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사람이야기

경주, 그 친구

김훤주 2023. 2. 19.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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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라고 하면 나는 아득한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눈물 어리게 좋아했던 친구가 거기에 살고 있었다. 경북 월성군 건천읍 용명1. 나는 문학소년이었으나 간이 작아서 문학반에 들지는 않았다. 반면 그 친구는 문학반 태동기의 당당한 멤버였고 2학년 같은 반이 되었을 때는 태동기에서 시를 잘 쓰는 친구로 우뚝 꼽히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그때 우리 반은 참 별났다. 모두 50명 남짓이었는데 화가, 사진작가, 시인,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연극배우, 가수 지망생이 숱하게 많았다. 현직 건달 또는 건달 지망생 대여섯까지 더하면 스무 명가량이 학교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다. 나도 그 친구도 그랬다.

 

친구는 웃는 모습이 기막히게 멋졌다. 웃으면 자그마한 눈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눈꼬리가 처지면서 얇은 입술은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갔다. 크게 소리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나는 그 조용함이 무척 좋았다. 약간 노안이었으나 그게 또 그 웃음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친구가 무조건 좋았다. 교실 뒷자리 책걸상에 걸터앉아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지금은 다 흩어져서 없지만, 다시 보면 같잖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때는 말 그대로 심혈을 기울여 쓴 시를 서로 보여주면서 이런저런 논평과 시론을 궁시렁거리곤 했다.

그 친구는 내게 조금 우상이기도 했다. 나의 문학은 학교는 물론 우리 반에서도 알아주지 않는 축이었지만 그 친구는 다른 여자학교 아이들과 함께 4인 공동 시화전까지 열 정도로 안팎에서 알아주는 학생 시인이었다그런데도 나대지 않았다. 그윽하고 차분한 눈길로 깊이 가라앉는 느낌이 그 친구에 대한 나의 이미지였다. 어쩌면 내가 그 친구 앞에서만큼은, 크게 표나지는 않았지만 많이 자주 열등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토요일 수업을 마치면 월성군 건천읍 용명1리 아버지가 하는 사과밭에 일하러 갈 때가 많았다. 그는 농부이기도 했다. 당시 세상은 농사를 천하게 여기는 분위기였으나 친구는 그런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부러 내세우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숨기는 기색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농부인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구러 방학이 되면 그 친구 시골집에도 한 번씩 갔다. 같이 사과밭 일을 한 것 같은 기억도 있지만 주로는 방문을 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에 날 새는 줄 모르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던 기억이 더 뚜렷하다어째서 그 어머니는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인지, 당신 아들과 판박이인 그 아버지의 소리 없는 미소만 머릿속에 그려진다. 두 살 아래 동생도 있었다. 마찬가지 그 친구와 거의 판박이였는데 형보다 오히려 좀 어른스러웠던 것으로 내게는 기억돼 있다.

 

우리는 술상을 차리고 놀았다. 그 친구는 술을 별로 즐기지 않아 술은 거의 내 독차지였다. 차가운 겨울밤 따뜻한 아랫목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즐거움을 나는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술상을 몰래 차린 기억은 없다. 어머니인지 아버지인지 술상을 내주셨고 그것을 멋쩍어하면서 받아들인 기억이 있다. “너무 많이 먹지는 마라하셨던 것도 같은데, 그렇게 가져온 술은 얼마 안 가 떨어졌고 그러면 깜깜한 밤길을 걸어서 술을 더 사러 갔다. 그 스산한 바람, 그 발부리에 차이는 자갈의 느낌, 두런두런 울리는 내 친구의 그 목소리란.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고등학교 졸업한 뒤에 서로 다른 대학에 갔다. 방학 때 한 번씩 만남은 내가 월성군 건천읍 용명1리 그 친구 집을 찾아가는 것으로 계속되었다. 내가 그 친구를 정말 좋아한 것은 틀림이 없는데 그 표현까지 적절했던 것 같지는 않다.

 

나는 학생운동을 하기 전에는 학교 성적을 갖고 잘난 척을 했고 학생운동에 들고 나서는 남들은 못 하는 학생운동을 한다는 식으로 잘난 척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것은 어쩌면 그토록 시를 잘 쓰는 그 친구에 대한 열등감의 노출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친구 입가에는 늘 넉넉한 웃음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감옥에 다녀온 뒤 공장에 들어갈 결심을 한 1986년 초봄 아니면 늦겨울이었다. 나는 호적에 이미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런 흔적이 없는 깨끗한 주민등록증이 필요했다. 나는 그 친구를 찾아가 내 결심을 남들이 들을세라 소리 낮추어 말하고는 주민등록증을 빌려달라 했다. 그 친구는 망설이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바로 주민등록증을 내주었다. 그리고 그해 8월 나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창원으로 왔다.

경주석빙고

그 이후 창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어쨌든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친구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다시 만나져서 그 친구가 나를 어떻게 보고 대하든 상관없이 나는 지금 이 감정이 달라질 리는 없다고 믿는다.

 

그런데도 나는 여태 그 친구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그 친구가 당시 어디 살았는지 알기 때문에 찾으려면 충분히 찾을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친구가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을 것 같았고 어쩌면 나를 미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다. 시인의 눈으로 봤을 때 공부 잘한다고 우쭐거리고 운동한다고 우쭐거리는 모습이 얼마나 시답잖고 같잖게 여겨졌겠는가. 마흔이 넘고 쉰에 가까워지면서 뒤늦게야 나는 알아차렸다.

 

주민등록증을 빌려 달라고 갔을 때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무슨 레닌보다 더한 혁명가나 되는 것처럼 굴었을 것이고 은근히 니는 이런 거 못 하지?’ 하는 냄새까지 풍겼을 수도 있다. 이런 자각이 들면서, 나는 도저히 부끄러워서 그 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친구가 아니야, 나는 그런 거 없었어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해도 그 앞에 설 용기가 없었다.

 

그 이후에도 나는 여러 차례 경주를 찾았다. 이런저런 유적과 문화재를 찾아 돌아다녔고 콘도나 호텔 같은 데서 하는 세미나나 학술발표회의 말석에 앉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친구가 늘 떠올랐다경주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표지판에서 건천이나 용명이라는 글자가 나오면, 짧은 순간이지만 호흡이 멎을 때도 있었다. 그 친구와 공유했던 그 꿈같던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이 여기에 있었고 그것이 지금은 내게 가슴 아린 슬픔이 되어 있다.

 

올겨울 햇볕 따사롭고 포근한 어느 날, 아는 선배 한 분이 경주 어디에서 북토크를 하는 일이 있었다. 내가 꼭 가야 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나는 갑자기 첨성대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고는 아무 생각 없이 경주로 향했다.

 

첨성대를 보고 월성 일대를 거닐면서 경주향교와 경주석빙고도 보았다. 경주가 경주인 것은 향교나 석빙고만 보고도 알겠더라. 그러고는 저녁 무렵에는 황룡사지를 찾아가 오래 거닐었다.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걷고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또 오갔다.

 

북토크에 가려고 나오면서 황룡사터는 해 질 녘에 남에서 북으로 걸으면 가장 느낌이 풍성하고 좋구나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앞서가던 내 그림자가 무척 길어져 있었다. 나는 내내 그 친구 생각을 했다.

 

김훤주

 

20221224일에 페이스북에 썼던 글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친구랑 연락이 닿아서 올해 18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포항이었는데, 친구 일하는 사무실에서 벽에 기대거나 앉은 채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죽도시장 한 횟집에서 소줏잔을 기울였고 찬바람 일렁이는 거리도 제법 걸었습니다.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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