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은 도시도 시골도 집을 짓는 현장이 많았습니다. 대충 볼 때 도시는 이미 지은 1층 위에 새로 2층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고, 시골에서는 1층부터 새로 짓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네팔은 벽을 치고 나서 천장을 콘크리트로 이어붙인 다음 그것이 굳을 때까지 받쳐두는 자재로 대나무를 쓰는 것이 색달랐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파죽지세(破竹之勢)라는 말처럼 세로로 잘 갈라지기 때문에 대나무는 무거운 물건을 떠받치지 못하는데요 네팔서는 길게 잘라 그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네팔 대나무는 우리나라 대나무보다 훨씬 굵게 훨씬 높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기후가 아열대성으로 우리나라보다 많이 따뜻한 덕분이지 싶었습니다. 우리나라 대나무는 집 뒤 언덕배기 따위에 무리를 이루지만 네팔 대나무는 집 뒤보다는 들판이나 산비탈에 수십 그루씩 자라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대나무를 보고도 대나무로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우리나라 대나무와는 모양이 많이 달랐습니다. 키가 아주 높이까지 자라나 있었고 또 위쪽 끄트머리는 마치 잎을 늘어뜨린 파초 또는 우리나라 길가 수양버들처럼 고개를 숙인 채 땅을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작 재어놓은 데를 받치고 있는 대나무. 앞에는 밑둥이 빠진 대나무 광주리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아무리 높게 자라나 있어도 그 끝은 다만 조금 수그려져 있기는 할 뿐 그 기색은 아무래도 하늘을 향하는 분위기인데 말씀입니다.

 

저는 이런 네팔 대나무를 보면서 우리 옛사람 고산 윤선도가 조선이 아니라 네팔에 태어났다면 아무리 오우가(五友歌)를 짓고 대나무를 노래했어도 ‘꼿꼿하다’거나 ‘곧다’고는 하지 못했으리라 짐작하면서 속으로 슬쩍 웃었습니다.

 

왜,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시조. ‘나모도 아닌 거시 플도 아닌 거시/ 곳기는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는다/ 더러코 사시에 프르니 고를 됴하하노라.’

 

텃밭 울타리도 이렇게 대나무를 엮어 만들었습니다.

 

온대인 우리나라서는 대나무가 하늘을 향해 쭉 뻗는 느낌이 나기에 무슨 지조나 절개의 곧은 상징이 될 수 있었지만, 아열대인 네팔에서는 너무 많이 자라는 바람에 끝이 아래를 향해 처져 있기에 그렇게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나무가 이렇게 지천으로 있으니 네팔에서 대나무가 사람들 삶에 깊숙하게 들어 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합니다. 예나 이제나 사람들은 자기 가까운 데서 먼저 쓸만한 거리를 장만하려 드니까요.

 

아마도 대나무가 없었다면 적어도 네팔 히말라야 골짜기 사람살이는 지금과 크게 달라져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여기는 자동차나 오토바이는 물론 어떤 바퀴도 굴러다니지 못하는 길이 아직도 많기 때문에 사람 힘이나 조랑말을 써서 물건을 나릅니다.

 

대나무 광주리를 이고 진 아이들. 사람 크기에 따라 광주리 크기도 다릅니다.

 

그런 때 쓰는 광주리를 바로 이 대나무로 만드는 것입니다. 대나무 껍질을 벗겨 쪼개면 부드럽고 탄력이 있으면서도 질긴 재료가 됩니다. 부드러워서 얼기설기 짜기 좋고 탄력이 있어 짜고 나면 꽤 큰 공간이 안으로 만들어지며 질기기 때문에 낡아서 헤질 때까지 오래오래 쓸 수 있습니다.

 

네팔 사람들은 이런 광주리를 천으로 묶은 다음 이마에 두르고 산길을 오르내리는데요, 요즘 배낭과도 견줄 수 없으리만큼 많은 짐이 그 안에 들어간답니다. 그러니 만약 그런 대나무가 있지 않았더라면 네팔 사람들 물건 나르는 수고가 지금보다 몇 배는 더해지리라 짐작되 것입니다.

 

 

대나무는 이밖에도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집 앞 텃밭 울타리로도 쓰이고 게스트하우스 앞마당 빨랫줄에도 대나무는 걸쳐져 있었습니다.(다만 죽부인(竹夫人)은 보이지 않았는데, 여름 날씨가 우리나라처럼 찌는 무더위(물+더위)가 아니어서 쓸모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마당 한 쪽 구석 ‘어리’는 참 정겨웠습니다. 짐을 나를 때 쓰는 광주리를 거꾸로 엎어놓은 듯이 생긴 것이 바로 어리입니다. 우리랑 같은 몽골리안인 타루족이 사는 마을 농가 안마당에서 발견하고는 슬몃 들여다봤더니 어미 오리 한 마리와 새끼 오리 여러 마리가 바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농사짓는 시골 출신인지라, 어린 시절 병아리를 어리에 가두고 풀어주고 하면서 그 조그만 닭의 새끼 품고는 따뜻한 체온을 주고받고 했던 기억이 새삼 돋아났습니다. 그러다 어떤 날은 아침에 닭장에 가보면 닭은 사라지고 깃털만 몇몇 남아 허망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엄마는 혀를 끌끌 차면서 범인으로 족제비를 지목하곤 했었습니다. 닭을 잃고 나서 바로는 물론 아니었지만, 엄마가 그런 족제비를 잡아 가죽을 벗겨내고는 빨랫줄에 말린 적도 있었으니 일진일퇴 공방이 있었던 셈입니다.

 

이같은 짐승과 사람 사이 가축을 둘러싼 공방이 네팔에서는 지금도 그다지 낯선 일은 아니겠지요.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사라진 아련하지도 않은 옛날 추억으로만 남았지만 말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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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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