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시골 학교 책읽는 아이 웃음이 야릇한 까닭

김훤주 2014. 8. 27.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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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2일 저녁에 있었던 창원교통방송을 위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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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밀양으로 떠나보겠습니다. 밀양은 얼음골이 유명합니다만, 지금 보자면 얼음골은 이름만 남았습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사람들 접근이 차단된 탓에 그 얼음골 여름에 얼음 얼고 차가운 바람이 끼치는 골짜기를 실감하기란 무척 어렵게 됐습니다. 얼음 말고는 별로 보고 만지고 놀고 할 거리가 없는 얼음골에서, 지금은 얼음을 철재 칸막이 너머로 겨우 지켜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가까운 데에 호박소는 여전히 대단합니다. 호박소 일대 골짜기는 가파르지 않아서 지금처럼 더위가 다 물러가지 않은 때라도 느릿느릿 누리고 즐기면서 산책하기에 알맞습니다. 골짜기로 들어가 걸어도 좋고 산비탈로 올라가 길 따라 걸어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거닐다가 적당한 자리가 나타나거든 쑥 들어가서는 앉아 노니는 것입니다. 물줄기가 거세차게 떨어지면서 바위가 깊이 파이어 절구처럼 생겼습니다. 바닥이 온통 암석이고 깊은 정도도 대단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해 들어갔다가는 빠져나오기 어렵겠습니다.

 

 

옛날 밀양 사람들이 하늘이 가물면 여기서 기우제를 올렸다 하고요, 그러면 반드시 빠짐없이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호박소 일대는 나무가 내려주는 그늘도 좋고요, 그냥 하염없이 물이 내리꽂히면서 내는 소리만 들어도 그지없이 시원하고 상큼한 그런 자리입니다.

 

또 바로 옆에는 얼음골 케이블카도 있습니다. 자연생태계를 파괴한다 어쩐다 논란이 없지는 않지만, 그냥 찾아간 김에 한 번은 타 볼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가 다른 데 들르지 않고 바로 내려온다면, 환경 파괴를 않으면서 나름 그 풍경을 누리고 즐기는 보람을 얻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조그만 시골 학교인 남명초등학교에 들러 볼 일입니다.  학교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과 책 읽는 소녀상과 반공소년 이승복 동상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다른 여느 학교와 다르지 않은데요,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이었던 유정 사명대사가 더 있다는 것이 색다릅니다. 그것도 보통 자리가 아니라 가장 잘 보이는 한가운데 자리에 놓여 있는데요, 대신 이순신 장군 동상은 운동장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습니다. 밀양 무안 출신으로 밀양 표충사에 모셔진 인물이기 때문에 이렇게 크고 중요하게 모셨습니다.

 

 

정문 앞 책 읽는 소녀는 읽는 책이 만화책쯤 되는 모양인지 웃음이 야릇하고요, 사명대사는 마치 초등학생 스케치북에서 바로 튀어나온 것처럼 얼굴이랑 옷매무새가 투박합니다. 또 이순신은 어리숙한 중학생마냥 표정이 더없이 순진해 보입니다.

 

 

이런 모습들 둘러본 다음에는 뒤쪽 동천 물가로 옮겨갑니다. 잘 자란 소나무들이 빙 둘러서 있어서 경주의 신라 왕릉 둘레 솔밭보다 어쩌면 더 높은 품격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남명초교 뒤편 솔숲.

 

그런 다음에는 밀양 멋진 절간인 표충사를 찾아가면 되겠습니다. 표충사는 언젠가 우화루를 한 번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요, 우화루 아니라도, 또 절간이 아니라도 여름철에는 솔숲을 따라 산책하고 흐르는 개울물에 들어가 발을 담가도 좋은 그런 절입니다.

 

표충사에는 사명대사를 기리는 표충서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향로로는 가장 오래 된 고려시대 청동함은향완과 삼층석탑, 석등, 대광전 등 숱한 문화재가 있습니다. 표충사는 이처럼 유교까지 아우르는 우리 불교의 넉넉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새로 만든 사천왕문에서는 그 사천왕들이 발밑에 험상궂은 남정네 대신 어여쁜 여인네가 깔아뭉개고 있습니다. 사천왕 발아래에 깔려 있는 여자는 상당히 드문 편인데요, 거기서 고개를 갸웃하면서 왜 아름다운 여자를 저렇게 죄악시할까, 잠깐 생각해봐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쨍쨍 내리쬐는 지금은 좀 아니지만, 따가운 햇살이 조금 수그러드는 9월 즈음해서부터는 얼음골 들머리로 해서 남명초등학교까지 이어지는 옛길을 한 번 걸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세상이 편해지고 빨라지면서 가장 많이 달라지는 것 가운데 하나가 길입니다.

 

옛날에는 얼음골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을 이 길이 실어다 날랐습니다만, 새로 큰 길이 나면서 여기 이 콘크리트길은 그야말로 한적한 길이 돼 버렸습니다. 동네 사람들 농사지으러 오고가는 그런 차량만 다닐 뿐이어서, 정말 안전하고 걷기 좋은 그런 길이 됐습니다.

 

 

행정에서조차 '얼음골 옛길'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요, 처음에는 양쪽으로는 나무가 나타나고 그러다가 쑥부쟁이나 산국 같은 들풀이 차지한 길섶도 적지 않게 나오지만, 조금만 지나면 전국적으로 이름을 얻은 '얼음골 사과'가 둘레 과수원마다 넘치도록 매달려 있습니다.

 

전체 길이가 4.5km 남짓한데요, 이렇게 길면서도 아주 호젓한 길은 강이나 바닷가 둑길이 아니면 아주 드문 현실입니다. 느린 걸음으로도 1시간이면 족한 꾸불꾸불 이어지는 얼음골옛길에는 사람도 거의 없고 자동차도 거의 없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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