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사람이야기

'줬으면 그만이지' 어른 김장하 어떻게 취재했나(대구엠비씨)

기록하는 사람 2023. 1. 3.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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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40에 사학재단을 만들고 고스란히 국가에 헌납한 사람, 
평생 차도 없이 걸어다니고 버는 족족 남을 위해 퍼주면서도 
절대 인터뷰는 하지 않는 미스터리한 한약방 주인
대체 누구를 묘사하는 걸까요?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경남 진주에선 이 분을 모르는 이가 없다는데요.
이 시대 살아있는 의인, 어른으로 통하는
경남 진주의 은둔형 기부자 김장하 선생에 대해
오늘 이 시간 알아보고자 합니다.
최근 경남MBC에서 제작된 다큐와 책을 통해
김장하 선생을 직접 취재한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를 연결해 
그 취재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경남 진주에선 많이 알려진 분이라고 하지만 우리 지역에선 사실 잘 알려진 분은 아닌데요. 먼저 김장하 선생이 대체 어떤 분이신지 설명을 좀 듣고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19살에 한약업사 시험에 합격해 스무 살부터 한약방을 운영해온 분이고요. 한약방에서 번 돈으로 스물 서너 살 무렵부터 주변의 어려운 학생들을 돕기 시작해서 10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고요. 이분 장학금의 특징이, 장학금 전달식을 하고 사진을 찍고, 그걸 홍보하고 이런 걸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또 일회성으로 한 번 전달하고 마는 게 아니라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과 기숙사비, 생활비까지 지원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문화예술, 시민사회운동, 환경운동, 노동·농민운동뿐 아니라 여성운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단체와 사람을 지원했고요. 직접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차별철폐와 평등세상 실현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00억이 넘는 돈을 들여 고등학교를 설립해 7년간 운영하다가, 학교가 기반을 잡자 아무 조건 없이 국가에 헌납하신 분입니다.
또 경상대학교 남명학관 건립, 남성문화재단을 통한 가을문예와 진주문화를 찾아서 연속 시리즈 발간 등, 거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한약방 3층 낡은 집에 살면서 평생 자가용 승용차를 갖지 않고 자전거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다녔고요. 그리고 이런 일을 일체 언론에 알리거나 드러내지 않고 해온 분입니다.”

 

김장하 선생과 인사하는 김주완 기자 /촬영 강무성


-그럼 기자로서 김장하 선생에 대해 처음 관심(호기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처음 이분을 알게 된 것은 1991년, 31년 전인데요. 그 당시 시세로 110억 원에 달하는 명신고등학교를 국가에 헌납한다고 할 때였습니다. 사실 처음에 학교 헌납 자체에는 크게 감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냥 ‘부자가 좋은 일 하네’ 정도였는데요. 그것보다도 인터뷰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런 부자가 자가용을 갖지 않고 자전거나 버스를 타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 그게 더 큰 감흥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언론과도 인터뷰를 거절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요. 지금까지 자신의 선행이 알려지는 걸 극도로 꺼리는 분이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궁금증을 갖게 됐고, 언젠가는 이분을 꼭 취재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제 기자인생의 지표로 이분을 생각하며 살아왔고요. 2015년 <풍운아 채현국>이란 책을 쓰고, 또 <별난 사람 별난 인생>이라는 책을 쓰면서 이분에 대해서도 다시 취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마흔에 학교를 설립한 게 좀 믿기지 않는 것 같아요. 드라마 제목처럼 ‘재벌집 막내아들(?)’이었나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김장하 선생은 그 젊은 나이에 어떻게 부를 축적하신 건가요?

“이분은 1944년생인데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도 겨우 졸업한 분입니다. 고등학교 진학도 못하고 집에서 아버지 농사일을 거들다가 할아버지의 소개로 삼천포라는 곳의 한약방에 머슴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요.
그때부터 좀 남달랐던 게, 한약방에 배달되는 신문을 꼼꼼히 읽었고, 한약 일을 열심히 배우고 공부했다고 합니다. 밤에 불을 켜고 공부하다가 한 방에 자는 다른 머슴들에게 구박을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1962년 신문에서 한약업사 자격시험 공고를 보고 응시해 합격했고, 합격하고 보니 미성년자라 1년을 기다렸다가 다음해 1963년 자격증을 받아 한약방을 개업했는데, 금방 명의로 소문이 났고, 약값을 워낙 싸게 받는데다 그 약을 먹으면 정말로 효험이 있어서 전국에서 손님이 찾아오는 바람에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합니다.
실제 인근의 다른 한약방 원장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분의 한약방은 하루에 400제에서 500제의 약을 지었는데, 그렇게 치면 한 달에 순수익만 1억원, 10년이면 100억이 넘는 돈을 벌었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김장하 선생이 나이 40에 사학재단을 설립하셨던 그 과정에 대해서 취재를 하셨죠? 어떻게 명신고등학교라는 학교 설립을 하시게 된 건가요?

“1984년 그분 나이 마흔에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했는데요. 그 당시 진주의 고등학교 연합고사에서는 매년 5000여 명이 낙방했다고 합니다. 학생은 많은데 수용할 학교는 모자라던 시절이었죠. 그래서 김장하는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배움터를 마련해 줘야겠다’고 생각해 학교를 설립하게 됩니다. 자신이 못 배운 한을 후배들도 가져선 안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렇게 해서 그때까지 번 돈을 전부 쏟아부어 학교를 설립하게 됩니다. 그때 설립한 학교는 진주에서 최신식 시설에다가 당시만 해도 다른 학교에는 없었던 에어컨까지 설치했고, 교사와 학생들에게 최고의 복지와 교육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또, 1989년 전교조 사태로 전국에서 1500여 명의 교사들이 무더기로 해직당할 때도, 이 학교는 단 한 명의 해직교사가 나오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고요. 사학재단에 흔히 있었던 돈을 받고 교사를 채용한다든지 그런 각종 사학비리가 전혀, 단 한 건도 없었던 학교였습니다.”

-그런데 또 설립 7년 만에 학교를 국가에 헌납하셨어요. 조건 없이 고스란히~ 그러신 이유가 있을까요?

“학교를 헌납할 때 이분은 한 말씀은 이랬습니다.
‘내가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번 돈으로 설립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고, 공공의 것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립화요, 그것이 국가헌납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명신고등학교 본관과 독립도서관 건물


-학교 설립 전에도 경남 진주의 많은 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얼마나 많은 학생들에게 얼마나 장학금을 지원하신 건가요?

“취재를 통해 제 나름대로 계산해보니 1000명이 넘는 장학생에게 지급된 장학금만 30~40억 정도 됐습니다. 물론 이것도 선생이 밝히지 않으니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번 취재를 통해 추산한 겁니다.
장학생 중에는 지금 헌법재판관으로 있는 문형배 판사도 있고, 서울대 자연과학대 학장으로 있는 이준호 교수, 일본 사이타마대학교 우종원 교수, 그 외에도 수많은 판검사, 변호사, 외교관, 고위관료 등이 있지만, 그렇게 알려진 사람들보다 공고, 상고, 지방대학교 출신들이 더 많았습니다.
성적보다는 가정형편을 우선으로 장학생을 선발했기 때문인데요. 특이한 것은 일회성으로 한 번 장학금을 전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심지어 재수를 하게 되면 재수하는 동안 입시학원비와 하숙비, 생활비도 지급하고, 심지어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비나 책값, 심지어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을 쓰면 학위논문 인쇄제본비까지 지원했습니다.” 

-그렇게 학생들에게 학비며 생활비까지 퍼주면서 자신을 위해선 무엇을 하셨을까 궁금한데요. 보통 돈을 벌면 응당 가게를 늘리고 좋은 시설에 좋은 환경으로 꾸미고자 할 텐데, 김장하 선생의 한약방은 70년대 문을 연 그 모습 그대로라고요?

“본인은 평생 자가용을 갖지 않고 자전거나 버스를 타고 다녔다는 건 앞에서도 이야기했고요. 작년 5월에 한약방을 폐업한 후 그분이 살던 3층 가정집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80년대부터 한 번도 리모델링하지 않는 낡은 모습 그대로였고요. 요즘은 웬만한 집에 다 있는 화장실 비데도 없고, 심지어 1층 화장실은 양변기도 없이 쪼그려 앉아 볼일을 봐야 하는 그런 모습이어서 제가 마음이 참 짠했습니다.
한약방을 폐업하면서 선생님은 그 집을 나와 아파트로 이사를 했는데요. 제가 ‘이렇게 탁 트인 아파트로 오니까 어떠세요?’ 물었더니 뭐라고 했냐 하면요. ‘우리 집사람이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제 좋은 집에서 호화롭게 살게 해주려고 마련했다.’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선생님이 말하는 ‘좋은 집’은 그냥 평범한 30평대 아파트였고요. 전혀 호화롭지 않은 기본옵션 그대로인 집이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사는 아파트가 거기 비하면 호화롭죠. 부끄러웠습니다.”

 

김장하 선생의 새 아파트. 그냥 평범한 30평대 아파트였다. /촬영 강호진


▶방송정보(5초) 인서트 
한약방에서 번 돈을 사회에 기부한 경남 진주의 은둔형 기부자 김장하 선생,
30여 년을 뛰어넘어 김장하 선생을 취재한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와 이야기 나누고 있습니다.

-김장하 선생이 경남 진주에선 많이 알려졌다고 하지만,  사실 전국적으로 대중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아닙니다. 평소에도 노출되는 걸 싫어하시고 언론 인터뷰는 절대 하지 않는다는데, 어떻게 취재하신 건가요? 

“사실 이번 취재는 주변 사람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결정적이었는데요. 이분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이분에 대한 취재와 기록이 꼭 필요하다고 지지를 해주셨고요. 저희가 이분을 취재하고 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으로 나니까, 선생님이 참석하는 모임이나 식사자리에 일부러 저를 끼워주는 사람들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정식 인터뷰는 아니지만, 그런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궁금한 부분을 물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죠. 그렇게 만난 게 10여 차례 정도 됩니다. 제가 그냥 무턱대고 찾아간 것도 서너 번 되고요.그리고, 본인 말고도 100명이 넘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중에서 방송 다큐 제작과정에서는 30여 분을 인터뷰했고요. 제가 쓴 책에서는 60여 명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번 취재를 하시면서 김장하 선생님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까?

“방송에서는 세세한 모든 것을 담을 수 없으니까 이분이 살아온 삶의 태도와 큰 줄기를 다루는데 집중했고요. 책에서는 좀 더 이분이 왜? 어떻게 이렇게 살아왔는지, 그 배경과 바탕에 깔린 철학, 기질 이런 것까지 취재해서 다뤘는데요.어쨌든 그 과정에서 제가 알았던 것보다 훨씬 더 폭넓고 다양한 분야에까지 이분의 도움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특히 이분 나이가 79세, 우리 나이로는 80이잖아요? 그런 연세에 있는 분이 호주제 폐지라든지, 여성인권 문제, 가정폭력 문제에도 앞장서서 참여하고 아낌없이 지원했다는 사실을 이번 취재과정에서 알게 되어 참 많이 놀랐습니다.”

-진주 시민들에겐 선생님의 남성당한약방과 김장하 선생이 어떤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까?

“경남 진주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존경하는 어른이고요. 한약방 종업원들 월급도 다른 한약방보다 세 배나 많았고, 한약방 옆 건물도 김장하 선생님 소유건물인데, 그 세입자에게도 월세를 30년 동안 한 번도 올리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이번 코로나19 사태 때는 월세를 깎아주기도 했습니다.그리고 학생들 장학금 뿐만 아니라, 주변에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남몰래 남의 눈에 띌까봐 아침 일찍 찾아가 슬쩍 돈을 건네주고 나오는 그런 분이었고요.
그런 이야기를 이번 취재과정에서 제가 알게 되어서, 선생님께 ‘그런 일이 있었다던데, 사실입니까?’ 하고 물어보면, ‘기억이 안 나’ 하거나 묵비권을 행사하는 그런 분입니다.” 

 

남성당한약방 건물. 이 건물 3층에 김장하 선생이 살던 가정집이 있었다.



-김장하 선생에게 학비를 받았던 장학생들, 일명 '김장하 키즈' 라는 분들에 대해 취재를 많이 하셨는데, 인터뷰 한 장학생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있었나요?

“당시 선명여상이라고, 실업계 고등학교 여학생이 있었는데요. 이 학생은 진주 인근에 있는 산청이 집이었어요. 진주에 있는 학교에 진학하긴 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하숙이나 자취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는데요. 김장하 선생이 그런 처지를 알고 그냥 자기 집에 딸처럼 데리고 살며 학교를 보냅니다. 그 학생이 자존심에 상처를 받을까봐 ‘입주가정교사’라는 명목으로 집에 들인 거죠. 그렇게 집에서 먹이고 재우고 용돈도 주고 고등학교를 마쳤는데, 대학입시에서 떨어졌죠. 그러니까 부산에 있는 입시학원에 보내 1년간 재수를 하도록 생활비까지 지원합니다.
그리고 성균관대 철학과에 1980년도에 입학하는데, 광주항쟁의 참상을 본 이 여학생이 바로 학생운동권이 됩니다. 3학년 말에 경찰의 수배를 당해 도망다니다가 4학년 때 구속돼 감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석방 후 선생님을 찾아와 ‘장학금을 받고도 제가 학교 졸업도 못해 죄송합니다’ 이야기 하니까 선생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도 있지만, 너처럼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이 더 훌륭하다.’ 이처럼 김장하 선생은 자신이 지원한 모든 사람이나 단체를 끝까지 믿고 기다려주는 모습을 보였다는 게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장학생들에게 김장하 선생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습니까? 

“내가 너에게 장학금을 줬으니 너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뭐 이런 말을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는 거죠. 항상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뭐 필요한 건 없냐’ 이렇게 묻기만 했을 뿐, 이래야 한다, 그러면 안 된다 이런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부를 벗어나 다른 길로 빠졌을 때도 끝까지 지지하고 응원하고 기다려주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장학생들 중에는 ‘내 부모님한테도 이런 지지와 응원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미래 교육을 위해 장학사업뿐 아니라 김장하 선생은 지역신문과 시민단체에 후원도 많이 하셨다면서요?

“‘지역 토호세력이 무서워하는 데가 있어야 한다’는 게 선생이 지역신문을 후원한 이유였는데요. 진주신문의 경우, 월 1000만 원씩 연간 1억 2000만 원을 10년 간 지원했습니다.
지역의 극단이나 놀이패 같은 문화예술단체, 시민단체 환경단체 여성단체 노동, 농민단체 등 진주에서 김장하 선생의 지원을 받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최근 방연된 다큐를 보면, 김장하 선생의 삶을 관통한 가치가 '형평' 이란 단어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 같던데요. 김장하 선생이 평생을 두고 얘기하신 형평과 평등에 대한 철학은 어떠하셨나요? 

“김장하 선생은 대부분, 뒤에서 표나지 않게 후원하고 지원했는데요. 유독 한 단체는 본인이 직접 나서서 그 단체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아 앞장서서 그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게 ‘형평운동기념사업회’입니다. 형평운동은 1923년 경남 진주에서 설립된 백정 해방운동, 신분타파 인권운동이었는데요.
선생님은 지금도 여성 차별, 장애인 차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별, 서울과 지역간 차별과 같은 소수자 차별에 큰 문제의식을 갖고 차별 철폐와 평등세상 실현에 앞장섰죠.본인이 충분히 호의호식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내놓고 평등세상 실현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 김장하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매달 그분을 존경하고 따르는 후배들이 한 달에 한 번 그분과 함께 등산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또 선생님은 매일 사모님과 남강변에서 파크골프를 하고 계시고요.
사실 그분은 한약방에서 60년간 그 좁은 공간에서 일요일 하루만 쉬고 매일같이 갇혀서 일했던 거거든요. 제 개인적으로는 이제 60년의 감옥에서 벗어나 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좀 즐기면서 살았으면 좋겠는데요.
문제는 그분이 평생을 그렇게 너무 성실하게만 살아오신 분이어서 등산이나 파크골프 말고는 어떻게 즐기며 살아야 할지 그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도 합니다.”

 

책 <줬으면 그만이지>



-김장하 선생님을 취재하시고 최근 책을 내셨죠? 책 제목이 <줬으면 그만이지>던데 제목에 어떤 사연이 있습니까?

“그분의 삶이 딱 그겁니다. ‘줬으면 그만이지’, 아무런 보답도, 보상도, 반대급부나 심지어 고맙다는 인사치레도 바라지 않는 그런, 불교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 그 삶을 실천해온 분이 김장하 선생입니다.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갈등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너는 왜 안 해주느냐’,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너는 왜 나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 거냐’ 뭐 이런 데서 발생하는 거거든요.
김장하 선생이 살아온 삶은 ‘줬지만, 줬다는 생각도 없다’, ‘내가 꽃을 예쁘다’ 했다고 해서 꽃이 나에게 뭔가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딱 그런 삶을 실천해온 분이라 생각했고요.
실제로 이번 취재를 통해 찾아낸 김장하 선생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줬으면 그만이지’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장하 선생을 취재하면서 기자로서 느낀 점과 어떤 의미가 있다면?

“이번 다큐와 책을 본 사람이라면 저절로 자신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되돌아보게 될 것이고, 스스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좀 더 멋지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봅니다. 또한 그렇게 선순환이 되면 공동체가 더 아름다워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말씀 감사합니다.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와 말씀 나눴습니다.

 

#대구엠비씨 <여론현장> 2022년 1월 3일 오전 8시 35분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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