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점순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원 중환자실에 계시는데, 찾아뵈어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다. 몇 년 전 진동 애양원에 계실 때 두어 번 찾아뵈었는데, 그때도 나를 잘 알아보지 못하셨다. "김 기잡니다. 김 기자"라고 하자 그제서야 "아, 김 기자가~" 하며 반가워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927년생인 할머니는 올해로 만 93세가 되셨다. 열아홉에 진동면 곡안리로 시집와 스물둘에 아들 이상섭을 낳았으나, 이듬해 발발한 한국전쟁과 함께 남편 이용순과 아들을 한국군과 미군의 학살로 잃었다. 그때 남편은 스물네 살, 아들은 고작 두 살이었다. 남편은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불려간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상섭이는 8월 11일 미군의 곡안리 재실 학살 현장에서 잃었다. 시조부, 시어머니도 그때 학살되었다. 할머니 본인도 다리와 엉덩이, 팔, 목에 총탄과 파편을 맞고 간신히 살아나 평생을 불편한 몸으로 살아왔다.
같은 마을 이귀순 할머니도 마찬가지로 남편 황치영을 잃었다. 그때 할머니 나이 스물둘, 남편은 스물세 살이었다. 이웃에 사는 두 할머니는 그렇게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며 가족처럼, 친구처럼 살아왔다.
국가가 남편의 사망 사실을 공식 확인해준 것은 59년이 지난 2009년 2월 말이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 명단에서 '이용순' '황치영'의 이름을 찾아주었던 것이다.
두 할머니는 창원유족회와 나의 조력으로 2014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민간인을 영장 없이 체포하여 학살한 것은 불법이므로 재심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1, 2심을 거쳐 대법원에서 7년째 계류 중이다.
소송서류 준비를 위해 함께 면사무소를 찾던 당시만 해도 두 할머니의 생각은 뚜렷했다. 죽기 전에 남편의 '빨갱이 누명'을 벗겨 명예회복을 해놓고 저승에 가야겠다, 그래야 남편을 떳떳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며칠 전 곡안리 댁으로 찾아가 뵌 이귀순 할머니마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예전에 할머니 기사 신문에 냈던 김 기잔데, 기억 안 나세요?" 몇 번을 물어도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두 할머니뿐 아니다. 최근 출간된 <진주 민간인학살 유족 증언록>에 싣기 위해 인터뷰가 예정돼 있던 김태근 진주유족회 초대 회장은 미처 우리 채록팀을 만나기 전 홀연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렇듯 검찰이 항소와 상고를 거듭하고 법원이 미적거리는 사이 희생자의 동세대(배우자) 유족은 90대, 1세대(자식) 유족도 70~80대의 나이가 됐다. 검찰과 법원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이들 유족이 모두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7년 전 황점순 할머니가 소송서류를 준비하며 물었다. "김 기자, 이거 이래가 되기는 되것나?" 내가 답했다. "아이고 할머니, 걱정 마이소. 확실히 될 낍니다. 옛날과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아입니까."
결과적으로 내 말은 거짓말이 되어가고 있다. 달라지기는 개뿔! 법원과 검찰에 분노가 끓어오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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