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형 작가/대한민국에서 즐겁고 재미있게 사는 여성들

제5화. 1999년생 임예빈, 나는 시간을 잡는 소녀

기록하는 사람 2019. 2. 26.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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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즐겁고 재미있게 사는 여성들 제5화. 임예빈, 나는 시간을 잡는 소녀


나는 1999년생 임예빈이다. 엄마는 30대 중반 나를 낳고 이혼했다. 아빠가 엄마를 많이 때렸다고 한다. 엄마는 딸들을 데리고 부모님이 사는 완주 시골집으로 왔다.

유년 시절 내가 기억나는 장면은 두 가지다. 엄마가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잘 때까지 파리채를 살랑살랑 부쳐주던 장면이다. 눈을 떠보니 엄마가 보이지 않아 엄청나게 울었다. 다른 장면은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화를 내던 모습이다. 할아버지는 이혼을 엄마 탓으로 돌리곤 했다. 엄마는 부엌에서 흐느끼며 울었다.


엄마는 식당 일을 했다. 항상 밤 10시쯤 녹초가 돼 집에 들어왔다. 밥 먹었는지 확인하는 것 말고 깊은 대화는 없었다. 엄마와 어떻게 대화해야 할지 점점 알기 어려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사춘기에 접어들자 더욱 예민해졌다. 선생님에게 대들기도 했다.

중학교에 다니면서도 몸과 마음은 항상 지쳐 있었다. 어느 날 엄마는 상담을 받고 싶은지 물었다. 엄마의 배려로 유료 상담소에서 일주일에 한 번 상담하면서 안에 담아둔 이야기를 꺼내는 방법을 알게 됐다. 친구와 관계가 전보다 나아졌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고산시장 근처 버스정류장 앞에 ‘널리널리홍홍’이라는 가게가 생겼다. 친구들과 거기에 종종 들렀는데, 그 간판을 내건 이는 19년 연상인 장미경 씨다. 우리는 그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장미경 선생님은 길가에서 우리와 마주치면 이렇게 말했다.

“야, 학교 끝나면 와라. 치킨 시켜 먹자.”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릴 시간에 ‘홍홍’에서 놀았다. 당시 어울리던 친구 가운데 절반 정도가 전주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나머지 친구 네 명이 다시 뭉쳐서 ‘홍홍’에서 어울렸다. 

간식을 먹으면서 놀면 가끔 마음에 담아뒀던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우리는 장미경 선생님 고등학교 시절을 불러냈다. 장미경 선생님은 그 시절 친구들과 문학 동아리를 만들어 시를 낭독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잡지를 만들고 싶었는데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어느새 어른이 돼 버렸다고 했다. 그렇게 그날도 ‘홍홍’에서 한참 웃고 떠들다가 집으로 왔다. 밤에 불을 끄고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내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느껴졌다. 진짜 내 모습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생각, 생각,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스르르 잠들면서 꿈을 꾼다.

꿈속 누군가가 보인다. 그는 1980년생 장미경이다. 호기심이 느껴지면서 좀 더 그 시간으로 들어가 본다. 장미경 선생님 유년기는 집안 어른 눈치 보느라 늘 기죽어 있다. 가난한 집안 살림에 모두 고달파 보인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원망을 쏟아낸다. 그럴수록 엄마는 더욱 우울해 보인다. 미경이 8살이 되자 시골 마을로 이사했다. 부모님은 친척들과 식당을 열었다. 미경은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한 여성에게 관심을 보인다. 다들 그를 ‘김 양’이라고 부른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빨래터에 모여앉아 수군거렸다.

“어제 김 양이 잠옷 입고 논두렁 뛰어다녔대. 남자 생각나서 그런 거 아니겠어?”

사람들은 김 양이 젊을 적 술집에 있었다고 했다. 김 양은 빨래터 여성들과는 달랐다. 민소매를 입었고 손님들과 이야기하면서 깔깔 웃었다. 팔 동작도 컸는데 겨드랑이 사이로 털이 보인다. 어린 미경은 김 양을 더 알고 싶어 방에 들어가 본다. 문을 여니 담배 냄새가 확 풍긴다. 방 안에는 담뱃갑으로 만든 방석이 있다.

어느덧 미경은 초등학생이 됐다. 어느 날 엄마가 하굣길에 딸을 마중 나왔다. 비 오는 날에도 온 적이 없던 엄마가 화창한 날에 교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옆에는 큰 가방이 놓여 있다. 엄마는 중국집으로 딸을 데리고 갔다. 자장면을 사주면서 이런저런 당부를 했다. 딸 가방 안에 용돈도 넣어줬다. 딸은 배가 아픈 척 연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버스 시간을 놓치도록 시간을 오래 끌었다. 그날 밤 엄마와 손잡고 논두렁을 걸어서 집으로 왔다.

미경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근에 있는 대학교 연극영화과로 진학했다. 연극영화과 생활은 불행했다. 방과 후 선배에게 받는 기합은 지옥이었다. 미경이 살아온 길목에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린 기억들이 쌓여 있다. 하지만 빛으로 다가온 다른 기억들도 보였다.

유년 시절 미경에게 작은아버지는 날아 가버릴 순간을 붙잡아 소중한 추억으로 만들어줬다. 이들은 산책하다가 즉흥시를 짓곤 했다. 미경이 익은 감을 황금이 지는 해에 비유하자 작은아버지는 멋있다고 칭찬했다. 미경이 전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친구들끼리 시 창작 모임 결사대를 만들고 시나리오를 써보기도 했다. 그리고 잡지를 만들고 싶어서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기웃거렸다. 미경은 대학을 다니다 휴학하고 여행을 다녔다.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만난 한 여교수가 미경을 북돋아 줬다. 교수는 미경이 써낸 시나리오를 흥미롭게 읽었다.

대학을 졸업한 미경은 서울 영화판을 선택하지 않았다. 강압적인 분위기, 거친 현장, 강한 위계 문화가 맞지 않았다. 방송계 작가 일을 했지만, 한 주 단위로 빠르게 돌아가는 현장도 미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수록 어울리는 게 무엇인지도 뚜렷해지는 법이다. 수평적인 관계, 좀 느린 생활. 미경이 원하던 삶이었다.

2011년 완주에서 파머컬쳐대학에 등록했다. 귀농 귀촌한 청년들 정착을 돕는 프로그램이었다. 수업을 듣던 중 완주 미디어협동조합에서 제안했다. 공동체가 발간하는 신문 기자를 맡아달라는 것이다. 완주에 귀촌한 청년들이 취재를 담당했다. 그 후로 완주 토박이들을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완주 지역이 재미있게 다가왔다.

2013년 완주 고산 시장에 군 특성화 점포를 열게 됐다. 운영자로 미경이 지목됐고 그곳에 ‘널리널리홍홍’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우리가 장미경 선생님을 만난 그곳이다. 

하루는 장미경 선생님이 100만 원짜리 프로젝트를 받았다며 우리를 불렀다.


“뭐 해볼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다시 물었다.

“우리 다섯 명이 20만 원씩 나눠 가질까?”

우리는 장미경 선생님이 고등학교 시절 잡지를 만드는 게 꿈이었다는 것을 안다. 한 친구가 소녀들이 보는 뷰티 잡지를 만들자고 했다. 시골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은데 뷰티 잡지는 별로라는 의견도 나왔다. 결국, 어르신과 젊은이들 사이 세대 차를 이어주는 잡지를 만들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회의하면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하나로 묶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배웠다. 잡지 이름은 <시간을 잡는 소녀>로 정했다. 그리고 우리 할머니를 인터뷰 대상으로 추천했다. 장미경 선생님과 네 친구가 우르르 몰려가자 할머니는 늙은 나를 보러 와줬다며 좋아했다. 할머니는 은비녀를 하고 있었다. 내 친구들이 장난처럼 물었다.

“할머니, 비녀 언제 꽂으셨어요?”

“17살에”

모두 움찔했다. 우리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17살 소녀를 불러왔다. 할머니는 우리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내가 시집올 때가 열일곱인데 벌써 네가 열일곱이냐?”

시집올 당시 이야기가 이어졌다.

“시집올 때 어머니 떨어져서 아버지 떨어져서 동상들 떨어져서 슬프니께 울지. 우리 동상들이 내 무릎팍에서 언니 언니 하는데 그것도 다 띄어놓고 오니께 슬프잖아. 많이 울었지. 가마 타고 오면서도 많이 울었어.”

<시간을 잡는 소녀> 2호를 만들 때는 하얀 생활 한복만을 고집하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산신령님 같은 느낌이었다. 할아버지는가 흰 옷을 고집하는 이유를 물었다.

“우리나라가 백의민족 아니냐. 그래서 흰옷을 입어야겠다.”

마침 할머니가 방으로 들어왔다. 똑같이 흰 생활 한복을 입고 있었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빨래하느라 힘들다.”

출간된 잡지 <시간을 잡는 소녀>는 언론에 주목을 받았다. ‘홍홍’에 취재기자들이 다녀갔다.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201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밤, 모두 장미경 선생님 집에 모였다. 밤새 파티를 열고 수다를 떨었다.


나에게 ‘홍홍’은 언제든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었다. 어두운 터널 안에서 오랫동안 헤맸던 나는 ‘홍홍’을 만나고 빛이 있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었다. 장미경 선생님에게 그런 고마움을 표현한 적이 있었다. 장미경 선생님은 부끄럽다며 손사래를 쳤다.

나는 완주와 가까운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사회복지학과를 택했다.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주말이 되면 완주 시골집으로 간다. 예전에 장미경 선생님이 완주가 좋다고 했을 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농사짓는 사람과 소뿐이었다. 하지만 어지럽던 내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시야가 선명해진다. 완주는 정말 멋진 곳이다.

버스 창밖에 스쳐 가는 완주 산들은 예쁜 동선을 그린다. 야산에 잎이 돋아나 노란색에서 짙은 초록색으로 변해가고, 다시 빨간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해간다. 벼 또한 모내기 철이 끝나면 쑥쑥 자라다가 가을이 되면 고개를 숙인다. 추수가 끝나면 이삭만 남게 된다. 야산이든 농토든 어디를 봐도 한 해가 지나는 시간이 풍경에 펼쳐진다. 무엇보다 그곳에 엄마가 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중학교 시절,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엄마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번 돈을 내가 상담 받는데 쓰셨다. 어쩌면 그 시기에는 엄마도 상담이 필요했을 텐데 말이다. 나는 엄마에게 편지를 놓고 온다.

장미경 선생님은 이 순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미경 씨는 엄마가 텔레비전을 보다가 앉은 채로 잠이 든 것을 본다. 고개를 꾸벅하는 모습에 삶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엄마가 같은 여자로 보인다.

미경 씨는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린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엄마가 자기 인생을 찾아갔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경 씨는 엄마 이야기를 영상물로 만들고 싶었다. 소녀가 시간을 되돌려 엄마를 보내주는 내용으로 말이다. 2003년 제작한 영화 <정거장>은 전북여성문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김 양’에 대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시나리오에 빠질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어린 시절 마주한 여성들은 대부분 눈치를 보고 욕망을 숨겼다. 여성들은 빨래터에서 밤에 김양이 남자 생각이 나서 잠옷을 입고 논두렁을 달렸다고 수군거렸다. 먹은 것이 소화 안 돼 달릴 수도 있는데 말이다. 바로 그 의문이 미경 씨가 글을 쓰게 된 기원이었다.

(다음 6화 한영미 - 토종민들레 홀씨 되어)

글쓴이 서형. seohyung2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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