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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 서석 주인공은 연인? 오누이?

김훤주 2014. 6. 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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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울주 천전리 각석이 있는 골짜기는 이름이 서석골이랍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전에 이름이 확인되는 골짜기입니다. 이를 일러주는 명문이 바로 천전리 서석(書石)입니다.

 

이 서석은 천전리 각석 아래 쪽에 주로 있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먼저 쓰여졌다 해서 원명이라 하는 왼쪽 네모 상자 안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 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을사년(법흥왕 12년, 525년)에 사탁부 갈문왕이 찾아 놀러와 처음 골짜기를 봤다. 오래된 골짜기이면서도 이름이 없어 서석곡이라 이름 짓고 좋은 돌을 얻어 글자를 새겼다.”

 

여기 서석곡에 사탁부 갈문왕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함께 놀러 온 우매(友妹)  여덕광묘(麗德光妙)한 어사추여랑님이다.” 그밖에 이들을 수행한 이는 남자 셋과 여자 둘이었습니다.

 

천전리 서석. 아래 왼쪽이 원명. 아래 오른쪽이 추명.

 

원명에서 서석골 이름을 지었다고 나오는 갈문왕이 누구인지는 나중에 쓰여진 오른쪽 네모 상자 안 추명에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과거 을사년 6월 18일 새벽(昧)에 사탁부 사부지 갈문왕 누이 어사추여랑님이 함께 놀러 온 이후 올해로 14년이 지났다.”

 

여기 사부지는 입종으로 법흥왕의 동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놀러왔던 때를 6월 18일 새벽이라고 콕 집어 적었습니다. 이어지는 추명은 이렇습니다.

 

“누이님을 생각하니 누이님은 이미 돌아가신 분이다. 정사년(537년)에는 갈문왕도 돌아가셨다. 왕비 지시혜비는 애타게 그리워했다. 기미년(539년) 7월 3일 왕과 누이가 함께 써놓은 서석을 보러 골짜기에 왔다.”

 

이번에는 사부지 갈문왕의 왕비가 여기에 온 것입니다. 그이는 <화랑세기>에 지소태후로 나옵니다. 추명은 왕비와 동행한 사람들도 적었습니다. “셋이 함께 왔는데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와 사부지왕 아들 심맥부지가 함께 왔다.”

 

천전리 각석. 천전리 서석과 같은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위쪽에요.

 

무즉지태왕은 법흥왕이라 하니 그 왕비 부걸지비는 <삼국사기>에 박씨 보도부인으로 나오는 인물입니다. 아들 심맥부지는 한 해 뒤(540년) 왕위에 오르는 진흥왕입니다. 이어지는 추명은 이들을 수행한 이가 남자 셋과 여자 셋이라고 일러줍니다.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 이렇습니다. 주인공 자격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사부지 갈문왕과 누이 어사추여랑, 그리고 갈문왕의 조카이면서 아내이기도 한 지시혜비, 그 어머니인 법흥왕비 부걸지비(사부지 갈문왕에게는 형수 겸 장모), 마지막으로 지시혜비의 아들 심맥부지 다섯입니다.

 

여기서 해석이 엇갈리는 대목은 원명의 우매(友妹)와 추명의 새벽(昧)이라고 합니다. 한쪽에서는 우매를 벗으로 사귀는 누이(같은 여자)로 풀고요, 다른 한쪽은 벗(友)을 두고 별 뜻 없이 꾸미는 글자일 따름이라고 봅니다.

 

벗으로 사귀는 누이로 보면 사부지 갈문왕과 어사추는 연인(그 때 근친혼이 성했기에 둘은 친족일 수도 있답니다)이 되지만 별 뜻이 없다고 여기면 말 그대로 손아래누이가 됩니다.

 

천전리 서석/각석 들머리에 있는 공룡발자국 화석. 옛날 신라 사람들도 여기 서석골에 들를 때 이 화석을 보기는 봤겠지요. 화석인줄 알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새벽(昧)은 원명에 나오는 나들이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글자라고 합니다. 여기에 눈길을 두는 쪽에서는 나들이가 목적이 가벼운 놀기에 있지 않고 제사 지내기에 있다고 봅니다. 귀신이 활동하는 때가 밤이라는 데에 착안한 얘기입니다.

 

반면 새벽이라는 시기에 별로 눈길을 쏟지 않는 이들은 놀기가 목적이라 여깁니다. 여기 나오는 (음력) 6월 18일과 7월 3일이 여름철임을 내세워 피서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한쪽에서는 남녀 연인이 놀러 왔다고 보고, 다른 한쪽은 오누이가 제사를 지내러 왔다고 봅니다. 어느 얘기가 맞는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연인설 쪽이 사람들 흥미와 관심을 더 당기게는 합니다. 그렇지만 개연성이 더 높기는 오누이설 쪽인 것 같습니다.

 

왕비가 먼저 세상을 떠난 어사추와 사부지가 그리워 그이들이 함께 새겨놓은 서석을 보러 나왔다는 서석 내용도 이런 견해를 좀 더 많이 뒷받침해 준다고 합니다.

 

김훤주

※ 2012년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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