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형 작가/조현오의 구겨진 제복

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기록하는 사람 2015. 4. 27.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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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 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조현오가 처음 맡은 직무는 부산 금정경찰서 생활안전과장이다. 생활안전과 주 업무는 범죄 예방과 검거로 파출소와 지구대가 하는 일을 떠올리면 된다. 1990년 말은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때다. 범죄가 잦은 유해업소 단속이 생활안전과 주요 업무였다.


주당 80~100시간을 근무하던 때다. 경찰은 야간 근무도 해야 했다. 같은 여건 속에서도 성실하게 근무하는 직원이 있었고 순찰 시간에 산자락이나 주유소 뒤편에 운전석을 뒤로 젖혀 자는 직원도 있었다. 조현오는 교육과 순시를 병행하며 조직을 다그쳤다.



경찰 지휘부가 단속 실적을 다음 인사에 반영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조현오가 원하는 보직은 형사과장이었다. 경찰서 형사과장은 그가 외무부 생활과 바꿀 만한 ‘로망’이었다.


경찰서 과장이 현장을 챙기니 파출소장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해 조현오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실적과 성과를 낸다. 하지만, 그 대가는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 조현오는 부산동부경찰서 보안과장(당시 대공과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보안과는 공안 업무, 즉 안보 분야를 담당한다. 이른바 간첩을 잡는 곳인데, 조현오가 가장 원하지 않는 보직이었다.


조현오는 좌절감과 분노에 휩싸였다. 주변에서는 ‘돈’과 ‘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쑥덕거렸다. 결국 조현오는 경찰고위급을 잘 아는 지인을 통해  빽을 썼다고 털어놨다. 그리고 부산동부경찰서 형사과장에 발탁된다. 그런데 조현오는 빽을 쓰면 돈을 갖다줘야 하는 당시 관례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냥 고맙다는 전화 한통만 넣었는데, 인사성이 없다는 말 뜻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한다. 


경정 6-8년차가 되면 조현오도 ‘경찰의 꽃’이라는 총경 승진을 눈앞에 둘 것이다. 문제는 총경 이후였다. 총경까지는 부산에서 승진할 수 있지만 경무관으로 승진하려면 서울에서 근무해야 한다. 하지만, 서울에서 승진 경쟁을 벌일 계장들이 조현오가 서울로 오는 것을 반길 리 없다. 조현오는 총경까지가 한계라는 생각에 서울 근무를 포기했다.


1995년 1월 느닷없이 사건이 터졌다. 누군가 경찰 승진시험 문제지를 몰래 유출하다 적발당한 것이다. 문제점을 보완해 시험 관리 방식을 완전히 뒤바꿔야 했다. 경찰은 경무국장, 교육과장, 고시계장 등을 교체하면서 적임자를 찾아야 했다. 당시 박일룡 경찰청장은 전국을 뒤져 가장 청렴한 고시 출신 선발을 지시했다. 형사과장 시절 수사비 전횡을 끊어낸 조현오가 눈에 띄었다. 조현오는 경찰청 고시계장으로 근무하면서 시험 과목, 응시 방식, 채점 방식 등을 모두 전산화했다.



1996년 조현오는 치안비서실 근무를 맡는다. 이때 이택순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행정고시 출신으로 형사정보를 담당했다. 신참인 조현오는 교통, 외사, 보안, 해경 등 잡다한 영역을 맡았다. 상사는 빈번하게 조현오 업무 능력을 문제 삼았다. 조현오 역시 정보업무가 힘들었다. 치안비서관과 경찰청 정보국장이 모두 승진 대상이면 알력이 생길 수 있다. 알력이 생기면 정보 제공이 수월하지 않다. 또 정보 분야는 인적 네트워크가 뒷받침돼야 한다. 당시 경찰 조직은 간부후보생이 잡고 있었다. 경찰대 1기 출신은 1985년 경위로 시작해 1996년 경정으로 승진, 경찰청 계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조현오는 상사에게 구박받으면서 이택순과 가까워졌다.


1997년 조현오는 총경으로 승진했다. 총경으로 승진하면 보통 지방청 참모를 1년 정도 하고 서장으로 나간다. 일반적으로 처음 나가는 지역은 ‘3급지’인데 경찰서 직원은 100명 정도다.


조현오가 총경이 되면서 맡은 첫 직무는 경남지방경찰청 경비과장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던 당시 울산 현대자동차에 불어 닥친 구조조정 바람은 심상찮았다. 1998년까지 울산은 경남지방경찰청 담당 지역이었다. 당시 조현오는 상황을 주시하며 경비 대책을 마련했다. 현대자동차 직원이 태화강 둔치에 수만 명이 모여서 궐기대회를 열었고 조현오는 집회 현장에 나갔다.


당시 울산 지역 경찰서는 모두 ‘1급지’로 서장들은 조현오보다 나이가 많았다. 주변에서는 신참 경비과장인 조현오가 나이가 많은 서장에게 무전 점호하는 것을 말렸다. 누가 봐도 욕먹을 짓이었다. 하지만, 조현오는 업무와 관련된 일에 대해 양보가 없었다. 이런 당찬 모습을 눈여겨본 전병용 경남지방경찰청장은 김세옥 경찰청장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1급지’인 울산남부경찰서장에 조현오를 적극적으로 추천한 것이다.


울산은 1997년 광역시로 승격됐다. 도시가 커지면 그만큼 치안 수요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외지에서 온 사람이 많고 유흥업소가 밀집한 도시에는 살인, 강도, 성폭력 사건 발생이 잦다. 대가를 받고 오락실이나 룸살롱 등 업주를 봐주는 경찰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울산은 경남지방경찰청이 있는 창원과 멀었다.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통제하며 장악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조현오가 울산으로 오기 전날인 6월 30일, 현대자동차 사측은 노동자 수천 명을 정리해고 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은 울산동부경찰서 관할이다. 현대자동차 집회는 대치만 있었을 뿐 격렬한 상황은 아니었다. 조현오 서장은 경비를 담당했다. 그 사이 당 노사정지원특별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노무현 국민회의 부총재가 7·8월 울산을 방문했다. 8월 말 277명을 정리해고 하는 것으로 최종 노사 합의안이 나왔다.


현대자동차 사태가 진정되자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해고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경찰 안에서 바로 소문이 돌았다.


“야, 너 조현오 서장 알아?”

“네, 좋으신 분입니다.”

“야! 조 서장이 다 자르고 있어.”

“돈을 먹었으니까 잘리겠지요. 그 분은 돈 먹는 거 봐주지 않아요.”

“야, 그래도 너무 캐더라.”


조현오는 울산남부서장으로 근무하면서 부패와 비리를 깨끗하게 정리했다. 조현오가 근무하는 1년 동안 음주운전 사망자는 120명에서 70명으로 줄었다. 게다가 울산남부서 관할 3개 검문소 실적이 경남 전체 25개 검문소 가운데 1·2·3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3급지인 사천경찰서장으로 발령받는다.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울산남부서에서 거둔 성과는 아무리 봐도 3급지 발령 근거가 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현오는 이번 인사가 청탁을 하지 않아 생긴 결과라는 말을 듣게 된다.



조현오는 경남 사천에서 마음을 다잡았다. 경무관으로 승진하려면 서울 근무가 반드시 필요했다. 경찰청이나 서울지방경찰청 수사과장, 형사과장, 정보과장 등이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조현오는 그런 자리로 자신을 끌어줄 인맥이 부족했다.


2002년 1월 조현오는 경찰청 입성에 성공한다. 그가 맡은 일은 ‘사이버테러대응센터장’이었다. 당시 조현오는 경찰청 내 총경 가운데 딱히 아는 얼굴이 없었다. 서울 근무 경험도 적었고 고시 출신 중에서도 아주 드문 외무고시 출신이었다. 조현오가 인사 문제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는 같은 외무고시 출신인 허준영이었다.


조현오는 다음 보직을 기다렸다. 그는 곧 서울지역 경찰서장을 맡게 되는 순서였다. 총경 인사권은 경찰청장에게 있다. 조현오는 당시 최기문 경찰청장이 자신을 탐탁찮게 여겼다고 했다. 2003년 4월 조현오는 서울종암서장으로 부임한다. 아무도 견제하는 이가 없는 자리였다. 경쟁자들이 선호하는 보직은 종로서, 강남서, 서초서, 영등포서, 남대문서, 중부서, 송파서 서장이었다. 경무관 승진은 좋은 보직을 거쳐 실력을 인정받아야 했다.


서울종암서장 부임 1년째가 되자 조현오는 다음 보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소식이 들렸다. 허준영 치안비서관이 승진해 2004년 1월 서울경찰청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이어 서울경찰청 형사과장을 직위공모 한다는 공지도 떴다. 조현오는 당장 신청했고 허준영도 거들었다. 하지만, 최기문 경찰청장은 승낙하지 않았다.


조현오는 그 사이 특수수사과 면접도 했다. 당시 특수수사과는 청와대 조직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청와대가 원하는 수위에서 사건을 조사하고 멈췄다. 면접 장소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이었다. 승진이 급했던 조현오는 최대한 충성심을 보이고자 했다. 하지만, 특수수사과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조현오는 최근에도 낙방 이유를 알지 못했다. 취재 과정에서 다른 경로를 통해 당시 조현오가 탈락한 이유를 들었는데, 청와대 말을 잘 듣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한다.



연달아 떨어진 조현오는 허준영에게 체념하듯 말했다.


“기동대장으로 갈까요?”

“그러지 말고 다음 인사 때 움직여라.”


당시 경비 담당인 기동대장(지금은 기동단장)은 총경 승진을 바로 한 사람이 가는 자리였다. 조현오가 서울종암경찰서에서 1년 반을 보내자 경찰청 외사수사과장(당시 외사3과장) 직위 공모가 공지됐다. 누가 뭐래도 조현오는 외무고시 출신이다. 그가 외사수사과장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누구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2004년 7월 조현오는 경찰청 외사수사과장(당시 외사3과)이 돼 미근동으로 돌아왔다. 현재 경찰청 과장(총경)은 모두 46명이다. 경찰청도 사람 사는 동네라 경찰청 안에서 유명한 사람은 곧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특히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과장이 주요 비난 대상이었다.


조현오는 그런 쪽으로 포함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식당에서 조현오 과장이 지나가면 직원들은 “자장면을 시켜먹어도 독상을 받을 분”이라고 소곤거리곤 했다. 그만큼 권위적이고 편하게 다가가기는 어려운 상관이었다.


<다음 4화-관운2 편은 29일 업데이트 됩니다.>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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