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87년 6월 10일 경남엔 무슨 일이 있었나(1)

기록하는 사람 2016. 6. 10.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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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와 시청 직원 염탐하다 발각


1987년 6·10대회의 날이 밝았다. '거사'의 시간은 오후 6시, 장소는 마산시 서성동 3·15의거탑 앞이었다.


대회 주관단체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경남본부(경남국본)이었지만, 각 대학의 학생운동세력들도 자체적으로 대회를 준비해오고 있었다. 


◇ 도내 각 대학 사전집회


경남대와 경상대·창원대 총학생회장과 운동지도부는 6월초 경상대 17동 교양학관에서 만나 10일 마산대회에 역량을 집중할 것을 결의해둔 상태였다. 이들은 우선 학교 안에서부터 대회 분위기를 고조시켜 많은 학생들을 동참시키기 위해 각각 사전집회를 열었다. 

   

특히 창원대는 이틀 전인 8일부터 총학생회장과 몇몇 간부들이 '호헌철폐와 군부독재 종식을 위한 삭발식'을 마치고 10일 오전 10시까지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다음날인 9일에는 500여명의 학생들이 오전 10시부터 1호관 3층에서 시험 연기 및 6·10대회를 위한 집회를 갖는 등 6·10대회 참가를 위한 열기 고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경남대는 10일 낮 12시 총학생회 간부들의 삭발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에 앞서 오전 10시부터 모여든 200여명의 학생이 본관 안으로 진입했고, 11시에는 학교 안 동태를 살피기 위해 들어온 안기부(현 국가정보원) 김모 조정관이 학생들에게 붙잡혔다. 이어 30분 뒤에는 마산시청 시정과 지도계 직원 2명도 학생들에게 붙잡혔다.


당시에만 해도 경남도는 물론 각 시·군 여론계와 지도계, 그리고 일선 읍·면·동 사무소에까지 '여론 담당' 공무원을 두고 경찰 정보과 형사와 거의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 측의 한 교수가 감금된 안기부 조정관과 시청 직원들을 빼돌려 버렸고, 분노한 학생들은 압수한 수첩을 통해 확인한 안기부 김 조정관의 승용차(부산 1가 7783)를 찾아내 불을 질러 버렸다. 차는 완전히 불타 버렸다.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에 의해 불타버린 경찰 버스. 뒤편으로 시위대의 모습이 보인다. /6월항쟁기념사업경남추진위


이어 12시가 되자 하용훈(중문3) 현 총학생회장과 박재혁(환경보호 3) 차기 총학생회장 당선자, 손준호(사학 3) 차기 부회장 등이 삭발하고 결의를 다졌다. 또 오후 3시에는 민주산악회 경남지부 백찬기씨도 담화를 발표하며 삭발했다.


경상대는 사전에 결의한대로 대부분의 학생들은 마산으로 집결했고, 남은 30여명이 오후 1시 민주광장에 모여 집회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200여명으로 늘어났고, 일부 간부들이 삭발과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경상대 학생 뿐 아니라 진주와 서부경남지역 농민회 간부와 회원들, 그리고 3월에 이미 대규모 학내시위를 경험한 대아고등학교 학생들도 상당수 마산대회에 집결했다. 서부경남 뿐 아니라 중부경남 일대 각 시·군에서도 농민회 간부와 재야단체 회원들이 대거 마산으로 모여 들었다.


경찰이 반도안경 앞에서 최루탄을 쏘자 한 시민이 눈을 감싸고 있다.


◇ 진주·진해·거창에서도 독자 집회


하지만 진주와 진해, 그리고 거창에서도 나름대로 독자적인 소규모 집회가 열렸다. 진주의 경우 경상대 학생들과 별도로 통일민주당 당원들을 중심으로 농성과 집회를 열었던 것이다.


다음은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모 신문기자의 메모이다.


"진주시 통일민주당 경남 제3지구당 당사에서 '국민 합의 반대하는 호헌 철폐, 행동하는 국민 앞에 박종철은 부활한다'는 유인물 살포와 함께 상오 10시40분께 옥외방송이 시작됐고, 하오 2시40분께 경찰 병력이 투입돼 일부 당원이 연행됐으며, 그 주변은 삼엄한 경찰의 경비가 펼쳐졌다. 하오 3시30분께 경찰은 당사 옥외스피커를 철거하고 연행당원을 훈방시켰다."


이 메모는 진해 상황에 대해서도 "여좌동 여좌성당 허성학 신부와 신도 50여명이 '4·13조치 철회하라'는 내용의 피킷을 들고 시내를 거쳐 성당에 입장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거창의 집회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거창지방은 10일 상오(하오의 오기인듯-기자 주) 5시40분께 거창읍 김천동 거창천주교회에서 당초 대회를 치르기로 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되자 동일시간대에 하동 제일교회 옆 민주당사에서 "더 이상 못살겠다, 거짓정권 물러가라"는 등 20여 가지의 구호를 외치고 당사에 들어가지 못한 당원 30여명은 당사 앞 길에서 함게 호응하다 하오 6시께 애국가를 부르며 '민주헌법 쟁취하여 민주정부 수립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30여m 행진한 후 만세삼창한 뒤 해산했다."


이런 가운데 마침내 총궐기 시간인 오후 6시가 됐다. 학생들은 행사장인 3·15탑이 봉쇄될 것을 예상하고 미리 마산어시장 스타회관 앞에서 대오를 짜고 진격하기로 계획했다. 제1열 경남대, 제2열 창원대, 제3열 경상대, 제4열 (주)통일 노동자 등으로 대열의 순서가 정해졌다.(월간 <말> 97년 6월호 부록 112쪽 진광현씨 인터뷰)


학생들의 예상대로 3·15의거탑 근처는 경찰에 의해 완전히 봉쇄돼 있었다. 대회를 주관한 경남국본도 결국 멀찍이 떨어진 반도안경 앞에서 행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신문기자의 메모와 함께 현 6월민주항쟁기념사업경남추진위 박영주 자료집발간팀장이 현장에서 직접 기록한 메모를 입수했다. 이 중 박영주씨의 메모는 오후 6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반도안경 앞에서 행사가 시작된 가운데 헬멧을 쓴 경찰기동대가 대회를 주도하던 공명탁 목사를 연행하고 있다.


◇ 오후 6시 마산 반도안경


행사 예정 장소인 3·15의거 기념탑 주위가 원천봉쇄됨으로 인해 인근 반도안경 앞에서 주최측(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경남본부) 인사들과 시민 200여명이 집결한 가운데 (국기하강식에 맞춰-기자 주) 애국가를 합창함으로써 행사를 시작함.


주최측은 '더이상 못 속겠다 거짓정권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를 펼치고 '민주헌법 쟁취하여 민주정부 수립하자-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선언문'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 '결의문' 등의 유인물, 소형태극기 깃발 등을 주위 시민들, 지나가는 차량 등에 나눠주며 행사를 진행하였다.


주최 측은 메가폰으로 '우리의 소원' '선구자' '님을 위한 행진곡' '농민가' 등 노래를 불렀고, 주위의 시민들도 따라 불렀다. 이 도중 학생 선동조 3명이 도착하여 플래카드를 펼치고 메가폰으로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렇게 행사가 진행 중인 6시 13분경 헬멧을 쓴 사복경찰(일명 88기동대)들이 순식간에 주최측을 덮쳐 10여명을 연행해 갔음. 이로 인해 이 쪽의 집회는 무산되고 시민들은 어시장, 부림시장 방면으로 이동해 갔음.


◇ 오후 6시 마산 어시장 도로


반도안경 앞에서 주최측의 행사가 진행 중일 때 어시장 지하도 부근에는 학생, 노동자 500여명이 집결하여 곧바로 차도를 점거하면서 시위 시작.


시위대는 분수로터리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저지하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시위대는 "독재 타도" "호헌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뿌리며 약 10분간 차도를 점거. 경찰의 최루탄 난사와 동시에 시위대는 방향을 바꿔 코아 쪽으로 진출했다. 이 때 시위대의 주위에는 상당수의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코아 쪽으로 진출하던 시위대는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고 전경버스에 화염병을 던져 불을 질렀다. 경찰은 남성동파출소 방면으로 후퇴하였고, 전경버스는 시커먼 연기와 검붉은 화염을 내뿜으며 타올랐다. 이 일대 교통은 완전 마비되었으며, 순식간에 군중의 수는 5000여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곧바로 코아를 거쳐 6호광장으로 진출했고, 군중들도 시위대의 뒤를 따르거나 불타는 버스를 구경하기 위해 운집하고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소방차가 불을 껐으나 버스는 이미 전소된 상태였으며, 인근 공사장의 차단막도 불에 그을려 녹아 내렸다. 불타는 버스를 보고 시민들 중 일부는 박수를 치거나 환호성을 질렀다.


이상이 박영주씨의 6시~6시30분 상황이다. 그러나 이 메모에서의 500명, 5000명 인원수는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직접 기록한 박씨도 최근 다시 쓴 글((사)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6월항쟁을 기록하다>, 2007,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각각 200명, 1000명으로 수정했다.


한편 당시 신문기자가 메모한 시간대별 상황에도 "18:15 의거탑 앞에서 20여명(민통련, 당원 등) 추도식 하기 위해 애국가 부르는 찰나 경찰이 최루탄 발사, 연행"으로 기록돼 있다. 또 어시장 앞 상황에 대해서는 "학생 100여명 몰려 경찰과 대치. 학생들 돌 던지고 경찰은 최루탄 발사. 학생들 화염병 던져 경남5가1283호 경찰버스 불타고 전경들 다수 부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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