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에 있는 문화재 가운데 뇌룡정과 영암사지 귀부(동·서 제각각 하나씩)가 수리 또는 보수를 받았습니다. 더 많은 문화재가 수리·보수를 받았을 수 있지만 제가 아는 범위에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삼가면 외토리 남명 조식 선생 생가(외가) 마을에 있는 뇌룡정은 선생이 김해 처가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1548년 지어져 가까운 단성 덕산으로 나간 1961년까지 13년 동안 제자들 가르쳤던 공간입니다. 


일제강점 직전 1900년대에는 의병장 왕산 허위 등이 고쳐 짓기도 했다는 건물입니다. 허위 선생은 일제의 민비 시해로 일어난 을미의병(1895년) 그리고 고종 폐위와 군대 해산으로 일어난 정미의병(1907년)에 모두 떨쳐나선 인물로 1908년 일제에 붙잡혀 교수형을 당합니다. 


1890~1900년대 나라가 어려운 시절, 뜻있는 이들 사이에서는 옛날 선현들의 자취와 문화유산을 찾아 둘러보자는 분위기가 널리 퍼졌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런 과정에서 허위 선생 등이 허물어진 남명의 유적 뇌룡정을 보고 고쳐 지을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뇌룡정에는 주련이 둘 있습니다. ‘시거이룡현(尸居而龍見)’이 하나이고 ‘연묵이뢰성(淵默而雷聲)’이 다른 하나입니다. 앞엣것은 ‘시체처럼 죽은 듯 있다가도 용처럼 나타난다’는 뜻이고 뒤엣것은 ‘깊은 못처럼 조용하다가도 우레처럼 소리낸다’는 말씀입니다. 


옛적 뇌룡정 현판과 주련.


동양 고전 <장자>에 나오는 글귀인데요 ‘평소에는 가만히 지내다가 필요한 때만 나타나 할 일 하면 된다’는 얘기랍니다. 그러니까 시도 때도 없이 나대지 말고, 외적 침략을 받았다든지 자기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만 몸을 일으켜 할 일을 하라는 것이지요. 국토 순례를 하던 왕산 허위 선생도 여기 들러 그런 뜻을 되새겼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너스레가 길어졌습니다만, 그런 뇌룡정이 2013년과 2014년 즈음에 해체·이전·복원이 되었습니다. 원래는 외토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양천강 강변에 바짝 붙어 있었는데 제방 공사를 하면서 원래 자리로부터 남서쪽으로 30~40m 옮겨진 자리에 새로 들어섰습니다. 


저는 원래 자리에 있는 뇌룡정이 좋았습니다. 뒤편과 오른쪽을 감싸는 느티나무 등등의 품새도 좋았고 양천강 건너편 산세와 어우러지는 모습도 좋았고 적당하게 낡은 데서 오는 친근함도 좋았습니다. 뇌룡정을 둘러싸고 있던 나무 등등도 함께 옮겨지기를 기대했지만 합천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새로 건물만 옮겨 지어졌고 둘레에 어울려 있던 다른 물건들은 ‘이전’되지 않아 좀 휑뎅그렁했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는데요, 한편으로는 새로 옮긴 그 건물도 사람 손길과 발길을 머금고 비바람을 맞으며 세월이 지나게 되면 자연스레 나름대로 분위기를 내뿜지 않겠느냐 생각도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늦었지만 잘못을 꼽아본다면 축대가 그렇고 지붕과 기와가 그렇습니다. 옛 뇌룡정과 새 뇌룡정을 견주어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옛 뇌룡정은 축대가 네 층이지만 새 뇌룡정은 세 층입니다. 이렇게 낮아지다 보니 제 느낌으로는 새 뇌룡정이 상승감·긴장감이 좀 덜해졌습니다. 


옛적 뇌룡정.


축대에 쓰인 돌도 문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새 뇌룡정은 옛 뇌룡정에서 축대 돌들을 전부 가져와 쓰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모습이 희미해졌을 뿐만 아니라 재질조차 다른 돌을 쓴 것 같아 지역색이 그만큼 옅어졌습니다. 


옛 뇌룡정 축대 돌은 합천 삼가 외토마을 일대에서 많이 나는 돌들이었을 것입니다. 화강암 계열로 짐작되는데요, 새 뇌룡정 축대에는 화강암 계열도 있지만 듣도 보도 못한 듣보잡 재질도 적지 않게 섞여 있습니다. 


화성암 계열이지 싶은데 이처럼 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돌들은 남해 바닷가에 많이 있지 합천 일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또 듣기로는 화성암은 중국 등지에서 수입해 쓰는 경우가 많다는데, 새 뇌룡정이 그렇게 꾸며지지는 않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새로 지은 뇌룡정.


이어서 지붕과 기와 모습을 보겠습니다. 옛 뇌룡정과 새 뇌룡정 모습을 견주면 이렇습니다. 가운데 용마루에서 뻗어내린 수키와가 원래는 28줄입니다만 옮긴 뒤는 26줄로 2줄이 줄었습니다. 반면 양옆 기울어진 부분의 수키와는 원래는 8줄씩이었지만 옮긴 모습은 9줄씩으로 1줄씩(그러니까 합하면 2줄)이 늘어났습니다. 


왜 이런 착오가 일어났는지 모르겠으나, 어쩌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다른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원래 모습대로 복원(復元)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건물이 대체로 퍼지고 펑퍼짐해진 것 같은 느낌이 저는 드는데, 이게 저 혼자만의 느낌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지 싶습니다. 


같은 합천에 있는 영암사지 귀부도 목욕을 잘못 시켜 다친 것 같습니다. 3월 13일 영암사지 바로 아래 나무실마을로 농부시인 서정홍 선배를 만나러 갔다가 잠깐 들렀습니다. 영암사지 귀부는 거기서 벌거벗겨져 있었습니다. 


이끼처럼 세월의 더께라고나 할만한 같은 것들이 달라붙어 있어 오랜 세월 거기서 버티어 왔음을 알게 해주는 귀부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 그런 것들이 한 톨 남김없이 깨끗하게 ‘제거’되어 있었습니다. 



건식 세척을 했는지 습식 세척을 했는지 약품 처리를 했는지 그라인더 같은 도구로 갈아내는 연마 작업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저는 귀부가 벗겨져 알몸을 하얗게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너무 뜻밖이어서 깜짝 놀란 저는 귀부에 다가가 표면을 살폈습니다. 색깔이 하얘서 맨눈으로도 뚜렷하게 알아볼 정도는 되지 못했지만, 거북 등짝(귀갑문龜甲紋)에는 쇠나 돌에 긁힌 자국이 가로 세로로 나 있었습니다. 


귀갑문이 없는 귀부.

귀갑문이 뚜렷한 귀부.


문화재가 무엇 별스러운 존재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그만이기는 합니다. 여기 귀부가 보물 489호로 지정되어 1968년부터 줄곧 보호받아 왔지만 세월이 흐르고 시절이 달라짐에 따라 대접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여기면 이 또한 어쩔 수 없습니다. 


2013년에 찍어 놓은 귀갑문이 없는 귀부 사진.


2013년에 찍어놓았던 귀갑문이 뚜렷한 귀부 사진.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이보다 더한 엉터리가 없습니다. 문화재를 제대로 보전하기 위해 관리 보수 수리 세척 처리를 하는 것일 텐데, 그 결과로 오히려 문화재에 흠집이 났으니 저는 달리 생각할 도리가 없습니다. 


사소한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잘못도 있습니다. 영암사지 어귀에 있는 안내판 내용이 사실과 다릅니다.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은 사적이 아닙니다. 사적이 될 수도 없습니다. 사적이란 어떤 물건을 이르는 개념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었던 장소 또는 공간을 가리키는 낱말이니까 말씀입니다. 



그런데 쌍사자석등을 일러 사적 제131호라 적어 놓았습니다. 사적 제131호는 영암사지입니다. 옛날 영암사가 있었으리라 짐작되는 영역입니다. 쌍사자석등은 보물입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보면 1963년 1월 보물 제353호로 지정되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한 번 더 보면, 이런 영암사지와 영암사지 곳곳에 있는 보물 같은 문화재들을 관리하는 주체는 합천군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일러놓은 이런저런 지적에 대해 누군가가 응답을 해야 한다면, 그 주체는 가장 먼저 합천군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기는 합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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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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