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40년 전 국민학생 시절과 독재자 박정희

김훤주 2017. 1. 23.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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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정희가 싫다. 5·16군사쿠데타, 10월유신, 계엄령·위수령, 비상사태·긴급조치, 중앙정보부, 공포통치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객관 사실 때문에도 그렇지만 개인 경험만으로도 나는 박정희가 너무 싫다. 

나는 1963년 생이다. 1970년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박정희는 이태 전인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박정희는 전체주의에 따라 사회 모든 분야를 군사화했다. 그것은 조그만 시골 국민학교 교실에까지 관철되고 있었다. 

학교 정문을 통과할 때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다. 입학식 하는 첫 날, 배우지도 듣지도 못했기에 교문을 그냥 지나쳤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불러 세워 엄한 얼굴로 꾸짖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때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 뒤 학교 생활에서는 깜박 잊고 하지 않으면 그 때마다 맞아야 했다. 교문에서 선생님 보기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태도가 조금만 불손해도 마찬가지였다. 등굣길에 교문을 통과할 때마다 바짝 긴장해야 했던 이유였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1. 국기에 대한 맹세 국민교육헌장 못 외우면 폭행

방과 후 운동장에서 놀다 오후 5시인가 6시인가 국기 하강식을 할 때는 하던 놀이를 멈추고 벌떡 일어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다. 선생님 보는 눈이 없겠지 싶어 나무나 담장 뒤편에 쪼그려 놀다가는 영락없이 걸려들어 얻어터지고 벌을 서야 했다. 국기하강식 "딴 따아다단~~" 이어지는 음악을 틀면서 교무실 어딘가에서 운동장을 샅샅이 살폈던 것이다. 

국민학교 3학년 때이던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면서 국기에 대한 맹세까지 읊조려야 하도록 바뀌었다. 나는 맹세문을 금세 외웠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도 없지 않았다. 그런 친구는 제대로 외울 때까지 얻어터지고 벌을 서야 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보다 국민교육헌장은 더 어려웠다. 한동안은 학교 마치고 집에 갈 때마다 선생님 앞에서 외워야 했는데 한두 번 '빠꾸' 당하지 않고 매를 맞지 않는 아이는 드물었다. 유신헌법이 제정되고는 '유신의 노래'를 불러야 했다. '산토끼' 동요 곡조에 가사를 붙인 것이었다. "시월에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삼국통일 되듯이 남북통일 되지요." 운운. 

경남도민일보 사진.

2. 왼손 아닌 오른손 들면 또 폭행

획일화는 박정희는 국가주의를 강제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드러난 것은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이었다. 학교 전체가 획일화에 잠겨 있었다. 학생들 손짓 발짓 몸짓이 모두 감시와 규제의 대상이었다. 박정희는 어린 국민학생들조차 낱낱이 통제했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학교 운동장을 빙 돌아가면서 게시판이 열 개도 넘게 마련되어 있었다. 철봉대 같이 쇠파이프로 테두리를 두르고 거기에다 철판을 매단 것이었다. 하얗게 칠해진 철판에는 까망·파랑·빨강 글씨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이들이 지켜야 할 것들을 죽 늘어놓은 것이었다. 대부분이 기억나지 않지만 이를테면 학생끼리 인사하는 법, 선생님·웃어른에게 인사하는 법 등이 그림과 글로 설명되어 있었다. 복도에서는 떠들지 말아야 하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발뒤꿈치를 들고 양손을 허리에 대고 걸어야 한다든지 교실에서 발표할 때는 오른손 말고 왼손을 들어야 한다든지도 적혀 있었다. 

이 가운데 나는 "저요", "저요" 하고 수업 시간에 손을 드는 것이 은근히 괴로웠다. 게시판에는 오른손으로 연필을 잡고 왼손은 발표할 때 들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왼손잡이였다. 왼손으로 연필을 쥐고 나도 모르게 오른손을 드는 경우가 있었다. 

앞에서 선생님이 보면 다들 왼손을 드는데 오른손을 드는 나만 톡 튀어져 나왔을 것이다. 그럴 때면 선생님은 오른손 왼손도 구분할 줄 모른다면서 주먹이나 출석부로 머리통을 때리기 일쑤였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3. 화장실서 똥누는 자세까지 획일화

게시판에는 오줌 누고 똥 눌 때 자세까지 정해져 있었다. 오줌 눌 때는 바짝 다가서서 고개를 숙이지 말고 정면을 바라보며 친구와 잡담하지 말아야 한다고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오줌누기는 그럭저럭 따라할 수 있었지만 똥 눌 때는 지시대로 하기 어려웠다. 

좌변기도 없었고 수세식도 아니었다. 엉덩이를 까고 쪼그려 앉아야 하는데 몸통을 숙이면 틀린 자세이고 몸통을 직각이 되게 세워야 바른 자세였다. 어린 나는 게시판 지시대로 하려고 애를 썼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직각이 되게 몸통을 세우면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배에 힘을 조금이라도 주면 어김없이 몸통이 앞으로 수그려졌다. 똥을 다 싸고 나서 보면 몸통은 나도 몰래 앞으로 숙여져 있었다. 똥 누고 일어나 변소문을 나설 때마다 나는 '오늘도' 바른 자세를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그나마 선생님한테 들키지 않아 얻어맞지 않아 다행이라면서 말이다. 

4. 아홉 살 아이한테 한강철교 단체기합

단체기합도 많이 받았다. 1학년 때부터 겪었던 꿇어 앉아 손 들기는 가장 쉬웠고 엎드려 뻗쳐가 다음으로 쉬웠다. 2학년이 되면서부터 겪기 시작한 원산폭격은 조금 어려운 편이었고 앞으로 앞으로 손 뻗고 기마 자세로 있기는 조금 더 어려웠다. 

한겨레 사진.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것은 한강철교다. 먼저 한 명이 엎드려 뻗쳐를 하면 다음 사람이 그 친구 어깨에 발을 올리고 엎드려 뻗쳐를 한다. 이런 식으로 어떤 때는 열 명도 넘게 얽어져 인간철교를 만들었다. 

인간철교는 앞으로 또는 뒤로 열 걸음, 오른쪽으로 또는 왼쪽으로 다섯 걸음 등 선생님 지시를 따라 움직였다. 그러다 무너지면 선생님은 몽둥이를 휘둘렀다. 어떤 선생님은 1분단부터 4분단까지 16명씩 분단별로 인간철교를 만든 다음 달리기 경주를 시키기도 했다. 

인간으로 만들어진 한강철교는 얼마 안 가 곳곳에서 무너져 내리기 마련이었다. 아이들을 내리치는 선생님의 몽둥이는 날렵했다. 창공을 날아오른 비행기가 폭탄을 쏟아내는 원산폭격과 다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학교냐'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풍경이다. 

오리걸음과 토끼뜀도 있었다. 400m짜리 운동장 한 바퀴 정도는 어렵지 않게 견딜 수 있었지만 세 바퀴는 정말 못하겠더라. 선생님 눈에서 벗어났다 싶어 조금 잔꾀를 부리거나 뒤에 처지면 여지없이 몽둥이로 맞아야 하는 것은 다른 단체 기합과 마찬가지였다. 

한겨레 사진.

2학년 2학기 겨울철 비오는 날 운동장에서 한 시간 내내 받았던 엎드려 뻗쳐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너무 추워 손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던 고통은 지금도 내 손에가락 사이사이에 남아 있다. 특정 부위에 극심한 고통이 집중되면 다른 부위에 주어지는 고통은 어지간해서는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그 때 알았다.

5. 책걸상과 가방 위치까지 규제 

획일화는 직선과 친했다. 곡선이나 지그재그는 학교에서 용납되지 않았다. 책걸상은 앞뒤 양옆으로 한 치도 어긋남이 없어야 했다. 수업 시간에 책상에 앉아 있는 자세도 흐트러지면 안 되었다. 조금만 어긋나 있어도 그 자리 아이의 뺨은 선생님 손바닥 차지가 되었다.

걸상에 앉는 자세는 언제나 발라야 했다. 책상에 엎드린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엉덩이는 언제나 의자 깊숙히 집어넣어야 했고 허리는 바르고 곧아야 했으며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어깨를 쫙 펴야 했다. 이렇게 하고 한 시간 수업을 마치면 몸통이 뻐근할 정도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책가방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른쪽 또는 왼쪽 아래에 앞뒤로 줄을 맞추어 놓여져 있어야 했다. 만약 가방이 엎어져 있거나 딴 데로 가 있으면 선생님이 학생한테 휘두르는 폭행의 핑계가 되었다.

월요일 아침마다 했던 전교 조회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30분 전에는 운동장에 집결하여 제식 훈련을 받아야 했다. 줄은 앞뒤와 양옆이 모두 발라야 했다. 반과 반 사이, 학년과 학년 사이, 학생과 학생 사이도 일정해야 했다. 어긋나면 여지없이 기합 또는 폭행이었다. 

한겨레 사진.

6. 조용히 시켜 달랬더니 무참한 폭행

그러다 담임 선생님한테 무참한 폭행을 당했다. 국민학교 3학년 때였으니 열 살이었다. 지금도 3학년 담임 선생님 이름은 내 머리에 기억되어 있다. 그렇게 얻어맞고 나서는 은연 중에 생긴 두려움 때문인지 대학에 들어가서도 어지간해서는 선생님한테 먼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자습을 시키고 자기 자리에서 무언가를 펜으로 끼적이고 있었다. 1교시 2교시 3교시 모두 그렇게 하였다. 교실이 갈수록 시끄러워졌는데도 선생님은 그 흔한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께 가서 아이들 좀 조용히 시켜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그게 화를 불렀다. "건방지게 선생님한테 하라 마라야?"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는지 벌떡 일어나더니 마구잡이로 두드려패기 시작했다. 맨손이 몽둥이보다 훨씬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알았다. 

얼굴은 피로 범벅이 되었다.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되풀이 두드려패는 통에 국민학교 3학년 아이는 코피가 제대로 터졌다. 아이는 어찌할 바 몰라 울면서 오줌을 쌌다. 오줌은 바짓가랑이를 타고 흘러내려 마룻바닥을 적셨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채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하겠습니다." 마구 외치며 손바닥을 싹싹 비벼댔다. 끝마무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며칠 동안 앓아 눕는 바람에 학교에 가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한겨레 사진.

7. 강제징집된 탁구부 시절의 폭행

3학년 2학기부터는 탁구부를 했다. 키가 컸기 때문에 뽑혔다. 학생이나 학부형 의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시절이다. 담당 선생님이 교실을 돌면서 "너", "너" 지목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렇게 뽑힌 아이가 나까지 쳐서 3학년에 다섯은 되었던 것 같다. 

우리는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새벽부터 밤중까지 종일 탁구공만 쳤다. 폭행과 기합은 전보다 더욱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여태 당했던 몽둥이와 엉덩이의 결합 또는 회초리와 손바닥의 결합에 더해 탁구공을 쳐서 손바닥 때리기, 탁구 라켓으로 따귀 때리기 등이 폭행의 종류로 추가되었다. 

이런 폭행이 한 번도 없이 그냥 넘어가는 날도 간혹 있었다. 하지만 단체기합은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렇지 않았다. 날마다 한 번 이상이었다. 체력 단련 미명 아래 더욱 빈번해진 것이 단체기합이었다. 

그래도 탁구부 시절 선생님 폭행은 예측이 가능했기에 불안한 정도는 덜했다. 교실에서 당했던 폭행은 행사 준비 등 학교 전체 분위기나 선생님 기분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언제 어디서 터져 나올지 알 수 없었기에 우리는 더 불안에 떨어야 했다.

우리는 군(郡)대회 3군(郡)대회에서 우승하고 도대회도 우여곡절 끝에 우승했다. 도 대표가 되어 국무총리기 문교부장관기 등 전국대회에 나가 동메달을 따기도 했다. 6학년이던 1975년 5월 부산서 열린 소년체전이 마지막이었는데 8강전에서 탈락했다. 3년에 걸친 폭행과 기합도 이로써 끝났다.

8. 박정희는 독재자, 선생님은 부역자 

한겨레 사진.

당시 학교는 전체주의로 획일화된 군대·병영과 마찬가지였다. 박정희는 유신독재로 치달으면서 학교까지 무단통치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이런 학교에서 학생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공포에 찌들고 폭력에 길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잘못과 책임은 당연히 박정희한테 있지만 그렇다고 선생님 책임과 잘못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박정희에 편승하여 폭력을 무리하게 휘두르거나 또는 국기에 대한 경례·맹세 또는 국민교육헌장 외우기를 심하게 강요한 선생님은 부역자다.

권력자 또는 독재자의 범죄 행위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이런 부역자들을 통해 완성된다. 부역자에게는 부역자에 걸맞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때는 어쩔 수 없었다'거나 '그 때는 다 그랬어'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당시에도 때리지 않는 선생님은 있었고 국민교육헌장이나 국기에 대한 맹세 외우기를 별로 강요하지 않는 선생님도 있었다. 선생님 대부분이 피해자인 측면도 있지만 그것은 교육당국에 대해서만 성립한다. 유신 치하 선생님은 학생에 대하여 그 어떤 절대 권력보다 더한 가해자였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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