽瑩) 조성원(趙性源) 조성주(趙性冑) 홍병로(洪秉魯) 김인길(金寅吉) 조용해(趙龍海) 박규환(朴圭煥) 이유겸(李有謙) 안제형(安濟瑩) 조성충(趙性忠) 이종화(李鍾和) 조성하(趙性夏) 조성호(趙性昊) 배문표(裵文杓) 안택중(安宅中) 안기환(安箕桓) 조익규(趙益奎) 이용순(李龍淳) 조의화(趙義澕).

 

양익수와 김인길은 바깥에서 온 오횡묵의 손님이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함안 고을에서 학문을 하는 선비들이었다. 이 가운데 이유겸(李有謙)은 앞선 39일 별천 나들이에 동행했던 이유근(李有根)과 동일 인물로 짐작된다.

 

<별천속유록>은 아직 실물이 확인되지 않았다. 오횡묵은 원본말고도 필사본 스물네 권을 남겼다. 그렇다면 어디엔가 남아 있을 개연성이 상대적으로 높아 보인다. 오횡묵의 별천 나들이에 동참했던 스물네 선비의 집안에서 찾아진다면 함안의 보물 목록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별천 바위에 오횡묵도 새기고

별천에서 한강 정구를 기리며 놀았던 오횡묵의 감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바위에 글자를 새기는 데까지 나아갔다. 두 번째 나들이를 하고 나서 한 달 남짓 지난 423일이었다.

 

별천에서 놀며 즐긴 뒤에 마땅히 이름을 남기기(題名)로 하였다. 이날 나(=오횡묵)와 석성(=김인길)의 이름을 새기는(刻名) 차에 구민소(具敏邵)를 보내어 일을 시작하도록 시켰다.”

 

구민소는 오횡묵이 부임 첫날 펼쳐본 거안(擧案)에 호방(戶房)으로 나온다. 거안은 삼반관속들의 관등성명을 적어놓은 책으로 보면 된다. <함안총쇄록>을 보면 쓰임을 받기도 하고 불신을 받기도 하였으나 결국에는 신임 쪽으로 굳어졌다.

 

먼저 거짓 재해를 조사하는 데 차출되었다가(1889. 4. 24.) 다음은 조세를 떼먹고 귀양 가지 않으려고 뇌물을 쓰는 인물로(1889. 5. 6.) 나오더니 마지막 1889625생김새는 거의 진실한데 민첩하지는 못하다는 평을 받았다.

 

한강을 기리는 다른 각자들

별천 시냇가 산기슭 바람벽에는 이밖에 다른 글자도 새겨져 있었다. ‘양천(陽川)’, ‘선생지풍 거사지락 백년심취 천추유적(先生之風 居士之樂 百年深趣 千秋幽蹟=선생의 기풍/ 숨은 선비의 즐거움/ 백년의 깊은 취향/ 천년에 남을 그윽한 자취)’이문갑(李文甲)’·‘조원(趙瑗)’·‘이용탁(李容鐸)’ 등 사람 이름도 함께 있었다.

양천 이문갑 조원 이용탁 각자.

 

오횡묵은 <함안총쇄록>에서 이 세 분이 바로 군에서 덕이 높은 어른으로 정자를 세우고 한가롭게 지냈으나 지금은 모두 돌아가시고 정자 또한 돌보지 못하여 황폐해졌다고 한다”(1889. 3. 9.)고 적었다.

 

사언절구에 나오는 선생(先生)’은 한강 정구를 일컫는다. 조원(趙瑗, 1802~78)이 썼다는데 오횡묵보다 대략 한 세대 앞선 사람이다. 같이 적혀 있는 이문갑과 이용탁은 조원과 어울렸던 당대 지역 선비들이라 보면 된다.

 

오횡묵은 <별천속유록> 서문에서 한강의 별천 놀이에 대한 함안 사람들의 각별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시냇가나 길거리의 아이들도 외워 얘기하고 또 고을 어르신들도 정자를 일으켜 기리거나 이름을 새겨 사랑한다. 지금부터 선생까지는 300년이 넘는데도 향기로운 자취가 남아 골짜기와 산마루에 빛난다.”(1889. 3. 20.)

 

바위에 새기는 보람은 무엇일까?

별천계곡에 가면 지금도 <함안총쇄록>에 나오는 이런 자취들을 전부 다는 아니지만 확인할 수 있다. 한강의 자취는 물길 따라 올라가면 나온다. 너럭바위가 끝나는 상류의 두 물줄기가 합해지는 지점에 있다. 물에 잠겨 있는데 두 손으로 손가락이 겹치도록 만든 동그라미 크기로 암반에 구멍이 뚫려 있다.

 

켜켜이 사람이 깎아낸 흔적이 뚜렷한데 한강을 위하여 일산을 꽂았던 자리라 한다. 그러나 말처럼 오목한 말구유함안군수 정아무각자는 찾았지만 볼 수 없었다. 아마 별천계곡 들머리여서 큰물이 지면 양쪽에서 바위가 통째 굴러내릴 정도였기에 옛 자취가 흐트러지고 깨어지거나 닳아서 그렇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정구를 기려 바위에 새긴 각자는 올라가는 오른편 산기슭에서 찾을 수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과 계곡 너럭바위가 만나는 언저리에 위에서부터 송와처사(松窩處士) 빗돌과 여강재(艅岡齋=양천재) 재실이 나란히 있다.

 

빗돌 뒤편에는 한강장구지소(寒岡杖屨之所)’ 각자가 머리 높이에 물기에 축축한 채 있었고 재실 뒤편 오른쪽 두세 길 높이 움푹한 데에는 다른 각자들이 모여 있었다.

'한강장구지소'와 '지군 채인 오횡묵' 등이 새겨져 있는 각자바위.

오횡묵이 본 대로 양천(陽川)’, ‘선생지풍 거사지락 백년심취 천추유적(先生之風 居士之樂 百年深趣 千秋幽蹟)’, ‘이문갑(李文甲)’·‘조원(趙瑗)’·‘이용탁(李容鐸)’ 등이다.(오른편 바위에는 생원 김한종(生員 金漢鍾)’과 아들 넷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오횡묵 일행이 새긴 글자는 어디에 있을까? ‘한강장구지소(寒岡杖屨之所)’에서 두세 발 떨어져 지군 채인 오횡묵(知郡 茝人 吳宖默)’, 다시 두세 발 떨어져 진사 김인길(進士 金寅吉)’ 다시 또 두세 발 떨어져 구민소(具敏邵)’·‘유치영(柳致永)’이 새겨져 있다.

 

오횡묵이 가장 크고 김인길이 다음이며 구민소 등은 가장 작았다. 지군은 군수를 뜻하고 채인은 오횡묵의 호였다. ‘김인길은 오횡묵의 지인인 석성의 본명이며 아전인 구민소 옆의 유치영은 오횡묵이 부렸던 민간인 심복이다.

지군 채인 오횡묵 각자. 지군은 군수를 뜻하고 채인은 오횡묵의 호이다.
진사 김인길.
구민소 유치영.

여강재 앞 물가 커다란 바위도 후세 사람들이 한강에게 헌정한 유적이다. 한가운데에 경현대(景賢臺)’ 세 글자가 희미하게 적혀 있다. 조석제(趙錫濟, 1848~1925)가 오횡묵 이후인 1905년에 경현대서(景賢臺序)’를 썼고 이를 조건부 씨가 2010<여항산-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향토지>에 담고 한글로 옮겼다.

 

드문드문 사연을 가져오면 이렇다. “190499일 선생에게 제사를 지내 존경하고 사모하는 정성을 나타냈고 고을 장로들이 선생의 장구지소에 특별히 경현대 석 자를 새겨 오랜 세월 읽을 수 있고 없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뜻을 표현하였다.”

경현대.
경현대 각자.

별천에 남겨진 정구와 오횡묵 등의 유적은 몇몇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 가장 크게는 송와처사 빗돌과 여강재 재실을 다른 데로 옮기는 것이다. 문중과 가문이 관련되어 있고 어쩌면 해당 토지에 대한 재산권도 문제가 될 수 있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원형을 기준으로 보자면 지금 그대로는 맞지 않다.

 

원래는 계곡을 이루는 너럭바위의 한 부분이었는데 여기에 재실과 빗돌을 세우느라 토석으로 기초를 쌓는 바람에 원래 경관이 사라지고 말았다. 머릿속으로나마 별천계곡에서 이를 지우고 보니 시원하기가 세상에 비길 데가 없었다. 게다가 글자가 잘 보이도록 색을 입히고 내력을 소개하는 안내판까지 곁들여지면 금상첨화이겠다.

 

김훤주

 

## 2020년에 펴낸 책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도서출판 피플파워)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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