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일본군 '위안부'와 민간인학살은 다른 사건이 아니다

기록하는 사람 2019. 11. 2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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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3년(1950년) 7월 15일 당시 보도연맹원 360명을 마산형무소에서 수감한 후 특히 부녀자들에게 능욕을 자행하고……산골에서 총살한 후 암매장했는가 하면 또한 선박을 이용하여 바다에서 살해수장하였던 것이다.”(1960년 7월 마산피학살자유족회가 국가를 상대로 낸 고발장)

“김영명(23) 씨는 미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인간 됨됨이로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던 교사였다. 지서장 김병희가 그녀의 미모를 탐내오다가 오빠를 빌미로 잡아가 강제로 능욕하고 학살해 버렸던 것이다.”(1960년 국회 양민학살조사특위 조사기록)

위에 인용한 글은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의 민간인학살 과정에서 공공연한 성폭행이 벌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게다가 아래와 같이 한국전쟁 당시에도 ‘위안부’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증언과 연구결과도 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보도된 기사. 

“전 매춘부의 증언, 한국정부는 미군 상대 성매매를 권장했다.”(2009년 1월 8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보도)
“한국군이 ‘고정식 위안소’와 ‘이동식 위안소’ 등을 설치, 운영했다.”(2002년 한성대 김귀옥 교수의 논문 ‘한국전쟁과 여성 : 군 위안부와 군 위안소를 중심으로’)

내가 이런 기록을 들추는 이유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민간인학살 문제가 별개의 동떨어진 문제가 아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지난 16일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대표 이경희)은 창원에서 국제회의를 얼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청년·청소년 활동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해 발제하고 토론했다.


내 걱정은 지금까지 살아계신 20명의 ‘위안부’ 피해할머니들과 1세대 운동가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이 운동의 맥이 이어질 수 있을까였다. 더구나 그 자리에 참석한 ‘청년·청소년’ 중 남성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전체 참석자 중에서도 남성은 토론자로 온 나와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 그리고 영상 촬영 담당 구자환 감독 등 세 명이 전부였다.

1999년 경남정대연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민간인학살을 '전쟁범죄'로 묶어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위안부’에 항상 따라붙는 ‘여성인권’이란 단어에서 ‘여성’을 떼어내고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보자”는 다소 도발적인 제안을 했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의 민족간 문제가 아니라 한국전쟁 등 모든 전쟁에서 벌어진 성범죄와 민간인학살 범죄를 ‘반(反)인권-국가폭력-전쟁범죄’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어 그 피해자와 운동가들이 함께 연대하고 공조할 방법을 고민해보자는 말이었다.

그러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제의 각종 대량학살 사건은 물론 나치의 홀로코스트,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등 인류 최악의 인권유린 범죄들과 함께 연대할 길이 열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경찰과 우익인사들에게 학살당한 김해 진영 강성갑 목사 흉상 제막식 1954년

앞서 예로 든 김영명 교사 성폭행·살해는 김해 진영 학살사건이다. 이때 함께 학살되었던 김해 한얼학교(현 한얼중학교, 진영여중) 설립자 강성갑 목사에 대한 학술세미나가 29일 오후 4시 진영문화센터에서 열린다. 내가 알기론 1954년 동상 제막식 이후 강 목사를 기리는 행사는 65년 만에 처음이다.

이런 자리에 그동안 ‘위안부’ 문제 해결에 힘을 보태온 여성운동가들도 참석하고, ‘위안부’ 관련 행사에도 민간인학살 피해자와 운동가들이 참석하여 동병상련의 아픔을 함께 나눴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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