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에 바쳐 온 문경유족회 채의진 회장이 28일 돌아가셨다.
+오마이뉴스 보도 : 민간인 학살 생존자 '빨간베레모 할아버지' 별세
1949년 전쟁 때도 아닌 평시에 주민들이 국군을 환영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산골마을을 완전히 불태우고 주민 86명을 무참히 살해한 경북 문경 산북면 석달동 민간인학살사건.
더욱이 이 사건이 일어난 날은 성탄 전날인 12월 24일이었다.
당시 살육의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생존자와 유족들이 지난 2006년 12월 24일 오전 11시 한자리에 모여 제57주기 합동위령제와 추모식을 열었다.
빨간 모자 쓴 분이 채의진 회장. @김주완
당시 추모식에는 유족회 채의진 회장과 생존자·유족들을 비롯, 신국환 국회의원(국민중심당)과 윤정길 문경시 부시장, 탁대학 문경시의회 의장과 문경출신 도의원 등이 참석했으며, 임종인 국회의원(열린우리당)도 추도사를 보냈다.
또 홍순권 동아대 교수와 정근식 서울대 교수, 도진순 창원대 교수 등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회원들과 민간인학살 범국민위원회,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관계자들도 참석해 희생자를 애도하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불교인권위원회 진관 스님과 평화통일시민연대 김승자 공동대표는 추모시를 낭독했다.
앞서 23일 문경문화원에서 열린 증언대회에서 사건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채홍빈(2006년 당시 71세)씨와 채홍연(2006년 68세)씨가 살육의 현장에서 목격한 생생한 경험담을 증언하기도 했다.
나도 그날 그 현장에 있었다. 그때 채록한 채홍빈 씨의 증언을 여기에 옮겨 적어둔다.
문경 민간인학살 생존자 채홍빈씨의 피맺힌 증언
1949년 12월 24일 저는 그 당시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였습니다.
그 날은 겨울 방학을 하는 날이라 오전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저의 마을쪽에서 검붉은 연기가 엄청나게 솟아올라 태양을 가리어서 길이나 땅 지면이 노랗게 변했습니다.
산 고개를 넘어 동리로 들어서려는데 고갯마루에서 완전 무장한 군인 2명이 거기 서라하여 섰더니 "너 이 마을에 사느냐" 하기에 "네" 하니깐 "그럼 빨리 가서 죽어라" 하여 산등을 넘어서 마을로 내려오니 시골 촌집치고는 제법 큰 대청이 있는 초가 4칸인 저의 집이 화염에 휩싸여 불타고 있었으며 집 뒤의 산모퉁이에 도착하니 같이 학교 갔다 오던 학생들과 동네 청년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군인 한명이 산비탈에 기대어서서 마구 총을 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군인이 저를 시체 더미로 밀어 넣어 그곳에 쓰러져서 정신을 잃고 있다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엎드린 채 눈을 떠 보니까 저의 집 앞 논바닥에는 동민이 다 쓰러져 있었고 저의 할머니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기에 벌떡 일어나 보니 무장 군인들은 다 사라지고 동리 집과 산 전부가 불에 타고 있었습니다.
문경 민간인학살 생존자 채홍빈씨의 피맺힌 증언 @김주완
저는 정신을 차리고 산모퉁이에서 논바닥으로 내려와보니 칠순의 할아버지는 백발 수염을 날리며 총탄에 맞고 쓰러져 운명하셨고 저의 형은 등에 맞은 총탄이 배를 관통하여 창자가 배 밖으로 항아리 덩어리 같이 쏟아져 나와 있었으며 형은 저를 보고 날 좀 살려달라고 하였으나 그 당시 제가 형을 살려 낼 재주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헤매가 보니깐 어머니와 네살짜리 동생이 총탄에 맞고 즉사하여 쓰러져 있어서 어린 동생(홍래)을 끌어안고 들어보니 이미 숨이 끊어져서 목이 덜렁덜렁하며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철 모르는 저는 숨이 막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다 봤을 때 이리저리 쫓아다니던 할머니는 눈에 보이지 않아서 찾아보았더니 흙으로 지은 옆집 초가집의 지붕은 다 탔으나 벽은 그대로 남아있어 엄동설한의 혹독한 추위를 못 이겨 거기까지는 할머니가 가셨는데 헐머니는 온 몸에 10여 별의 총탄을 맞고 다시는 움직이지 못하고 다 무너져 가는 집안에서 그대로 계시면서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손자들을 걱정해서 저에게 사촌동생을 데리고 약 5km 떨어져 있는 고모네 집으로 가라기에 할머니를 버려두고 네 살짜리 사촌 동생 홍득이를 등에 업고 고모네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경찰관들이 와서 할머니를 점촌 재생의원에 입원시켜 치료를 받았지만 1개월 1일 만에 운명하셨습니다. 10여발의 총탄을 맞고도 강인한 논바닥을 뛰어다니며 가족들의 시신을 찾아놓고 할머니는 병원에서 치료 중 한 달이 지나면서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저는 천애고아가 되어 혈혈단신으로 학교도 5학년까지 다니다가 학업도 중단하고 전국을 방황하며 지금까지 죽지 않고 목숨을 유지해 왔습니다.
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새 주어야 하는 아국의 국군이 아무런 잘못도 없는 무고한 우리 부모형제를 이렇게 잔학하게 짐승같이 도살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한스럽습니다.
그 후 저는 너무 한이 맺혀서 채의진과 함께 한을 풀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저는 조그만 식당을 차려서 자장면 한 그릇 한 그릇을 배달하며 팔아서 조금씩 모은 돈으로 항공료룰 마련하여 채의진이 미국까지 가서 미국국립문서보관소와 맥아더 기념관에서 소장되어 있던 비밀이 해체된 주한 미 군사 고문단 정보일지와 미극동군사령부 정보 일지를 입수하여 국군 제 25연대 3대대 7중대의 2개 소대 병력이 저의 부모형제를 비롯하여 저의 석달동 주민 86명을 집단학살을 자행했다는 기록을 찾아냈습니다. 시간 관계상 더 이상 말씀 못 드리고 이만 줄이겠습니다.
/증언자:채홍빈(71세)
문경 석달동 민간인학살사건이란?
문경 학살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인 1949년 12월 24일 정오께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부락 남녀노소 86명이 근처를 지나가던 국군 정찰부대에 집단학살당한 사건이다.
가해부대는 당시 문경 점촌 지역에 주둔하던 국군 제 3사단(사단장 송호성) 25연대(연대장 유희준) 3대대 7중대(중대장 유웅철) 취하 2개 소대였다. 학살을 직접 자행한 소대는 2소대(인솔 책임자 안택효 중사)와 3소대(인솔 책임자 유진규 소위) 병력 72명이었다. 당시 무차별 주민학살로 희생된 마을 주민은 남자 43명, 여자 43명이었다.
가해부대는 당시 문경 점촌 지역에 주둔하던 국군 제 3사단(사단장 송호성) 25연대(연대장 유희준) 3대대 7중대(중대장 유웅철) 취하 2개 소대였다. 학살을 직접 자행한 소대는 2소대(인솔 책임자 안택효 중사)와 3소대(인솔 책임자 유진규 소위) 병력 72명이었다. 당시 무차별 주민학살로 희생된 마을 주민은 남자 43명, 여자 43명이었다.
태어난 후 아직 이름도 짓지 못한 간난아기들까지 무참히 학살됐다. 이런 아이들은 '朴아기' '蔡아기' 등의 이름으로 적혔다. @김주완
여기에는 젖먹이 아이 3명과 겨울방학식을 마치고 하교하던 초등학생 9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군부대는 이어 400년간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던 이 마을 가옥 27채를 불살라버려 마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부상당하는 바람에 확인사살을 면한 12명의 중상자들은 점촌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은 뒤 일부는 아직까지 생존해 있다.
사건의 발단은 순전히 현지 부대 인솔자의 오판과 정찰 임무만 수행하라는 상부 명령 무시였다. 즉 가해부대는 순찰만 돌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군부대가 들러도 환영해주지 않는다고 여긴 마을 분위기에 분개해 무차별 인간사냥을 벌인 것이다.
사건 당시 출타중이거나 무참한 인간 살육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마을 주민은 60여명이었다. 이들은 사건후 사라진 마을을 영영 등지기도 했고, 일부는 없어진 마을 터 아래에 집을 지어 새로 마을을 형성한 뒤 지금까지 한 맺힌 세월을 살고 있다.
일가족이 전멸해 대가 끊긴 집안도 6가구에 이르렀으며 생존자들 역시 대부분이 일가족을 잃고 한두명씩 살아남은 탓에 이후 이들의 인생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뒤 유족회를 결성해 정부에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을 요구했지만 이듬해 일어난 5·16 쿠테타 직후 유족대표들이 포고령 위반죄로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고 나서는 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사건에 대해 은폐를 강요당한 채 피맺힌 가슴을 안고 살아왔다.
지난 1989년 유족회를 결성한 피학살 유족들은 매해 12월 24일 사건 현장에서 합동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 아울러 그동안 국회와 청와대, 총리실, 국방부 등을 상대로 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진정을 여러번 제출하며 학살사건의 진상규명,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위해 노력해왔다.
/정희상(시사저널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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