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루트

 

예연서원 →16.2km 도동서원 →148.7km 도산서원 →1.9km 퇴계종택 →50.8km 묵계서원·묵계종택 →51.4km 병산서원

 

조선 왕조와 함께하는 서원의 역사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최초로 1543년 백운동서원을 세웠고 이어서 퇴계 이황(李滉)은 1550년 같은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백운동서원에 임금의 사액(賜額)을 요청해 소수서원(紹修書院) 현판을 내려 받는 등 서원 보급운동을 벌였습니다.

 

사림들은 거듭되는 사화(士禍) 탓에 시골로 들어가 숨어 살게 되면서 서재·서당·강사·정사 등 교육 공간을 마련하고 성리학 발전과 후학 양성에 힘쓰게 됐습니다. 서원은 이런 교육 거점이면서 동시에 선현을 받들어 모시는 제향처였습니다.

 

조선 중기 들어 지역 선비들의 사회 활동 역량이 드높아지면서 18세기에는 전국에 서원이 700곳을 웃돌았습니다. 18세기 들어 서원은 교육 기능보다 향사 기능이 위주가 됐고 면세와 면역 특권 남용으로 경제를 좀먹는 역기능이 생겨납니다.

 

도동서원 수월루.

 

그래서 영조는 즉위 3년째인 1727년부터 300개 남짓 서원을 혁파했으며 흥선대원군은 아들을 앞세워 집권하자 고종 5년(1868)과 8년(1871) 두 차례에 걸친 훼철령으로 47곳을 제외한 모든 서원에 대해 문을 닫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어야 했던 서원이 문화유산으로서 지니는 가치는 인물과 고건축 분야로 국한돼 있습니다. 서원이 처음부터 유지했던 교육 기능은 눈길을 제대로 못받고, 전통 제례 또는 유학의 본산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유교 문화는 인물과 사상, 철학과 정신, 학문과 가치관을 중시한답니다. 그러므로 서원의 가치는 거기서 생활하며 삶을 누렸던 사람과 정신에 있지 겉으로 보이는 규모의 크고 작음에 있지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서원은 이런저런 변화를 거치면서 400년 넘게 존속해 온 우리나라 대표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서원문화에는 한국 유교문화의 다양한 모습과 함께 공통되는 특성까지 집약돼 있습니다. 경상도에는 이런 서원이 많이 있습니다.

 

도동서원 환주문.

 

흥선대원군 당시 철폐 대상에서 제외된 47곳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답니다. 함경도는 한 곳, 전라도·강원도는 세 곳, 황해도는 네 곳, 충청도·평안도는 다섯 곳뿐이었지만 경상도는 4분의1을 훌쩍 웃도는 열네 곳이나 됩니다.

 

서울까지 포함돼 있는 경기도조차 열두 곳밖에 안 돼 경상도에 으뜸 자리를 내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조선 5대 서원으로 꼽히는 병산·도산·소수·옥산·도동서원 가운데 옥산서원 하나만 전북 정읍에 있고 나머지는 모두 경상도에 있을 정도랍니다.

 

마을 가장 높은 데 자리잡은 예연서원

 

이번 걸음에서 첫머리를 차지하게 된 예연서원(禮淵書院: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1호)은 임진왜란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1552∼1617)를 기리는 서원입니다. 명물로 이름난 서원은 아니지만 동네 높지막한 데 자리잡은 품이 매우 넉넉하고 여유롭습니다.

 

 

 

‘홍의장군’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곽재우는 의령·합천·창녕 일대에서 활약하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곽재우의 당숙인 존재 곽준(1551~1597)의 위패도 모시고 있는데요, 정유재란이 일어난 선조 30년(1597) 안음현감으로 지금은 경남 함양 땅인 황석산성에서 가족과 함께 전사한 인물입니다.

 

곽준의 일대를 다룬 <존재선생실기>는 숙종 21년(1695)에 편찬됐는데요, 영조 42년(1766)에 판각된 책판(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0호)은 예연서원 장판각에 있습니다. 임진왜란 연구에서 경상도 지역 인물들의 활동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라는 데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숙종 3년(1677) 사액서원이 되면서 ‘예연’ 이름을 받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됐으며 한국전쟁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1977년과 1984년 복원됐습니다.

 

예연서원 들머리 은행나무.

 

사당·강당과 제물을 준비해 두는 고사(庫舍), 숙소로 쓰는 동·서재 등이 있습니다. 유림의 회합과 교육에 쓰던 강당은 중앙에 마루 양 옆에 온돌방을 뒀습니다. 마을 들머리에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홍의장군 신도비와 충렬공(=곽준) 신도비가 나란히 있습니다.

 

담장이 아름다운 도동서원

 

달성 도동서원(達城 道東書院:사적 제488호)은 조선 성리학 발전에 이바지했고 ‘동방오현’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모십니다. 1678년(숙종 4)에 한강 정구(鄭逑, 1543~1620)를 추가 배향했습니다.

 

1605년 지금 자리에 들어서면서 보로동서원이라 했는데 선조 40년(1607)에 ‘도동서원’이라는 현판을 임금으로부터 받아냅니다. 그러면서 동네도 이름이 ‘보로동’에서 ‘도동’으로 바뀌었는데, 1871년 서원철폐령이 내려질 당시에도 철폐 대상에서 들지 않고 살아 남았습니다.

 

도동서원 중정당.

 

서원은 향사 기능과 강학 기능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구성이 달라지는데 어쩌다 좌우로 나란한 경우는 있어도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사람들 가르치는 강당 앞에 오늘 일은 거의 없습니다. 도동서원 역시 강당을 앞에 두고 사당을 뒤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 서원 배치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앞에는 400년 정도 된 은행나무가 서 있습니다. 다른 서원 대부분에도 은행나무가 심겨 있기 십상인데 공자가 은행나무(정확하게 말하자면 살구나무) 아래(杏壇)에서 제자를 가르친 데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사액 기념으로 한강 정구가 심었다는 은행나무입니다.

 

 

사당(祠堂), 학문 강론장 중정당(中正堂), 유생들이 머물던 거인재(居仁齋)·거의재(居義齋)가 있고, 입구에서부터 수월루(水月樓)·환주문(喚主門)·내삼문(內三門)·장판각(藏板閣)·고직사(庫直舍)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사당은 둘레를 반드시 담으로 둘러싸고 정면 중심에 묘문(또는 신문)을 설치합니다. 묘문은 대부분 삼문으로 양쪽 문은 사람이 다니고 가운데문은 귀신 또는 임금 같은 지체만 다닐 수 있습니다. 담으로 둘러싸면 공간 분위기가 엄숙해지고 행사를 치를 때 손쉽게 경건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도동서원의 ‘강당 사당 부 장원(講堂 祠堂 附 墻垣)’은 보물 제350호인데 강당·사당, 그리고 이를 둘러싼 담장을 함께 이릅니다. 담장은 기와를 활용해 쌓은 맞담으로 매우 아름답습니다. 돌을 쌓아 암키와를 줄맞추어 얹고 진흙을 다져 올린 다음 중간마다 연화문 수막새를 어긋나게 끼웠습니다. 자연미를 최대한 살리면서 높낮이를 달리해 공간에 변화를 주고 있다고 합니다.

 

 

서원 건축물은 시대상과 역사성을 얼마나 간직하느냐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집니다. 동북아시아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만큼 서원 건축이 원형대로 잘 남아 있는 데가 없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고종 때 훼철을 면한 47개 서원은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동서원은 간결하고 검소하게 지은 전통 깊은 조선 중기 건물입니다.

 

청렴결백했던 두 선비를 모시는 묵계서원

 

안동 묵계서원은 응계 옥고(1382∼1436)와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을 모시고 있습니다. 숙종 13년(1687)에 지었다가 서원 철폐령을 받아 고종 6년(1869) 때 사당은 없어지고 강당만 남아 있다가 최근 복원됐습니다. 

 

 

묵계서원 파청루.

 

원래 모습대로 하는 복원도 있지만, 강학 기능은 관두고 향사 기능만 복원하는 경향이 대부분이라 합니다. 묵계서원도 바로 그렇습니다. 하기야, 지금은 서원에서 공부할 학생이 있지 않으니 강학 공간을 마련한다 해도 별로 쓰일 일이 없기는 하겠습니다.

 

응계옥고와 보백당 김계행은 둘 다 관리로 지낼 때 ‘청렴결백’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합니다. 묵계서원과 함께 경상북도민속문화재 제19호로 지정돼 있는 안동김씨 묵계종택은 서원 가까운 마을 한가운데 있습니다.

 

 

안에는 제청으로 쓰이는 보백당(寶白堂:청렴결백을 보배로 삼는 집)이 있습니다. 김계행은 굳은 의지와 명석한 자질로 늙어서까지 경학(經學)에 힘썼는데요, 성리(性理) 문제에 깊이 들어가 이치를 깊이 깨달은 인물이라 합니다. 묵계종택 앞 200년 묵은 상수리나무는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묵계종택 앞 상수리나무.

 

검소·간략·소박을 실현한 도산서원

 

안동 도산서원(安東 陶山書院:사적 170)은 선조 8년(1575)에 사액을 받은 영남 유학의 중심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존속했고, 편액은 명필 한석봉이 썼습니다. 퇴계 이황(1501~1570)이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던 도산서당과 퇴계를 죽은 뒤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 있습니다.

 

 

 

이황은 주자의 학문을 한 데 모아 세운 조선 성리학의 거목이라 합니다. 조선 유학이 나아갈 바를 새로 세우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과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을 쏟았습니다.

 

중종·명종·선조에게서 지극하게 존경을 받았고요,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한테 약탈돼 넘어간 그이의 서책들은, 그로써 일본 유학이 살아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도산서원 광명실.

 

숙종 때까지만 해도 그를 기리는 뜻에서 퇴계 이황과 관련이 있는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에서 특별 과거가 치러졌으며, 노론이 집권한 뒤인 영조 때는 사라졌었지만 이황 세상 떠난 지 222년 되는 1792년(정조 16)에 도산별과(陶山別科)로 되살아났습니다.

 

도산서원 앞 낙동강 건너편 시사단.

 

도산서원 낙동강 건너편 시사단(試士壇)이 그 유적인데요, 퇴계는 1968년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 지시로 1000원 권 종이돈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습니다.

 

명종 16년(1561)에 건립된 도산서당은 퇴계가 몸소 설계했답니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민가처럼 간결·검소하게 꾸몄습니다. 퇴계 세상 떠난 뒤 지은 사당 영역도 간결하고 검소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후인들이 스승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도산서당.

 

주변 경관도 아름다워서, 퇴계는 <도산십이곡>에서 도산서원과 둘레의 빼어난 경관을 글로 남겼습니다. 이처럼 서원이 들어서는 필수 요건 하나가 아름다운 자연 경관입니다. 앞으로 강이 있고 뒤로는 산이 있어 탁 트여 있어 한편으로 시원함을 다른 한편으로 안정감을 갖췄습니다. 철 따라 달라지는 산색과, 굽이치는 물색에서 생의(生意)를 깨닫고 마음을 넓히며 지혜를 담기 위함이랍니다.

 

전교당.

 

퇴계를 제사 지내는 일대는 국가 공식 지정 보물이 됐습니다.(보믈 제211호) 어렵게는 ‘도산서원 상덕사 부 정문 급 사주토병(陶山書院 尙德祠 附 正門 及 四周土塀)이라 이릅니다. 토종말로 풀어 쓰면 이렇습니다. 도산서원 상덕사와 그에 딸린 정문 그리고 사방을 둘러싼 흙담장.

 

덕(德)을 받든다(尙)는 이 사당은 화강암으로 4단을 쌓아 올린 축대가 엄숙하고 빛나는 느낌을 줍니다만 다른 것은 모두 검소하고 간략합니다. 엄숙·화려와 검소·간략의 이런 비교·대조 또는 조화·대칭은 그 둘을 모두 도드라져 보이게 합니다.

 

담장은 원래 흙으로 만들어졌는데 1969년 새로 단장하면서 돌로 바뀌었습니다. 원래 있었던 질박함이 사라졌다는 얘기와 함께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는 대목이랍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어쩌겠는가 하는 생각이 한편에서 든답니다. 이 또한 역사가 아닐까 싶은 것이지요.

 

 

서원은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반면 일부러 심는 나무는 아주 제한돼 있습니다. 서원 밖에는 공자 행적에 나오는 행단(杏亶)과 관련된 은행나무 그리고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심는데요, 지금은 대부분 나이를 많이 먹어 커다란 나무가 돼 정자나무 구실까지 맡아 합니다.

 

 

담장 주위와 서원 뒤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이 심긴답니다. 강학 공간에는 은행나무, 매화나무, 배롱나무 등이 많이 심기는 대표입니다. 사당에는 배롱나무와 무궁화 아니면 모과나무, 단풍나무, 향나무, 측백나무와 회화나무 등이 심깁니다.

 

장판각. 내부 모습.

 

그런데 도산서원에는 유독 매화가 많습니다.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前身應是明月 幾生修到梅花).” 이황의 매화 사랑은 지독했다고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멀리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정인(情人)에 대한 그리움을 매화로 대신했다는 이야기는 무척 유명합니다.

 

도산서원이 있는 안동 도산면 일대를 둘러보면 퇴계 이황이 남긴 자취가 얼마나 크고 많은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퇴계종택(退溪宗宅:경상북도 기념물 제42호)은 1907년 일본군이 지른 불에 없어졌다가 일제강점기인 1926~1929년 후손들이 지금과 같이 번듯하게 새로 들이세웠습니다.

 

 

가진 돈과 힘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세월이 크게 흐르지도 않은 당대에, 그것도 당시로서는 엄청났을 이런 역사(役事)를 벌였음이 새삼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ㅁ자로 모두 34칸인데, 둘레 풍경에까지 신경을 써서 새로 지어 올렸습니다.

 

퇴계와 관련이 없다면 이렇게까지는 할 수도 없었고 하지도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설핏 들었답니다. 오른쪽에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 있고 거기 마루에는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 현판이 걸려 있답니다.

 

꼭 마지막에 들러야 하지 싶은 병산서원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사적 제260호)은 서애 류성룡(1542~1607)을 기립니다. 그이가 임진왜란 때 겪은 이야기에 후회와 교훈을 담아 남긴 <징비록>은 국보 제132이기도 합니다. 고려 때부터 풍산현에 있던 사림 교육기관 풍악서당을 선조 5년(1572) 류성룡이 지금 자리 병산으로 옮겼습니다.

 

 

병산서원 담장.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앉은 것입니다.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 때에도 살아남았었는데요 강학 공간인 복례문·만대루·동서재·입교당·장판각, 제향 공간인 신문·존덕사·전사청 등이 있습니다. 초기 서원인 소수서원과 도산서원 등에서 실현된 구조를 충실히 받아들이고 따랐습니다.

 

병산서원 만대루(晩對樓)는 흐르는 강물이 병풍처럼 감싸 안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병산서원이라 한다는 유래도 전해집니다. 이런 정도는 돼야 인간과 자연이 마주보는 경관이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동서원과 도산서원이 가을 달이 찬 물을 비추는(秋月照寒水) 품격이라면 병산서원은 늦은 무렵에 병풍 같은 푸른 산을 마주하는(翠屛晩對), 생기가 가득차 오르는 푸른 산색을 마주하며 무슨 일이든 하고자 하는 마음을 새로 얻어나가는 경지가 뚜렷하게 느껴지는 경관이라 하겠습니다.

 

서원 탐방 시작은 아무데서나 해고 크게 탈이 없겠지만 마무리는 병산서원으로 해야 마땅하다 싶습니다. 여기서 다른 데로 발길을 돌리기가 아쉬울 정도로 서원과 둘레 풍경이 잘 어울리고 또 아름답기 때문이랍니다.

 

만대루.

 

 

그러니까 병산서원을 탐방 앞자리에 놓으면, 자칫 잘못했다가는 여기서 시간을 끄는 바람에 다른 서원은 가 보지 못할 수도 있겠고, 둘러보는 차례가 밀린 다른 서원은 마주하기가 시시해질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만대루에 오르면 한 번 정도 드러누워 보면 좋겠습니다. 앉아 있을 때는 제대로 보기 어려운 건물 뼈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불순한 성분은 거의 개입되지 않은 이 건축물은 그 단순함으로 기품 또는 위엄을 내뿜고 있습니다. 또 만대루에서 담을 수 있는 풍경은 따로 말할 필요가 전혀 없을 테고요.

 

김훤주

※ 2012년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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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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