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백범 김구의 의열단? 김원봉이 울고 가겠다

김훤주 2016. 6. 28.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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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에 가면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이 있습니다. 아마도 지난해 문을 열었습니다.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남사마을은 찾아온 사람들도 북적이지만 이 기념관은 언제나 조용하기만 합니다.

바로 옆에는 이동서당(尼洞書堂)도 있습니다. 이는 이 마을 출신 선비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인 면우 곽종석 선생을 기리는 뜻으로 후배들이 세웠습니다.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은 낱말 뜻 그대로 일제강점기 선비들(儒林)이 펼친 독립운동을 나름 짜임새 있게 보여주는 훌륭한 공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고 곽종석 선열'에 대한 건국공로훈장증. 유림독립운동기념관에 있습니다.

그런데 한 군데 잘못이 있습니다.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경성지점)을 폭파한 나석주 의사를 엉뚱하게 백범 김구와 연결지어 놓은 것입니다. 

왜 이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백범 김구는 유림이라 할 수 없는 사람이거든요. 백범 김구는 열일곱 나이에 동학교도가 되고 이어 동학농민전쟁에도 가담했으며 그 뒤 스물일곱부터는 기독 개신교를 믿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연결해 놓았으니 저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백범 김구 엄청나게 떠받들어지는 현실에 그냥 묻어가려는 의도가 살짝 읽히기는 합니다만 이 또한 잘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어쨌거나 기념관에 나와 있는 관련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석주 의사의 삶과 투쟁 

백범 김구 선생의 의열단에 들다 

나석주 의사는 1892년 황해도 재령군 복률면 진초리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소년 석주는 백범 김구가 세운 양산학교에 들어가면서 굳센 독립투사로 성장한다. 

나석주는 지방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독립자금을 마련하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들어가 활동했고 이동휘 선생이 세운 무관학교에서 전략전술훈련도 받았다. 

가장 먼저, 의열단은 김구와 관련이 없습니다. 물론 나중에 김구를 고문으로 모시니까 전혀 무관하지는 않습니다만. 단장은 ‘밀양 사람’ 김원봉이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밀양 사람 김대지와 황상규(김원봉의 고모부)가 지도했으며 단재 신채호가 그 강령과 노선을 밝혀주었습니다. 

게다가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길림에서 의열단이 결성될 때 김구는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으로 상해에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또 재령군 복률면은 재령군 북률면의 잘못입니다. 

뒤이어 말씀드리자면 백범 김구는 양산학교는 물론이고 다른 학교 또한 세운 적이 없습니다. 재령 양산(楊山)학교는 김구를 1907년 교원으로 초빙했을 뿐이고 1909년에는 같은 재령의 보강(保强)학교가 김구를 교장으로 삼았을 뿐입니다. 

나석주 의사 또한 양산학교와 관련이 없습니다. 관련 연보를 훑어보면 보명(普明)학교 또는 명신(明新)학교를 다닌 것으로 되어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소년 석주는 백범 김구가 세운 양산학교에 들어가면서 굳센 독립투사로 성장한다.”는 통째로 들어내야 맞습니다. 

마지막 부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들어가 활동했고 이동휘 선생이 세운 무관학교에서 전략전술훈련도 받았다.”는 앞뒤가 바뀌어 있어 어지럽습니다. 중국 망명은 1920년, 의열단 가입은 1926년, 이동휘 선생 무관학교 입학은 1915년입니다. 

어떻습니까? 난해합니다. 유림독립운동기념관 기록에 매이지 않고 순서대로 늘어놓으면 오히려 알기 쉬울 것입니다. 

1915년 북간도 나자구 동림무관학교(이동휘 등 설립) 입학. 1919년 고향에서 3·1만세운동 가담, 경찰에 체포 석방. 1920년 항일비밀결사 조직, 독립운동자금 걷어 상해 임시정부 전달, 중국 망명, 상해 임정 경무국 경호원 근무. 1923년 중국 육군군관단강습소(陸軍軍官團講習所) 입교. 1924년 중국군 장교로 복무. 1925년 상해 임시정부 돌아옴. 1926년 의열단 가입, 동척폭탄투척 의거. 

유림독립운동기념관 기록은 이어집니다. 

심산 김창숙 선생과의 운명적 만남 

1926년 나석주 의사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찾아왔다. 망명한 유림이자 저명한 독립투사인 김창숙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그 해 김구 선생과 김창숙 선생은 국내외 정세를 토론하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함께 고민하였다. 

나석주는 김창숙 선생으로부터 경제 침탈의 총본산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폭파하여 일제를 응징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체적인 거사를 계획하였다. 

적의 심장에 폭탄을 던지다 

1926년 12월 중국인 마중덕으로 변장한 나석주 의사는 인천으로 잠입했다. 12월 28일,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에 폭탄을 던지고 총격전을 벌여 경기도 경찰부 경감과 동양척식주식회사 차석 등 3명을 사살하고 총알이 떨어지자 교전 중 자결하였다. 

셋째 문장은 차라리 없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1926년 톈진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던 항일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그 해 6월 톈진에 있던 민족지도자 김창숙으로부터 경제침탈의 총본산 동양척식주식회사·조선식산은행을 폭파·파괴하여 일제를 응징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구절이 맞다면 나석주와 김창숙은 톈진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당시 김구는 임시정부 내무총장을 맡아 상해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김구 선생과 김창숙 선생은 국내외 정세를 토론하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함께 고민하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굳이 김구랑 연결지으려면 나석주 의사가 임시정부 경무국에 소속되어 경호원으로 일하고 있을 때 그 경무국 책임자인 국장이 바로 김구였다고 하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어거지로 엉터리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나오는 전통 선비 심산 김창숙 선생과 관계를 좀더 도드라지게 하면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의 취지에도 더 걸맞고 좋을 텐데, 엉뚱하게 김구를 끼워넣는 바람에 그런 효과는 크게 줄고 말았습니다. 나석주는 의거에 쓸 권총과 폭탄을 김창숙이 건넨 군자금으로 톈진에서 사들였다고 합니다. 

활동 노선으로 보아도 나석주는 김구와 무관하고 김창숙과 가깝습니다. 백범 김구는 속마음이야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1923년 6월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취임한 뒤로는 임시정부만 싸고 돌았습니다. 그 무렵은 내분과 무능으로 거의 무정부 상태였던 임시정부였습니다. 

지금 손가락이 짚고 있는 데가 '나석주 의사 의거'입니다.

대충 이렇습니다. 1924년 4월 이동녕 국무총리 취임, 1925년 3월 이승만 대통령 면직, 박은식 임시대통령 취임, 7월 박은식 임시대통령 사임, 9월 이상룡 국무령 취임(내각책임제), 1926년 1월 양기탁 국무령 취임, 4월 이동녕 국무령 취임, 5월 안창호 국무령에 선출, 5월 이동녕 국무령 재취임, 7월 홍진 국무령 취임, 12월 홍진 내각 총사퇴-김구 국무령 취임. 

반면 김창숙은 뚜렷한 지향을 갖고 활동에 나섭니다. 바로 무장투쟁노선입니다. 이시영·이상룡 등이 1919년 건설한 서로군정서(軍政署=군정부)에서 군사선전위원장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김창숙은 먼저 1921년 임시정부 대통령이던 이승만이 미국에 조선 위임통치를 청원하자 이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신채호 등과 함께 발표했습니다. 이승만에 빌붙어 있었던 김구랑 크게 대비됩니다.

또 1925년에는 조선에 들어와 군자금을 모금한 적이 있는데, 이는 해외무장독립운동기지 건설이 목적이었습니다. 1924년 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장개석의 중국국민당을 교섭해 만주·몽골 접경지역 황무지를 한인들 집단 거주지로 삼고 개간해 독립투쟁기지로 삼기로 한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역사 사실로 보나 당시 정황으로 보나 활동노선 또는 투쟁 방향으로 보나, 백범 김구는 나석주 의사와 크게 관련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지만, 백범 김구는 의열단과도 별무관련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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