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원균은 정말 나쁘기만 한 사람이었을까?

김훤주 2017. 1. 1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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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해전 하면 원균이 떠오르고 원균 하면 무능하고 이순신 장군을 괴롭힌 나쁜 사람이라는 규정이 항상 따라붙는다. 그런데 원균이 정말 그토록 무능하고 나쁜 사람이었을까는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원균은 경상우수사로서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수영이 전멸한 가운데서도 적극 나서 왜군을 막았고 이순신과 합동 전투도 치렀다. 우리한테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뒤로 숨는 용렬한 지휘관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순신과 견주어서 능력을 평가하면 무능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이다. 게다가 능력을 떠나 주어진 조건만 비교해도 원균은 이순신보다 불리한 점이 많았다. 

원균 영정.

이순신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기 1년 2개월 전인 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다. 나름 전란에 대비할 시간이 넉넉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원균은 1592년 1월 고작 임진왜란 시작 3개월 전에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해전에 익숙지 못한 점도 있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나서 원균은 1595년 충청병사(충청도병마절도사)로 옮겨가게 된다. 바다에서 육지로 전장이 바뀐 것이다.  

1596년과 97년 즈음 왜군은 이순신 제거를 위해 이간책을 썼다.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은 이간책에 넘어가 이순신에게 일본 수군 본진이 있는 부산을 치라고 명령한다. 이순신은 부산은 왜적이 강성하고 가릴 데도 마땅찮아 쳐들어가면 안 된다면서 거부한다. 

이순신은 결국 왕명을 거역한 죄로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선조는 이순신 대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육전에 익숙해져 있었던 원균이 이제는 다시 수전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통제사가 되기 전에는 원균도 선조와 마찬가지로 부산 깊숙이 쳐들어가 쓸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제사가 되고 나서 원균은 이순신이 부산으로 진격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과 달리 부산으로 쳐들어가기를 한사코 저어했다. 

과정은 이처럼 달랐지만 이순신과 원균 모두 결과는 같았다. 그러자 도원수 권율이 원균을 여러 차례 나무라고 다그쳤을 뿐 아니라 곤장까지 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하여 떠밀리다시피 나가 조선 수군의 유일한 패배로 기록되는 칠천량해전을 치르게 된 것이다. 

이순신 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

이런 흐름을 짚어보면 원균이 마냥 무모하거나 무능하다고만 평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선조의 비겁함과 무책임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사정을 살펴보고 하되 굳게 지켜야 옳은데 권율이 다그쳐 원균을 죽였다"고 책임을 신하한테 떠넘겼다.  

칠천량해전 참패의 책임을 온전히 원균에게만 묻기는 어려운 정황들이 곳곳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무조건 출병을 고집했던 권율도 책임이 있고 그렇게 하도록 권율을 몰아부쳤던 선조에게는 더 큰 책임이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이어진 논공행상에서 선무1등공신은 셋뿐이었는데 이순신·권율 그리고 원균이었다. 부산으로 진격하라 다그쳐 칠천량해전 대패의 원인 제공자인 선조가 그 장본인인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책봉했으니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원균의 이미지가 나쁘게 굳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인물과 대조되는 자체가 원균한테는 원초적으로 불리했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1960~70년대 이순신 장군 영웅 만들기를 하면서 원균을 악역으로 동원한 까닭도 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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