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3200m 푼힐에 올랐다 돌아오는 트레킹에 처음 접어들었을 때 저 멀리 길이 보였습니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길바닥에 무엇인가 깔려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푸르게도 보이고 희게도 보였는데, 저는 그냥 콘크리트를 쳐서 바닥에 깔았겠거니 지레짐작하고 좀 낙담을 했습니다. 그러잖아도 대한민국에서도 질리도록 밟고다닌 콘크리트고 아스팔트인데 여기 네팔 히말라야까지 와서도 저런 콘크리트 계단을 타고 올라야 한다니…….

 

그러고 있는데 영주형 얘기가 들렸습니다. “저기 길에 바닥에 뭐가 깔려 있지? 저게 돌이야. 히말라야가 젊은 지형이라서 저런 돌이 많아. 살짝만 쳐도 편평하게 옆으로 잘 갈라져서 계단으로 쓰기에 아주 좋아. 우리나라로 치면 청석쯤 될까?” 역시 영주형이었습니다. 네팔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좀 엉뚱하지만, 돌 이야기를 하니까 문득 중학교 때 어느 소설에서 읽은 글귀가 생각났습니다. 누가 쓴 무슨 소설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강한 역설과 대비가 제게 깊은 인상을 남긴 때문인지 지금도 한 번씩 툭툭 떠오르는 글귀입니다.

 

평평한 돌을 박아 이쪽저쪽을 갈라놓고 아래에 홈을 냈습니다. 물은 여기를 통해 흐릅니다.

 

“돌, 이보다 단단한 결속이 어디 있단 말인가. 부딪히면 깨어질 정도로 단단한 결속인 것이다.” 서로 아끼고 위하는 한 가정이 어찌어찌 해서 무참하게 망가져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로 기억됩니다만, 돌은 단단하기에 깨어지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진흙은 단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부딪혀도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 해도 돌이 지나치게 단단해도 히말라야서는 곤란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우리나라에 많은 화강암은 아주 단단하기 때문에 쉽게 깨어지지 않을 뿐더러 정교하게 때려도 일정한 방향을 타고 갈라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히말라야는 젊은 지형이어서 지층의 압력을 오래 받지 않았기에 그 돌들이 화강암보다 덜 야문 모양입니다.

 

나무그늘 아래 납작돌을 쌓아 만든 쉼터. 앞쪽 돌을 자세히 보면, 우리나라 고누판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제가 보기에 네팔 으뜸 문화유산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이 돌계단입니다. 힌두사원 불교유적 이런저런 자연공원이 있지만 그 내력과 사연과 지금껏 이어지는 쓰임새와 실생활에 미치는 영향 등등으로 보자면 돌계단이 제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늘로 날아서 실어나른다면 몰라도, 모든 물자가 이 돌계단 돌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유통될 수 없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 농사짓고 가축 기르는 온갖 도구, 집짓는 자재, 학교에서 아이들 공부하는 문구, 그리고 게스트하우스에서 트레커들한테 파는 갖은 음식 이런 오만 것들이 돌계단을 오르내립니다.

 

게다가 전화 같은 것이 없었던 시절에는 이 돌계단 돌길은 정보가 유통되는 가장 유력한 통로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사귀고 연애하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무엇을 꾸고 갚고 종교의식을 거행하고 죽어서 장례하고 하는 모든 교류와 행사가 돌계단 돌길을 통했을 것입니다.

 

이곳 사람들 처지에서는 없으면 안 되는 목숨줄 같은 존재인 셈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밟고 지나다니면 생기는 자연스런 산길은 언제나 걷기가 썩 좋은 편은 아닙니다. 한 번 걸어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비탈이 심한 가풀막 같은 데에 디딜 돌이나 붙잡을 나무가 없고 바닥은 흙(그것도 모래흙)만 깔려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사람한테도 버거운 이런 비탈을 소나 말은 아예 지나다닐 수가 없습니다. 돌계단은 그렇게 비탈이 많이 지고 가파른 데는 돌계단이 놓여 있었습니다.

 

물론, 돌계단이 아닌 데도 없지 않습니다.

 

깔린 돌이 좀 색다릅니다.

 

평평하거나 조금밖에 비탈지지 않은데도 깔려 있는 돌계단은 또 다른 사정이 있었습니다. 흙바닥이 걷기 어려울 정도로 늘 젖어 있거나 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돌계단을 놓는 일은 아주 고된 노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거의 대부분 산길에대 돌을 깔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위치나 각도 등을 섬세하게 배려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노동의 고단함을 뛰어넘는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넓적돌을 고쳐 까는 작업 현장.

 

깨진 데를 들어내고 깔 새 넓적돌이 오른편에 기대어져 있습니다.

 

앞에 여자들말고 뒤에 남자들 지고 가는 물건이 바로 돌들입니다.

돌계단은 사람한테도 유용하지만 소나 말이 다니는 데는 더욱 유용합니다. 특히 조랑말(pony)을 빼고는 히말라야 산악지대 사람살이를 얘기하기 어렵습니다. 조랑말은 걷기 힘든 사람도 태우고 사람이 감당 못하는 무거운 짐도 옮깁니다.

 

 

조랑말은 흙비탈을 다니지 못합니다. 반면 돌계단이 놓여 있으면 따각따각 발굽소리 내며 쉽게 오르내릴 수 있습니다. 조랑말은 히말라야형 택시 겸 트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돌계단이 없었으면 조랑말도 없습니다. 조랑말이 없었다면 히말라야 사람들은 훨씬 더 팍팍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어쩌면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랑말을 위해서 돌계단을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퍽이나 넉넉한 돌계단 너비가 그런 짐작을 가능하게 합니다.

 

히말라야 젊은 지형이 만들어낸 이 잘 깨어지는 돌은 돌계단 말고도 여러 군데 쓰이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다른 데로 빼돌리는 물길을 내는 데도 쓰입니다. 물길은 우리가 걷는 길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길을 따라 위아래로 나 있기도 했습니다.

 

물받이통. 아래쪽 진펀한 데 옆으로 나란한 돌들은 물길 뚜껑 노릇도 합니다.

 

현지 사람들이 논밭을 오가는 데 쓰임직한 오솔길도 비탈진 데는 얇고 평평한 이 돌을 박아 딛도록 해 놓았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들 목을 축이는 데 요긴했을 옹달샘이나 물받이통도 재료가 돌입니다. 곳곳에 들어선 쉼터 또한 얇게 저민 돌을 층층이 쌓아 만들었습니다.

 

오르내릴 때 디디라고 박아넣은 넓적돌.

 

쉼터.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악지대다 보니 평평한 땅에 바로 지은 경우는 드물고 아래쪽 3~4m를 이런 돌들로 쌓아올린 위에 지은 집들이 많습니다. 지붕도 이 얇고 널따란 돌로 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무로 이은 너와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돌판이었습니다.

 

돌축대와 돌마당.

 

유리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지붕이 모두 넓적돌입니다.

 

심지어 대문조차도 그랬습니다. 제주도에서 흔히 보는 정낭 같은 모양인데 양쪽에 이런 얇게 떼어낸 돌을 세우고 가운데 대나무를 가로질렀습니다. 집에 사람이 있으면 가운데 대나무를 빼놓습니다.

 

 

콘크리트 만드는 데도 돌은 쓰입니다. 히말라야에는 아직 나무 집이 많지만 콘크리트 집도 심심찮게 보였습니다. 콘크리트는 시멘트와 모래와 자갈을 섞어 만듭니다. 깊은 산골에 모래가 많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모래를 적게 쓰기 위해 사람들은 이 돌을 더욱 잘게 쪼개어 시멘트·모래와 함께 버무린다고 합니다.

 

일가족이 돌을 잘게 깨고 있습니다. 영주형은 "이 일을 하도록 돼 있는 '카스트'"라 했습니다.

 

히말라야 사람들은 히말라야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돌과 더불어 살아왔습니다. 돌로 길을 내고 돌로 계단을 만들고 돌로 축대를 쌓고 돌로 지붕을 이고 돌로 문을 세우고 돌로 물을 가두고 물길을 냈습니다. 젊은 히말라야가 만든 돌들은 2000년 3000년 동안 사람살이를 떠받쳐온 자연의 선물이었습니다.

 

화단조차 돌을 꽂아 구분지었습니다.

 

특히 돌길 돌계단은 히말라야 사람살이를 대표하는 역사 유물입니다. 대부분 유물은 삶과 멀찌감치 떨어져 감상하는 대상이기 십상입니다만, 히말라야 골짜기 많은 마을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돌계단은, 지금도 사람과 가축이 오가며 때로 부서지고 때로 고쳐지는 사람살이의 현장이었습니다.

 

나중에 고치는 데 쓰려고 갖다 놓은 넓적돌들.

 

걷는 내내 "이것도 돌이네", "우와 축대 봐라. 5m는 되겠다"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있었습니다. 영주형하고도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크게 멀리 앞서가버린 상태였습니다. 

 

점심 먹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이런 소감을 말했더니 이랬습니다. "그럼! 돌계단이야말로 수천 년 내려왔으면서도 지금껏 살아 있는 피땀어린 문화유산이지. 그런데 4000m 넘으면 길도 좁고 돌계단도 없단다." "왜요?" "거기는 사람이 안 살거든." 제가 참 멍청합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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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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