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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김장하> <줬으면 그만이지> 이렇게 취재했다

기록하는 사람 2022. 12. 3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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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어른 김장하> 함께 취재한 김주완 김현지 인터뷰

 

<어른 김장하>를 연출한 MBC경남 김현지 PD, 또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를 함께 취재한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까지 함께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이번 다큐멘터리 취재를 함께 하신건가요? 두 분이서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현지 “제가 요청을 드렸습니다. 주인공이 인터뷰를 안하신다니 이 다큐를 현실화 하려면 누군가 키맨이 있어야 했는데 김주완 기자가 유일하게 김장하 선생에 대해 책을 쓰셨거든요. 원래 잘 알던 사이는 아니고 그냥 저 혼자 존경하는 선배님이셨기 때문에 배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구요. 너무 감사하게도 흔쾌히 승낙하셨습니다. 다큐 첫 기획은 2019년 초, 김주완 기자 섭외는 2021년 11월이었어요. 기획하고 2년 만에 출발하게 된거죠.”

-두 분이 만나신건 이렇게 된 거고, 그럼 각자 왜 김장하 선생에게 주목하게 됐는지가 궁금하거든요?

김주완 “저는 1991년 명신고등학교를 국가에 헌납한다는 얘기를 듣고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학교 헌납 자체에는 크게 감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냥 ‘부자가 좋은 일하네’ 정도였는데요. 그것보다도 인터뷰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런 부자가 자가용을 갖지 않고 자전거나 버스를 타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 그게 더 큰 감흥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때부터 궁금증을 갖게 됐고, 2015년 <풍운아 채현국>, <별난 사람 별난 인생>이라는 책을 쓰면서 이분에 대해서도 다시 취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김현지 “일단 현실에서 만나볼 수 없는 이야기잖아요. 판타지에 가까운. 한약방으로 돈을 어마어마하게 번다, 본인은 차도 없다, 대신 그걸 몽땅 기부한다, 근데 이걸 또 절대 알리지 않는다, 대통령이 불러도 안 나간다. 결정적으로, 아무도 취재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건 취재를 안 할 수가 없죠.”

 

왼쪽부터 김주완, 김장하, 김현지 @사진 강호진 촬영감독


-김장하 선생하면 한평생 남을 위해 살아오신 분으로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데요.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어떤 분이신지 소개부터 듣고 이야기를 풀어 나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주완 기자가 좀 이야기해주시죠.

김주완 “이번 취재과정에서 제 나름대로 계산해보니 스물 서너살 무렵부터 주변의 어려운 학생들을 돕기 시작해서 10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고요. 이분 장학금의 특징이, 장학금 전달식을 하고 사진을 찍고, 그걸 홍보하고 이런 걸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일회성으로 한 번 전달하고 마는 게 아니라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과 기숙사비, 생활비까지 지원한다는 거고요. 그리고 문화예술, 시민사회운동, 환경운동, 노동·농민운동뿐 아니라 여성운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단체와 사람을 지원했고요. 직접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차별철폐와 평등세상 실현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해 국가에 헌납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고요. 경상대학교 남명학관 건립, 남성문화재단을 통한 가을문예와 진주문화를 찾아서 연속 시리즈 발간 등, 거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일체 언론에 알리거나 드러내지 않고 해왔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인터뷰를 하지 않는 분으로 유명하다고 들었습니다. 두 분은 김장하 선생은 만나셨습니까?

김현지 “촬영에 들어가기 전 무작정 남성당 한약방에 전화를 걸었어요. 당연히 다른 직원이 받으실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김장하 선생님이 받으시는 거에요. 너무 놀래서 버벅버벅, 뭐라고 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엄청 긴장되더라구요. 바로 쫒겨날까봐. 선생님은 별 말씀 안하셨어요. 요새 말로 ‘오든지’. 그리고는 MBC경남 대표이사, 그러니까 우리 사장님하고 함께 찾아뵈었어요. 내년이 형평 100주년이고 하니 선생님과 형평운동 관련해 다큐를 만들고 싶다. 화를 내지도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허락도 안 하셨어요. 그냥 계속 그렇게 찾아뵌거에요. 막무가내로 치대는 거였죠. 제대로 ‘인터뷰 하겠습니다’ 하면서 마이크 채워드리고 조명 치고. 이렇게 하진 못했어요. 대신 선생님께 도움받은 분들을 약 30명 정도 인터뷰 촬영 했는데요. 우리 차선영 작가님이 섭외 하다가 ‘보이스피싱범’이라는 오해까지 받았어요. ‘김장하 선생님이 촬영을 허락했을 리가 없다, 이거 사기 아니냐.’ 그리고 그분들이 또 선생님을 만나러 오세요. 그럼 어떡해요, 우리도 촬영 해야지. 하다보니 함께 식사도 하고 댁도 찾아가고, 강호진 촬영감독님은 이제 촬영 다 끝났는데도 같이 산에 가세요. 그냥 그렇게 1년이 후딱 간 거에요.” 

김주완 “이분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분을 취재하고 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으로 나니까, 선생님이 참석하는 모임이나 식사자리에 일부러 저를 끼워주는 사람들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뷰는 아니지만, 그런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궁금한 부분을 물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죠. 그렇게 만난 게 10여 차례 정도 됩니다. 제가 그냥 무턱대고 찾아간 것도 서너 번 되고요.”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평생 번 돈을 기부를 하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학교부터 시작해서 시민사회로의 기부, 장학금…. 선생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라고 하더라고요?
 
김주완 “제 나름대로 계산해보니 1000명이 넘는 장학생에게 지급된 장학금만 30~40억 정도 됐습니다. 물론 이것도 선생이 밝히지 않으니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번 취재를 통해 추산한 겁니다. 그리고 국가에 헌납한 명신고등학교가 당시 시세로 110억, 남명학 연구 후원과 남명학관 건립에 13억, 남성문화재단을 해산하면서 경상국립대에 기부한 잔여재산 34억 5000만 원, 이렇게 굵직한 것만 계산해도 200억 원이 됩니다. 계산에 잡히지 않고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그것보다 훨씬 많겠죠. 물론 이것도 모두 당시 화폐가치로 그런 거고요. 지금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최소 서너 배는 되겠죠.”

-이번 다큐를 제작하면서 김장하 선생의 도움을 받은 분들도 많이 만나셨죠? 어떤 분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지?

김현지 “선생님이 살짝 보여주신 장학생 기록을 보면 흔히 말하는 지역의 수재들도 물론 많았지만 시골의 여중, 여상, 공업고등학교 재학생들도 그만큼 많았습니다. 등록금과 하숙비, 학원비, 하다못해 수학여행비와 전자계산기 구입비용까지 꼼꼼하게 챙겨 보내셨더라구요. 대학에 간 후엔 우편환으로 송금하신 영수증을 모아두셨는데 그게 그렇게 감동적이었어요. 그 바쁜 와중에 그 많은 학생들 앞으로 직접 우체국에 가서 하나하나 송금하셨다는 거잖아요. 근데 이걸 공개를 안하세요. 저희가 막 달라붙어서 찍으니까 스윽 접어 넣어버리시더라구요. 연출자로서 너무너무 아쉬웠습니다만 공개를 원치 않는 장학생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누군가 소외되는게 걱정되니까 그러시는 거거든요. 역시 형평주의자!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큰돈을 벌었지만 김장하 선생은 자신을 위해서 쓰는 일은 잘 없었다고 하던데요?

김주완 “자가용을 가지지 않고, 자녀 결혼식 때 청첩장을 돌리지 않고, 축의금을 받지도 않았고, 대통령의 초대나 무슨 교육상, 무슨 문화상 이런 상을 주겠다는 것도 거부하고, 그런 것도 많지만, 저는 선생님 가족이 살던 집이 가장 눈에 밟혔는데요. 남성당한약방이 문을 닫은 뒤, 이 건물 3층의 가정집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야말로 80년대 이후 한 번도 리모델링하지 않은 낡은 모습 그대로였고요. 화장실 변기에는 비데도 없었습니다. 도로와 접한 방 하나 외에는 창문도 없는 집이어서 마음이 참 짠했습니다. 올해 초 선생님은 그집을 나와 아파트로 이사를 했는데요. 제가 ‘이렇게 탁 트인 아파트로 오니까 어떠세요?’ 물었더니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우리 집사람이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제 좋은 집에서 호화롭게 살게 해주려고 마련했다.’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선생님이 말하는 ‘좋은 집’은 그냥 평범한 30평대 아파트였고요. 전혀 호화롭지도 않은 기본옵션 그대로인 집이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사는 아파트가 거기 비하면 호화롭죠. 부끄러웠습니다.”

-사실 나눔이나 봉사 라는 게 남에게 알리기 위해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김장하 선생처럼 이런 대가 없는 나눔, 간섭 없는 지원, 이렇게 하기란 쉽지는 않을 것도 같거든요. 김장하 선생을 취재하면서 선생의 이런 모습을 조금 더 가까이 지켜보면서 두 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주완 “취재 과정에서 김현지 피디는 만나는 사람마다 ‘김장하 선생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이라는 질문을 던졌어요. 방송용으로 뭔가 강렬한 한 컷을 건지려는 욕심이었는데, ‘생불’ ‘보살’ ‘의인’ ‘진정한 어른’ ‘이 시대의 예수’ ‘든든한 뒷배’ ‘시민운동의 비빌 언덕’ ‘호의(好義)와 경의(敬義)의 표본’ ‘남명 조식 선생 같은 분’ ‘모든 것을 품어주는 호수’ 등 다양한 표현이 나왔죠. 그런데 제가 가장 공감했던 표현은 ‘이 시대의 강상호 선생’이었어요. 대중적으로 강상호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방송용으로는 별로였겠지만, ‘호의호식할 수 있는 부자임에도 자신의 재산을 털어 세상의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 편에서 평등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앞장섰다’는 점에서 가장 닮은 두 사람이었습니다.”

김현지 “선생님이 그러셨거든요. ‘칭찬도 욕도 하지 말아 달라. 평가하지 말아라. 그냥 봐 달라.’ 그래서 그냥 ‘각자의 김장하’를 이야기하는 것만 하자. 그러려고 최선을 다했어요. 초반엔 외로우셨겠다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저렇게 흠 하나 없이 살려면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 엄격해야겠어요. 사회가 해야 할 일들을 선생님이 혼자 짊어지고 오셨으니까 참 힘드셨겠다. 근데 남성당 문 닫는 날 가족분들이 다 모이셨는데 너무나 화목한거에요. 아, 이렇게 훌륭한 분에게 이런 마땅한 복이 주어져서 정말 다행이다, 감사하다 느꼈죠. 또 이 분을 닮고 싶은 다른 작은 영웅들에게 용기가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이번 다큐를 통해서 장기간의 취재를 토대로 자연스럽게 담긴 김장하 선생의 모습은 지금껏 어느 언론에서도 담아내지 못한 장면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모습들을 볼 수 있는지?

김현지 “선생님 엄청 무섭다, 말씀이 없으시다 이런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의외로 굉장히 유머러스하세요. 적재적소의 유머로 다른 사람 웃겨 놓고 흐뭇해하시는 인간적인 모습 뵐 때 신기했죠. 게다가 야구 팬이셨더라구요. 그래서 ‘한 번도 화내는 것을 본 적 없다’는 주변 증언에 약간 의심이 갔습니다. 제가 아는 모든 야구팬은 언제나 조금씩 화가 난 상태기 때문에. NC가 포스트시즌에 아쉽게 탈락했을 때 직관 가시려던 걸 취소한 적이 있거든요. 선생님 트레이드 마크인 숨 막히는 침묵 후에 ‘안 보면 그만이지. 내년에 또 보지.’ 하시길래, 아, 선생님도 결국 야구팬이시구나 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의 단상을 보면 정말 ‘어른다운 어른이 없는 사회’라는 탄식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번 다큐가 시청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됐으면 하는지 마무리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김현지 “김장하라는 큰 어른이 하신 모든 업적을 한두시간 방송에 다 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구요. 대신 세상 모든 사람이 김장하라는 분의 삶의 태도에 대해 알게 하는게 연출자의 목적이라면 목적입니다. 함부로 평가하지 않고, 나눌 수 있는 것들을 나누고, 평범한 삶을 사랑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내년이 형평운동 100주년인데 김장하 선생님이야말로 형평정신 그 자체거든요. 이 다큐를 통해 김장하 선생과 형평의 정신이 널리 퍼져 내년엔 좀 더 아름다운 공동체로서의 대한민국이 되길 바랍니다. 그게 허락도 없이 만든 이 다큐로 선생님께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 같습니다.”

김주완 “이번에 책도 함께 나왔는데요. 다큐와 책을 보면 저절로 자신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되돌아보게 될 것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좀 더 멋지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봅니다. 또한 그렇게 선순환이 되면 공동체가 더 아름다워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어른 김장하>를 연출한 MBC경남 김현지 PD, 또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를 함께 취재한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였습니다.

 

<엠비씨경남 라디오 '뉴스와 음악사이' 2022년 12월 30일 오후 6시 30분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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