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형 작가/대한민국에서 즐겁고 재미있게 사는 여성들

제6화. 한영미, 언니네텃밭은 어떻게 성공했을까

기록하는 사람 2019. 5. 14.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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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재미있고 즐겁게 사는 여성들 제6화. 한영미, 토종민들레 포자되어 


1990년대 여대생 K가 농활을 갔다. 그 마을에서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한 여성이 자살했다. 동네에서는 전후 사정을 잘 알았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곧 동네 아주머니들이 죽은 여성의 남편에게 말했다.

“애가 있으니 빨리 새장가 들어야지.”

K는 마을 사람을 보면서 전의가 불타올랐다. 그리고 다짐한다.

‘내가 부녀회장이 돼서 마을을 바꿔야겠다!’

농촌은 자연을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곳이면서 가부장성, 폐쇄성이 선명한 곳이기도 하다. 몇 해 한 여성 활동가 Y가 강연에 나와 귀농 여성들이 농촌 마을을 바꾼 운동사례를 소개했다. 3.8 여성의 날, 마을 여성들이 동네 냇가에 모여서 북과 장구를 치며 놀았다. 오후 5시 30분에 행사를 개최한 이유는 간단했다. 

“저녁밥을 못 짓게 하려고!”

객석을 가득 메운 젊은 여성들은 손뼉을 쳐댔다. Y는 농촌 마을에 성추행과 성폭력 문제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를 불편해하고 못마땅해 한 남성 한 명이 ‘쌍년’이라며 욕설을 내뱉었다. 마을 여성들은 ‘쌍년파티’로 응답했다. 객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여성주의(페미니즘)를 문화 예술적으로 즐겁게 녹여내었기에 기발했지만, 현재 농촌 여성들 대다수가 노년인 것을 고려하면 보편적으로 권장할 수만은 없는 방법이다. 농촌 맞춤형 여성운동이 있다면 여성 농민으로서 정체성을 느끼게 하고, 경제적인 자립에도 보탬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언니네 텃밭’은 눈길을 끌었다.

이 운동에서 핵심인 언니들은 60~80대 농촌 여성이다. 언니네 텃밭 운동은 충북 음성, 경북 상주 등 여러 지역에서 벌어진다. 필자는 2009년에 출범한 강원도 횡성오산지역 언니네 텃밭 공동체를 찾았다. 처음 시작부터 함께 했던 한영미 씨를 만났다.  

86학번 한영미 씨는 대학 시절 농민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남편은 1990년부터 강원도 횡성에서 농민운동을 하고 있었다. 1992년 결혼한 한 씨는 횡성에 정착했다. 

강원도 농촌 마을은 1970년대에 머무른 듯했다. 강원도 할머니들은 돼지고기를 빼면 슈퍼에서 사 먹는 게 별로 없다. 할머니들은 텃밭에 고추, 옥수수, 감자, 호박 등을 심고 두부, 장아찌 등 반찬은 대부분 만들어 먹었다. 칼국수와 만두를 손수 만드는 할머니도 많았다. 장날이 되면 할아버지는 아침에 리어카에 들깨 한 말(6kg),  콩 한 되(1.4kg), 고추 등을 싸서는 버스정류소까지 가져다준다. 할머니는 버스에 그 짐을 실고 장으로 간다.

버스 안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차창 풍경을 보며 추억을 떠올린다. 강원도에 쌀이 없어서 못 먹었던 이야기, 자녀들 학교 다닐 때 차비 꾸러 다닌 이야기, 그 빚은 산나물을 팔아서 다 갚았다는 이야기들이 오고간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할머니들은 하루 종일 노상에 앉아 장사를 하다가 막차를 타고 집으로 온다.

한 씨 부부는 논밭농사를 했지만 생계유지가 쉽지 않았다. 자연재해, IMF 여파로 치솟은 기름값, 농산물 가격 경쟁 등으로 빚만 늘었다. 가끔 방문한 친정어머니는 빈곤한 살림을 보고 딸과 손자를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채 돈만 찔러 주고 갔다. 

강원도에서는 농민운동도 어려웠다. 군청 내무부는 한영미 씨 부부 동향을 주시했다. 부부는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 한 씨는 동네 부녀회 가입조차 쉽지 않았다. 이상을 펼치기에 현실이 적합하지 않다면 다른 선택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가장 손쉬운 결정은 도시로 이사 가는 것이다. 그런데 한 씨는 그대로 머무르는 것을 택했다. 그는 하늘 아래 이렇게 할머니가 많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하는 농촌에서 어떤 희망을 보았을까? 

한영미 씨에게 전환점이 있었다. 2002년 횡성에 여성농업인센터가 들어선 것이다. 센터 대표였던 한영미 씨는 새로운 사업을 마음껏 시도해볼 수 있었다. 

그 중에 필자 눈길을 끈 것은 바로 2005년경부터 ‘할머니들’을 주목하는 사업들이었다. 여성농업인센터는 조사단을 꾸려 할머니들이 보관하는 씨앗을 찾는 사업을 착수했다. 씨앗을 한 해 건너뛰고 심으면 싹을 틔울 확률이 떨어진다. 그래서 씨앗을 받아 또 심어야 한다. 

농민들은 보통 농업기술센터에서 보급하는 종자를 심었다. 그래야 쌀처럼 수매가 되기 때문이다. 농민들도 어떤 작물을 재배해 돈을 만진 농민이 있으면 그쪽으로 우르르 따라갔다. 그런데 할머니들은 달랐다. 경험상 맛이 좋거나 자식들이 좋아하면 씨앗을 받아 다시 심었다. 10년 20년 토종씨앗을 지켜오는 데는 다들 사연이 있었다.

어떤 할머니 집 앞마당에는 토종 노란 민들레가 유난히 수북했다. 서양 민들레는 꽃받침이 아래로 처지는데 토종 민들레는 위로 곧게 뻗어 있다. 이 할머니 집에 토종 민들레가 많은 까닭은 뭘까. 할머니는 어릴 적 부모님을 일찍 여의면서 식모살이를 했다. 옛날 부잣집 밥상에는 초무침 한 민들레를 올리곤 했다.

식모살이하는 아이는 민들레 무침조차 부러웠다. 밭둑에 흔하던 토종 민들레는 농약을 치면서 사라졌다. 식모살이하던 아이는 결혼하며 시골에 정착했다. 어느 날 무심코 마당을 보니 무엇인가 바람에 날려 와 꽃을 피웠다. 자세히 보니 토종 민들레였다. 할머니는 민들레 씨앗이 마당에 퍼져 뿌리내리도록 관리했다. 곧 토종 민들레는 밭을 이뤘다.

여성농업인센터는 강원도 할머니들에게 음식을 전수받는 사업도 진행했다. 시행착오를 몇 번 거듭하다가 할머니들이 만드는 두부에 도전했다. 여성농민회와 한살림 등이 출자해 영농조합법인 ‘텃밭두부공장’을 설립했다. 그리고 체험 행사 등을 통해 두부 판매에 나섰다. 열정적으로 홍보했지만 실적은 처참했다. 두부공장도 개점휴업상태가 됐다. 한영미 씨는 당시 가공식품 유통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돌이켰다. 

2007년 한영미 씨는 여성농민회 정책위원장이었다. 당시는 식량 주권 바람이 불던 시기였다. 식량 위기 시대에 도시와 농촌이 함께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한영미 씨는 회의 때마다 식량 주권을 설명하면서 ‘두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여성운동단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국여성연대가 택배로 두부 주문을 시작했다. 그리고 여성농민회가 식량주권사업 중 하나로 고민했던 ‘제철 꾸러미’가 두부와 결합했다. 쥐이빨옥수수처럼 토종 씨앗으로 재배한 농산물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제철 꾸러미 택배’라는 전체적인 그림이 완성돼 갔다. 이 사업을 나중에 ‘언니네 텃밭’이라고 부른다. 

여성농민회 조직은 제철 꾸러미 사업을 전국 규모로 키웠다. 김제와 상주 봉강마을이 참가했다. 제철 꾸러미가 인기를 끌고 수요가 많아지면서 사업을 마을 단위로 분양하기 시작했다. 한영미 씨도 마을로 돌아가 ‘꾸러미공동체’를 만든다. 50~70대 여성 6명이 언니네 텃밭 꾸러미 사업에 동참했다. 생산 계획을 함께 세우고, 꾸러미 물품 회의를 하고, 주 1회 꾸러미 작업을 같이한다. 그렇게 만든 꾸러미 안에 물품을 소개하는 편지를 넣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이 언니들에게는 어떤 변화가 찾아들었을까? 한영미 씨 동네에는 사는 70세 여성이 풀어놓은 삶을 그대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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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75년 25살에 횡성으로 시집왔다. 당시 빈곤하여 꽁보리밥과 감자를 먹고 연명했다. 
  
26살 첫 아이를 낳고 보니 앞날이 막막했다. 일년 농사를 지어도 면사무소에 대출금을 내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가 불쌍해 차마 도망갈 수도 없었다.

우리 부부는 자식에게 빚은 물려주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훗날 자식에게 빚 때문에 못 산다는 말은 듣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사장에 가도 뭐 하나 사 먹는 데 돈을 쓰지 못했다. 우리 부부는 매일 새벽에 나가서 어두워져야 집에 들어왔다. 남에게 땅을 얻어 고추 농사를 지었다. 밭을 가느라 성인 남자 일당을 주고 빌려 쓰던 소를 한 마리 사서 여섯 마리까지 늘렸다. 소를 팔아 젖소를 샀고 우유를 팔아 자녀를 대학까지 가르쳤다. 55세를 넘기자 힘에 부쳐 젖소를 정리하고 담배, 복분자 농사로 바꿨다.

우리 옆집에는 외지에서 온 한영미 씨 부부가 살았다. 한영미 씨는 우리 부부를 목장 아줌마, 목장 아저씨라고 불렀다. 군청에서는 우리 집에 전화해 한영미 씨 부부에 관해 묻곤 했다. 한영미 씨 부부 인심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당시 동네에는 차가 있는 집이 없었다. 한영미 씨는 아픈 어르신이 있으면 병원에 태워주고 장날에도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부부는 농민 시위에 자주 간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TV에서 농민이 데모하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생각했다.

‘한 번쯤 사람들이 북 치고 장구 치면서 데모하고 전경들이 에워싸 있는 것을 구경하고 싶다.’  

한영미 씨는 횡성에서 농민회 시위가 열릴 때 구경하고 싶은 동네 여성들을 트럭에 태워 데려갔다. 우리는 한쪽 구석에서 시위 구경을 했고 떡도 얻어먹었다. 내가 환갑이 넘자 한영미 씨가 제안했다.
  
“횡성 여성농민회에서 언니네 텃밭 꾸러미를 하는데 한 번 구경 가자.”  

가서 보니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소젖도 짜고 담배 농사도 지었는데 그것 못하나 싶었다. 한데서 뜯거나 집에서 키운 것을 깨끗하게 무게 달아 봉투에 담아 보내는 것은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하면서 한 달에 한 번 통장에 입금되는 게 좋았다.  

다달이 들어오니까 영농자금을 빌려 쓸 필요가 없었다. 그걸로 용돈 쓰면 되니까. 남편 통장과 내 통장 모두 내가 다 관리하지만 내 통장에 돈이 들어오니까 기분이 달랐다. 내 통장에서 돈을 턱턱 꺼내 쓰니까. 농협에서 아줌마 통장에 돈이 많다고 하면 꾸러미 한 돈이라고 말했다.  

꾸러미 사업 참가자들은 반드시 여성농민회 회원으로 가입해야 했다. 여성농민회 교육 참석 조건도 마음에 들었다. 어디든 여성농민회 따라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해마다 8월 서울에서는 전국여성농민결의대회가 열린다. 처음 갔을 때는 남자들이 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들이 요구하는 것인데 이게 될까, 어쩔까 그랬다. 그런데 여성농민회가 대단했다. 밭 직불제도 되고 고추 딸 때 깔고 다니는 의자도 보조 사업으로 하고. 그러니까 재미가 붙었다. 외치고 나면 기분 좋고 오는 길에 놀고 그러니까.  

해마다 전국 언니네 텃밭 조합원 회의도 열린다. 낯익은 얼굴들을 보면 반가워서 끌어안는다. 올해 회의에서는 조합원에게 쥐이빨옥수수 씨앗을 나눠줬다. 청주 여성 농민에게는 쪽마늘 토종 씨앗을 얻어왔다. 여성농민회에서 주최하는 교육을 받으려 갈 때는 늘 신난다. 횡성에서 농사짓고 살면 어디 나가기가 쉽지 않다. 경조사 아니면 고작 시장가는 정도다. 꾸러미공동체를 시작하면서 놀 줄 알게 됐다. 우리 마을에는 꾸러미 회원이 7명이다. 조합원 생일날에는 생일을 맞이한 여성이 저녁을 산다. 그리고 공동기금으로 나머지 조합원들과 영화를 본다. 올해 꽃 피고 따뜻해지면 KTX를 타고 강릉으로 갈 계획이다. 농사를 평생 지었지만, 꾸러미가 가장 재미있다.   

내가 부녀회장이 된 후에 통상 당일치기 일정이던 부녀회 관광 관행부터 바꿨다.   

“일일 코스 말고 하루나 이틀 자고 오자. 여자들 밥하기 싫은데 돌아 댕기다가 해주는 밥 먹고 얼마나 좋아. 아침에도 씻기만 하면 밥 주고. 야, 가자!” 

(다음 마지막 회. 홍은정, 낯선 남성과의 몸싸움)

글쓴이 서형. seohyung2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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