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형 작가/대한민국에서 즐겁고 재미있게 사는 여성들

제3화. '여성의식 없다' 지적받은 김영례의 선택

기록하는 사람 2019. 1. 22.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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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즐겁고 재미있게 사는 여성들 제3화. 김영례, 전화 한 통이면 해결 끝


2006년 김영례 씨는 동네에서 난생 처음 페미니스트 여성들을 접하게 된다. 신기하게도 도움을 요청받는 처지였다. 이들은 마을 축제를 열자고 제안했다. 함께 축제 광장을 채울 부스 종류와 운영자를 정하기 시작했다. 김영례 씨는 떡볶이 부스를 맡았다.

축제를 준비하면서 김영례 씨는 다양한 여성을 만났다. 남편이 있는데 비혼 상태며 자녀 없이 사는 여성도 있었다. 그는 편하게 친구처럼 평등하게 지내는 관계라고 했다. 김영례 씨는 담배를 피면서 남편 끼니 걱정을 하지 않는 여성을 보면 상반된 감정이 생겼다. 평등 개념을 이해하고자 애썼지만 공감하기 어려웠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김영례 씨가 답답하게 보일 수도 있다. 동네일에 헌신적인 김영례 씨에게 종종 구의원 출마 제안이 들어오지만 그조차 남편 동의가 필요하다고 여기니 말이다.

마을 축제가 성황리에 끝났다. 김영례 씨 표정은 내내 어두웠다. 그날 밤 김영례 씨는 한 지인에게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한다. 그 지인은 당시 김영례 씨가 한 페미니스트 여성에게 ‘여성의식이 없다’는 지적을 듣고 힘들어 했다고 기억했다. 김영례 씨는 괴로운 감정에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김영례 씨는 1960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이었고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아팠다.

그는 10대부터 식모살이로 아버지 약을 사서 보냈다. 25세까지 가정부를 하다가 27세에 결혼했다. 서울 성북구 종암동 산꼭대기 판자촌에서 살며 시아버지와 시동생까지 챙겼다.

아이가 태어나고 서울 동작구 사당동으로 이사했다. 큰 아이가 등교하고 시아버지가 노인정으로 가면 오전에 짬이 났다. 김영례 씨는 동네 반장을 맡았다. 동네 행사에 참석하고 부녀회가 김장할 때 거들기도 했다. 1999년 서울시 자원봉사대학을 수료한 후 당시 동작구 자원봉사은행에 가입했다.

김영례 씨는 봉사 활동으로 늦는 날에는 시아버지에게 저녁을 사 드시라고 1만 원을 드렸다. 김영례 씨는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녹색어머니회에서 활동했다. 자율 방범 활동은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자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은 이런 김영례 씨에게 한 마디 했다.

“돈 버는 게 먼저고 봉사는 나이 들어서 해도 돼.”

김영례 씨에게 자원봉사는 어떤 의미였을까. 자기 결핍을 채우고 자아를 확장하는 수단이었던 듯하다.

김영례 씨는 늘 배우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동네 봉사를 하면 구청이 예산을 지출하는 과정이나 복지 혜택 절차 등을 알게 된다. 그 덕에 취약계층인 사람에게 기초생활 수급을 받도록 도울 때 아주 뿌듯했다.

동작구에 자원봉사은행이 생기자 김영례 씨는 동네 여성에게 자원봉사은행 가입을 독려했다. 함께 삼계탕과 갈비탕을 끓이며 경로잔치를 열었다. 그때마다 동네 사람들에게 십시일반 후원을 받곤 했다.

경험이 쌓이니 어떤 기관에서는 김영례 씨에게 ‘삼계탕 200그릇 기획안’을 문의하기도 했다. 노인 200명에게 동시에 삼계탕을 대접하되 닭 모양을 유지하는 게 핵심이다.

김영례 씨가 자녀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녹색어머니회 일을 계속한 점은 매우 특이하다. 남편은 잦은 바깥 활동을 마뜩찮게 봤을 게 분명하다. 김영례 씨는 투덜거리는 남편에게 이렇게 답했다.

“내가 가서 알려줘야 해. 안 그러면 엄마들이 흩어져서 안 돼.”

녹색어머니회에서 리더 자질이 있는 여성을 보면 일을 더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북돋웠다. 가령 녹색어머니회는 학교 앞 교통정리를 돌아가며 맡는다. 하지만, 날씨가 좋지 않으면 회원들이 나오지 않기도 했다. 그런 날에 김영례 씨는 대신 교통정리를 나서곤 했다. 겨울에는 따뜻한 어묵 국물을 챙겨 와서 봉사하는 회원들을 격려했다.

김영례 씨는 2006년 구청에서 운영하는 복지관에서 무료급식 일을 했다. 그리고 이때가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지역운동을 하면서 마을축제를 제안한 시점이었다.

김영례 씨는 축제가 잘 될 수 있도록 동사무소, 구청, 남성지구대, 자율방범대, 녹색어머니회와 연결해줬다. 축제 홍보 전단은 통장협의회에 부탁해 동네 곳곳에 붙이게 했다. 모든 일은 김영례 씨 전화 한 통이면 척척 진행됐다. 김영례 씨는 당시 떡볶이 부스를 맡았는데, 여기에 필요한 대형 떡볶이 판과 가스통도 김영례 씨 전화 한통으로 해결됐다.

김영례 씨가 동네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자원봉사 경력에서 나오는 것일까? 김영례 씨를 아는 사람들은 아마 한 번쯤 이런 충고를 했을 듯하다.

“자원봉사도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야.”

김영례 씨 경제상황은 열악했다. 시아버지가 1년 동안 입원했을 때는 돈이 없어 김영례 씨가 직접 간호했다. 당시 카드 돌려막기를 해야 겨우 버틸 정도로 힘들었다. 그 와중에 친정어머니도 아팠다. 김영례 씨는 가게 한구석에 방을 만들어 친정어머니와 시아버지를 함께 모셨다.

시아버지가 먼저 사망했고 친정어머니는 오빠가 모셔갔다. 오빠 집까지 한 시간 반 거리였다. 김영례 씨는 살아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2006년 김영례 씨는 복지관 일이 끝나면 마을축제를 준비하면서 매일 친정어머니를 보러 갔다. 약을 믹서기에 갈아서 먹이고 손톱 발톱을 손질했다. 2010년 친정어머니가 사망하자 김영례 씨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 최선을 다해도 시간이 지나면 돌아가시더라 이거예요.”

그 후 김영례 씨가 택한 인생 방향은 ‘더욱’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여성운동이라면 가정 내 양성평등 실현에 이바지하는 정도를 따질 것이다. 자원봉사가 과연 가정 내 양성평등에 얼마나 보탬이 될까.

김영례 씨 남편에게는 장애인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단칸방에 살며 어머니를 모셨다. 어머니가 풍을 맞아 움직이는 게 불편해지자 김영례 씨는 일주일에 한 번 목욕을 도우려 다녔다. 몇 년이 지나 어머니가 죽음을 앞두자 남편 친구는 남편에게 전화해 김영례 씨에게 와 달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애들은 자신이 챙길 테니 가보라고 했다.


김영례 씨는 장례식장에서 염까지 함께 했다. 장례식이 끝나자 친구는 어머니 영정사진을 들고 김영례 씨 부부 가계를 찾아왔다. 남편 친구는 김영례 씨에게 3일 동안 함께 장례를 치러 고맙다고 인사했다.

동네 사람들은 김영례 씨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안다. 떡볶이 판이든 가스통이든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다시 카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저 최선을 다 하면 될 줄 알았던 삶에서 어느 날 공개적으로 ‘여성의식이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학벌로 말미암은 열등감이 치솟았다. 다행인 것은 김영례 씨와 여성주의 사이 접점에 열등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드라마 <미생>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파리 뒤를 쫓으면 변소 주변을 맴돌고, 꿀벌 뒤를 쫓으면 꽃밭에 간다.”

여성주의를 비판 도구로 쓰는 여성만 만난 게 아니었다. 마을 축제를 준비하면서 만난 여성 중에는 주변에 동기를 부여하고 조직화 재능이 뛰어난 여성도 있었다. 바로 다음 장에 소개할 신연숙 씨다.

박신연숙 씨는 1991년 서울 여성의 전화 활동을 시작으로 2006년 동작구에서 지역운동을 시작한다. 박신연숙 씨는 빈 공간을 빌려 경찰서 여성방범위원이나 학교 학부모위원을 모아 인권 감수성 교육을 진행했다.

2010년 ‘김수철 사건’을 자주 언급했는데, 영등포에 있는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여학생을 납치해 자기 집에서 성폭행한 사건이다. 범인이 피해자를 1km 정도 끌고 가는데 걸어가는 동안 주민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이런 사례를 소개하던 박신연숙 씨는 교육 중에 김영례 씨 경험을 접하며 오히려 탄복한다.

김영례 씨는 시장을 가다가 근처 여인숙 골목 안으로 어떤 중년 남성과 중학교 여학생이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됐다. 얼핏 부녀 사이로 볼 수도 있었지만 여학생 표정이 매우 경직돼 있었다. 김영례 씨는 여학생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야! 너 거기서 뭐 해. 빨리 집에 가. 네 엄마가 기다린다.”

그 말을 들은 여학생은 서둘러 도망쳤고 중년 남성은 당황하면서 멀리 사라졌다.

김영례 씨가 보는 박신연숙 씨는 컴퓨터를 잘 다루고 세부적인 계획서를 잘 만들며 외부에서 자원을 잘 끌어들였다. 무엇보다 자신감이 넘쳤다. 닮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김영례 씨에게 목표가 생겼고 뒤늦게 학구열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김영례 씨는 야간에 정서산업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졸업장을 받고 이력서에 고등학교 졸업이라고 적을 생각만 해도 뿌듯했다. 이왕 시작한 공부 대학교 사회복지학과까지 도전하기로 했다.

하지만, 집안 사정으로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복지관 경로잔치에 동작구청장이 방문했다. 김영례 씨는 구청장과 면담을 요청해 다짜고짜 학비 지원을 요청했다. 구청장은 무슨 돈으로 학비를 지원하겠느냐고 되물었다. 김영례 씨는 자원봉사를 하면서 알게 된 구청 예산 가운데 구청장이 명령하면 쓸 수 있는 예비비를 언급했다. 그리고 2년 뒤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이 기간 통장 일과 복지관 무료급식 일도 소홀하지 않았다.

김영례 씨가 이렇게 주변을 살피는 동안 남편이 챙겼던 아들은 어느덧 다 자라 김영례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처럼 살고 싶어.”

열심히 꿀벌 뒤를 쫓던 김영례 씨는 어느새 누군가를 끌고 있는 꿀벌이 돼 있었다.

(다음 4화. 박신연숙-나는 무지 사랑스러워.) 

글쓴이 서형. seohyung2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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