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87년 6월 10일 경남엔 무슨 일이 있었나(2)

기록하는 사람 2016. 6. 1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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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행정·정당, 그리고 언론에 분노 폭발


6·10마산대회의 절정은 마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국제축구대회가 최루탄으로 인해 중단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마산대회는 국내·외 관심의 초점이 됐다.


오후 6시30분 마산 창동 코아제과 앞 도로를 거쳐 육호광장으로 진출하던 시위대는 가로막고 있던 경찰을 투석으로 돌파하고 일시에 광장을 점거했다.


박영주씨의 기록에 따르면 이 광장에서 시위대는 어디로 갈 것인지 잠시 논란을 벌였던 것으로 돼 있다. 만일 시위대가 운동장 쪽으로 가지 않고 마산역 방향으로 갔더라면 이날 시위는 싱겁게 마무리되고 말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운동장 쪽을 택했다.


운동장 동문에 도착한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87년 6월항쟁의 역사 중 17일 경상대생의 남해고속도로 LP 가스차 탈취사건과 함께 전국의 시위 열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은 여기서 일어났다. 그 때가 오후 7시쯤이었다.


당시 한 신문기자의 취재메모는 축구경기 중단 시간을 오후 7시 5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축구경기 중단 당시 상황을 가장 자세히 잘 기록하고 있는 것은 6월항쟁이 막 끝난 직후에 발간된 월간 <말> 87년 8월호(통권 제12호)였다.


◇ 국제축구경기 중단, 국내외 관심


"축구경기장에 다다른 시위대는 50여명의 전경과 맞닥뜨렸다.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며 몰려오는 시위대를 보자 전경들은 당황하여 몇발의 최루탄을 발사했다.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자 관중들은 경기장 담 너머로 목을 내밀고 바깥쪽을 구경했다. 이때 경기장에서 제16회 대통령배 축구대회 3일째 한국A팀 대 이집트팀의 경기가 진행 중이었다.


전반 24분 이집트 선수 2~3명이 잔디밭에 떼굴떼굴 굴렀다. 어떤 선수는 윗옷을 벗어 얼굴을 감싸고 털썩 무릎을 꿇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이틈에 골을 넣은 한국팀에게 환호를 지르던 관중들은 곧 의아한 표정으로 변했고, 장내는 일순 정적이 흘렀다. 5분뒤 주심은 경기중단을 선언했다.


87년 6월 10일 오후 7시께 상황을 보도한 <중앙일보> 보도사진.


이 사실이 알려지자 3만여 관중들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입장료 환불을 요구했고, 흥분한 관중들은 빈병, 쓰레기통 등을 운동장 안에 던지며 경기장 안으로 몰려들었다. 이날 시민들이 경기중단에 분노한 직접적인 원인은 입장객 중 대다수가 입장권을 강제로 샀기 때문이라는 것이 시민들의 주장이다.


정문과 후문으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운동장 옆 16차선 도로를 점거하고 대형태극기를 앞세운 시위대와 함께 합세, 3만여 인파가 대열을 형성했다. 이 때 한 시민이 '학생 최고다'고 크게 외치자 시민들은 '옳소'하며 박수를 쳤다."


경기가 중단되자 성난 관중들이 본부석을 뒤엎고 항의하고 있다.

 

또 당시 서울지역일간지들도 마산 축구경기 중단사건만 별도 기사로 뽑아 11일자 사회면에 보도했는데, 그 중 <조선일보>는 '최루가스 퍼져 축구 중단-관중들 흥분…경찰차 등 4대 태워'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전하고 있다.


"10일 오후 6시50분쯤 마산공설운동장에서 한국A팀과 이집트팀이 대통령배 축구 전반전 경기를 벌이던 중 경찰이 운동장으로 들어오려던 1500여명의 학생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해 최루탄을 발사, 최루탄 가스가 운동장에 퍼지면서 이집트팀이 퇴장하는 바람에 경기가 중단됐다.


최루탄 가스가 운동장 안으로 날아들자, 이집트 선수들은 경기를 포기, 운동장에 주저앉았고 이어 9분후 골키퍼를 선두로 이집트 선수들이 퇴장하자 한국선수들도 따라 나갔다. 경기가 중단되자 2만여 관중 중 일부가 본부석에 몰려가 "표값을 환불하라"고 요구하며 본부석의 의자·탁자 등 집기를 부쉈으며, 대부분의 관중들이 퇴장한 후에도 3000여명의 관중은 본부석 주위에 몰려 30여분간 농성을 벌였다. 관중들이 계속 운동장에 남아 표 반환을 요구하자, 경찰 500여명이 운동장에 들어가 이들을 해산시켰다. 경기장에서 나온 관중들은 시위대와 합류, 3만여명으로 늘어났고…(후략)"


최루가스를 피해 축구경기장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관중들.


◇알아서 기는 지역신문 보도


<동아일보>도 같은 날 사회면에 마산 상황을 주요기사로 배치했고, 12일자에서는 1면 '횡설수설'에서 역시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적어도 서울지역 신문들은 이 사건의 중요성을 감안, 사실보도만큼은 충실했던 것이다.


하지만 유독 마산에서 발행됐던 당시 <경남신문>만 가장 작은 크기(사회면 세로 2단)로 보도하면서 의도적인 축소·왜곡까지 하고 있다. '한(韓)·에(埃)축구경기 중단 / 차량방화 기물 파손' '마산서도 시위…시민반응 냉담'이란 제목의 기사였다.


이 기사에서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시민반응 냉담'이라는 제목과 "연도 시민들도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는 기사 본문의 내용이었다.


 

시위 주최측(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경남본부)은 이에 분개, 6월 22일자로 발행한 <민주경남>이라는 유인물에서 '시키나 마나 알아서 기는(?) 경남신문'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전략) 경남 일원의 유일한 지역신문인 경남신문은 마산에서 있었던 6·10규탄대회에 대해 3만여 시민이 주체적으로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일부 불순분자의 책동에 의한 것처럼 왜곡 보도하고 '시민 반응 냉담'이란 터무니없는 기사를 게재하면서도, 민정당 전당대회는 며칠간에 걸쳐 신문 거의 전체면을 할애하여 특집으로 다루는 정성(?)을 보여 왔다. (…) 일개 당의 기관지로 전락, (…) 지역신문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볼 수밖에 없게 했다.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전화가 빗발치자 '편집국장 부재중'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노태우의 6·29선언이 나온 뒤인 7월 16일 당시 3·15의거탑 옆에 있던 마산YMCA 강당에서 '지역언론 활성화를 위한 마산시민 공청회'가 열린 것도 6월항쟁의 과정에서 지역언론이 보여준 비겁한 행태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날 공청회장의 벽에 게시된 구호 중 하나는 '두눈 뜨고 볼 것이다, 경남신문 각성하라'였다.


◇독재에 빌붙은 기관 집중 타격


어쨌든 축구경기장에서 쏟아져 나온 관중들과 합세한 시위대는 엄청난 수로 늘어나 있었다. 이후의 상황을 월간 <말> 87년 8월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운동장에서 나온)시민들은 수출자유지역으로 이동하며 '최저임금 보장' '근로기준법, 파업권 쟁취'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 과정에서 수출자유지역 후문이 반파됐고 양덕파출소가 불탔다.


어린교 오거리(현 경남도민일보 앞)를 가득 메운 시위 군중.


다시 시내 쪽으로 방향을 돌린 시민들은 우병규 민정당 의원 사무실에 들어가 집기를 불태우고 대통령 사진과 우 의원 사진을 떼어 나무에 매달아 놓고 불을 질렀다. 저녁 8시쯤 시민들은 계속 불어나 오동동다리에서 전경과 대치했을 때는 약 3만5000명이 됐다. 경찰이 최루탄을 미친 듯이 쏘아대자 시민들은 경기장에서 끌고 나온 축구골대로 바리케이드를 치며 투석으로 대응했다.


경찰의 엄청난 최루탄 세례로 시민들은 분산되어 시가지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북마산·오동동파출소가 화염병에 의해 파괴되고 9시 30분쯤 신호대기중인 KBS 차 1대가 전소됐다. 이후 코아양복점 앞에 운집한 5000여명의 시민들은 '박군 고문치사 은폐조작 규탄 및 직선제 쟁취를 위한 시민토론회'를 열기위해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그러나 경찰은 다시 공격해왔고 흩어진 시민들은 이동하면서 시청 유리창 70여장을 돌을 던져 깨고 MBC 건물에 화염병을 던졌으며 자산동 파출소를 불태웠다. 시민들은 새벽 2시30분까지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로 79명이 연행되어 3명이 구속되고 16명이 구류를 받았다."


시위대가 수출자유지역 후문에서 '노동3권'을 외치며 철문을 흔들고 있다.


위 글에 나오는 양덕파출소 습격 상황에 대해 박영주씨의 노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수출 후문(철문)을 밀어 넘어뜨렸고, 또 후문 바로 앞에 있는 양덕파출소를 습격하여 두들겨 부수고 벽에 걸린 전두환 사진을 불태웠다. 바로 8년 전 여기에서 시위군중은 박정희의 사진을 찢고 불태웠던 것이다. 똑같이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시위대열의 모습에 대해서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시위대열 맨 선두에는 어떤 시민이 기증했는지 커다란 꽃다발을 두 손으로 받쳐 든 한 학생이 앞장서고, 대형 태극기 2개가 나란히 뒤따르고, 그 뒤엔 '민주헌법 쟁취하자'란 플래카드, 메가폰을 든 학생 선동조, 스크럼을 짠 학생 시위대, 시민들의 순으로 도로를 완전히 메운 채 커다란 물결처럼 서서히 이동해 가고 있었다. 시위대는 '우리의 소원' 등의 노래와 '독재타도' '호헌철례' 등의 구호를 힘차게 내질렀고, 연도의 시민들은 '잘한다'며 박수를 치거나 환호성을 지르면서 열렬히 호응했다."


이날 시위로 모두 4대의 차량이 불탔는데, 한대는 경남대 안에서 불탄 안기부 김모 조정관의 승용차(부산 1가 7783)였고, 경남5가1283호 경찰버스, 마산동부경찰서 소속 경남1가3309호 순찰차(스텔라), KBS창원총국 보도용 차량인 경남1나5199호(포니2) 등이었다.


또 시위대의 집중 타격을 받은 곳은 파출소와 민정당 지구당사무실에 이어 MBC방송국 건물이었다. 당시 분노한 시위대에게 파출소와 집권당, 지방행정기관은 물론 언론도 독재권력의 하수인으로 취급받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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