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돌과 나무에 새겨진 옛사람들의 심정과 일상

김훤주 2014. 5. 3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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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루트

 

울산암각화박물관 →1.1km 반구대 암각화 →(울산암각화박물관 근처까지 돌아나옴)2.3km (자동차로는 5.7km) 천전리 각석 →(울산암각화박물관으로 돌아나옴)4.5km 구량리 은행나무→56.2km 달전리 주상절리 →11.2km 포항 흥해읍 이팝나무 군락지 →8.6km 냉수리 신라비 →4km 북송리 북천수藪→9.6km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

 

자연에 기대어 살아야 했던 오랜 세월 돌과 나무는 인간에게 신앙의 대상이었습니다. 큰 바위나 당산나무 앞에서 제사를 올리며 안녕을 빌었습니다.

 

삶이 거칠고 험했기에 그 마음은 더욱 절실했겠지요. 희미하게나마 곳곳에 남아 있는 그런 흔적들을 통해 인간 보편의 욕망과 삶을 더듬어 보게 됩니다.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돌과 나무를 찾아가는 여행길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에 있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에서 시작합니다. 반구대 가는 길은 그림처럼 아름답답니다. 오밀조밀한 산이 겹겹이 어우러져 흐르는 강물을 감싸듯 펼쳐져 있습니다.

 

반구대를 휘감은 물줄기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그 일부인 연로(硯路)는 반고서원에서 반구대 암각화로 가는 벼랑길로 너비가 2.5m가 채 되지 않습니다. 연로개수기(硯路改修記)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연로는 ‘벼룻길’이라는 뜻으로 ‘벼루처럼 미끄러운 바윗길’, ‘벼랑길’, ‘사대부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학문길’이라 풀이하고 있습니다.

 

눈맛이 좋은 길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반구대 암각화에 이릅니다. 태화강 상류 서쪽 기슭 ‘건너각단’이라는 암벽에 있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그림입니다. 대부분이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한살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사람 얼굴을 비롯해 사냥하는 사람들, 활·작살·그물, 다양한 고래, 거북 같은 바다동물, 호랑이·멧돼지·사슴 같은 뭍짐승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나름대로 사실적이랍니다. 함정에 빠진 호랑이와 새끼를 밴 호랑이, 교미하는 멧돼지, 새끼를 거느리거나 밴 사슴 등이 그렇다고 합니다.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도 있습니다.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의 모습도 그렸으며, 그물이나 배까지 표현돼 있습니다. 대부분 다산과 풍요로운 생업, 안전한 사냥을 기원하는 종교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당시 생활상을 풍성하게 보여줍니다.

 

건너편 반구대암각화를 바라보는 데 필요한 망원경.

 

선과 점으로 동물과 사냥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특징을 실감나게 그려낸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 당대 생활과 풍습을 알려주는 최고 걸작이라 평가받습니다.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이기도 하답니다.

 

하지만 반구대에 가면 이런 훌륭한 작품을 자기 눈으로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접는 편이 좋습니다. 주변을 감싸며 끝없이 펼쳐졌던 초원도 사라지고 망원경으로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던 암각화도 이제는 보기가 어렵습니다.

 

사연댐으로 해마다 침수와 노출이 되풀이되는 바람에 망가질까봐 걱정스러운 실정이랍니다. 문화재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아쉬운 대목이지요.

 

둘레 풍경에 넋을 잃다보면 무심히 스치고 지나가기 십상인 것이 반고서원유허비(울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13호)입니다. 돌아나오다 건너편을 바라보면 눈에 들어옵니다. 귀양살이하러 온 여기서 반구대에 올라 시를 지었던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를 기리는 빗돌입니다. 반구대는 ‘포은대’라고도 합니다.

 

울산암각화박물관. 거기 들머리에 있습니다.

 

울산암각화박물관은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국보 제147호)을 소개하는 한편으로 암각화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실물 모형을 통해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의 내용을 자세하게 알 수 있는데요, 암각화와 각석을 찾아가기 앞서 박물관에 먼저 들러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울주 천전리 각석과 서석

 

울주 천전리 각석은 태화강 상류 물줄기인 대곡천(大谷川) 중류 기슭 암벽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를 이릅니다. 여기를 걸어가는 길도 반구대암각화 가는 길 만큼이나 멋지답니다.

 

걷는 내내 물소리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온통 바위로 이뤄진 골짜기를 풍성한 물이 흐르면서 내는 소리이지요. 대곡천이 대곡천인 까닭을, 물소리를 들으니 알겠습디다.

 

 

각석에 있는 마름모꼴, 동심원, 나선형 등 기하학 문양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제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림 말고 ‘천전리 서석’이라고, 신라시대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800자 남짓 명문도 남아 있습니다. 법흥왕 때 씌어진 글자들로 이를 풀면 당시 신라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천전리 각석은 반구대 암각화와 더불어 조상들의 생활모습과 종교관을 알려주는 암각화랍니다.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의 모습이 단순화된 형태로 표현돼 있는데 사실성은 처진다는 평을 받는다고 합니다.

 

반구대 암각화와 견줘가며 감상하면 재미가 더해집니다. 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이 담겨 있는 그림들은 어느 특정 시대가 아니라 여러 시대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 더욱 뜻깊다고 합니다.

 

여기 새겨져 있는 6세기부터 9세기까지 신라시대 여러 글자들은 특별히 천전리 서석(書石)이라 합니다. 쇠붙이나 돌에 새긴 글(금석문)들은 종이에 남겨진 문헌 기록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그 시대라는 나무에서 나이테 같은 생생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십상입니다.

 

왼편:원명=원래 있었던 새김글. 오른편:추명=뒤에 덧붙인 새김글.

 

천전리 서석도 마찬가지랍니다. 서석은 아래쪽에 있고 각석은 주로 위쪽에 있습니다. 여기 그림과 글들은 반구대 암각화와는 달리 가까이 다가가서 맨눈으로 볼 수 있게 돼 있습니다. 각석으로 건너가기 전 골짜기 바위에는 공룡 발자국도 화석(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호)으로 남아 있습니다.

 

천전리각석 들머리. 공룡발자국 화석.

 

울주 구량리 은행나무

 

울주 구량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64호)는 나이가 대략 550년으로 짐작됩니다. 조선 세조 때 단종 복위 운동이 들통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갈 때 한성부판윤을 지낸 죽은(竹隱) 이지대(李之帶)가 여기로 들어오면서 갖고 와 연못가에 심었다고 합니다. 이지대를 기리는 유허비(遺墟碑)도 함께 서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오래된 나무에는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지요. 그런 믿음으로 나무를 우러름의 대상으로 삼고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구량리 은행나무도 그렇습니다. 나무를 해코지하면 해를 입는다고 믿어 함부로 손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경. 밑둥.

 

나무 밑둥 썩은 구멍에 대고는 아들을 낳지 못한 아낙이 정성들여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게 된다고도 합니다. 나무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입혀지는 의미와 해석이 달라집니다. 구량리 들판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마을 사람들의 사랑과 아낌을 받아왔습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

 

포항 냉수리 신라비(국보 제264호)는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사무소 뜰에 있습니다. 진흥왕 때인 524년 세워졌다고 짐작되는 울진 봉평리 신라비보다 적어도 21년 앞서 만들어진, 가장 오래 된 신라비로 인정받았었습니다. 계미년(癸未年)이라는 간지와 지도로(至都盧) 갈문왕(지증왕)이 글자로 나왔고 그래서 지증왕 4년(503년)에 세워졌다고 짐작됩니다.

 

 

하지만 2009년 발견된 같은 포항의 중성리 신라비(보물 제1758호)가 마찬가지 재산 문제를 다루면서 신사년(辛巳年)이라 적은 빗돌이라 최고(最古) 지위는 잃게 됐습니다. 여기 신사년은 냉수리 신라비보다 이태 앞선 501년으로 여겨지고 있답니다.

 

어쨌거나 냉수리 신라비에는 고르지 못한 네모꼴 화강암의 앞·위·뒤 3면에 231자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과 상속에 관한 내용이라 합니다.

 

지증왕을 비롯한 6부 출신 귀족 7명이 앞선 두 임금이 재산 소유를 인정한 결정 사항을 다시 확인하는 한편, 절거리가 죽은 뒤 아우 아사노(또는 아우의 아들 사노)에게 상속하고, 다른 사람은 그 재산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고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여러 귀족이 참여한 가운데 처리했는데, 이는 왕권이 세어지기 이전에 임금의 권한이 보잘것없었다는 신라 실상을 알려주는 증표라 합니다. 국가에서 세운 빗돌로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줍니다.

 

뒤에서. 앞에서 앞쪽 위에서

 

바위가 그전에는 신앙의 대상이었으나 이제 문자를 만나면서는 성격이 바뀌어 임금과 나라의 권위와 권력을 나타내는 물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흥해 이팝나무 군락

 

흥해 이팝나무 군락(경상북도기념물 제21호)은 흥해향교(대성전은 문화재자료 제87호) 뒤쪽으로 상수리나무와 뒤섞여 자라는 이팝나무 서른네 그루를 이릅니다. 고려 말 또는 조선 초 향교를 지은 후 기념으로 심은 이팝나무에서 씨가 떨어져 차츰 번식했으리라 짐작합니다.

 

흥해 이팝나무 군락. 꽃이 피었을 때 찍지 못했습니다.

 

흥해향교 태화루.

 

마을 가운데 공원에 자리잡고 있는 100~150년 가량 된 이들 나무가 꽃이 피면 장관을 당연히 이룹니다. 사람들은 때맞춰 산책만 나와도 이 엄청난 꽃잔치를 누릴 수 있겠지요. 이팝나무는 여름 문턱에 들어설 때 마치 뻥 튀겨놓은 쌀밥처럼 하얀 꽃이 핀다고 붙은 이름이랍니다.

 

이팝나무에 피는 꽃이 많고 적음에 따라 농사의 풍흉을 점쳤는데 여기에는 다 까닭이 있었답니다. 이팝나무는 물이 많은 데서 잘 자라므로 비가 알맞게 내리면 꽃이 활짝 피고, 그렇지 못하면 제대로 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비는 벼농사에도 영향을 끼치는 만큼 오랜 경험을 통해 자연을 관찰한 결과인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고 항상 바다와 함께 흥한다는 뜻이 담긴 흥해 지명과도 관련이 깊다 할 수 있겠습니다.

 

포항 달전리 주상절리

 

포항 달전리 주상절리(천연기념물 제415호)는 신생대 제3기(대략 200만 년 전)에 용암이 뿜어져 나오다가 식으면서 굳은 것으로, 돌기둥이 높이 20m 너비 100m로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펼쳐놓은 병풍처럼 생겼습니다.

 

 

 

주상절리는 대부분 수직으로 서 있는데요, 여기는 위쪽은 80도 정도 기울어졌지만 아래로 내려오면서는 수평에 가깝게 휘어져 있어 특이하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용암이 땅 밑에서 지표로 솟아 오른 후 수평 방향으로 흘렀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처럼 흘러내린 방향이 유별나서 멀리서 보면 기와지붕으로도 보이고 활짝 펼친 부채처럼도 보입니다. 또 잘 마른 나무를 제대로 쪼개어 켜켜이 쌓아놓은 장작 같기도 하답니다. 이런 달전리 주상절리 앞에 들어서면 타임머신을 타고 아득한 옛날로 돌아가 있는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옛날 돌을 캐내던 채석장 자리여서 발견이 됐다는데 그 덕분에 이리 사람들 눈길을 끌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주상절리야 그런 데 아무 상관이 없겠지만, 그래도 새옹지마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설핏 드는 듯도 하답니다.

 

포항 북송리 북천수

 

 

이번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마는 포항 북송리 북천수(천연기념물 468)입니다. 곡강천을 따라 2.4km로 길게 만들어진 솔숲입니다. 남아 있는 마을숲 가운데 세 번째로 길며, 규장각에 있는 <흥해현지도>와 <한국지명총람>, <조선의 임수> 등에도 기록돼 있는 예부터 매우 이름난 숲이라 합니다.

 

 

옛날부터 소나무는 뿌리가 깊어 방풍림으로 쓰였는데요, 흥해읍 일대 수해와 바람을 막는 구실을 했습니다. 정월대보름에 숲속 제당에서 동제를 지내고 앞산에서 산제를 지내며 한 해 전에 병에 담아 묻어둔 소금물 상태를 보고 한 해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등 오랜 기간 신앙 대상이었습니다.

 

 

규모나 가치로 보면 사람들 발길이 잦을 것 같은데 뜻밖에 한산하고 조용합니다. 여기 서쪽 끄트머리 흥해서부초등학교에는 굵직한 소나무가 운동장에까지 무리를 지어 있는데 그야말로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여기 북천수에서는 지금도 사람들이 나무를 꾸준하게 심고 가꿉니다. 소나무 품종을 알맞추 골라 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숲을 과거 유산으로만 여기는 대신 지금도 손을 보태어 키우는 모습이라 보기에 썩 유쾌하고 즐거웠답니다.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

 

바위와 나무에 새겨진 문화유산 여행길의 종착지는 바닷가에 나와 앉은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49호)이랍니다. 규모에서 보자면 우리나라 최대라는데요, 여행 삼아 다니면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데는 두 군데랍니다.

 

칠포리 산기슭 암각화 전경.

 

하나는 길가다가 오른편 무슨 공장 있는 데서 산으로 100m 정도 올라가는 기슭(칠포리 201번지)에 있고요, 다른 하나는 암각화길이라 이름 붙은 이 도로가 바닷가쪽으로 더 나아가 국도 20호와 만나지며 왼쪽으로 휘어지는 왼편 언덕배기 들머리에 있습니다.

 

가장 위쪽 바위.

 

암각화가 새겨진 자리는 옛날 사람들의 제사터라 해도 틀리지 않을 텐데요, 여기 두 곳은 모두 제사 지내기에 적격인 자리들로 보였습니다. 산기슭 암각화는 모두 세 군데로 흩어져 있습니다.

 

조그만 골짜기에 들어 있는 바위는 원래 위에 있던 바위에서 떨어져 나간 것 같고 아래쪽 바위에는 신통한 암각화가 그다지 있지 않습니다. 가장 위쪽 바위에는 제법 암각화가 많은데 가운데는 잘록하고 아래와 위가 널찍한 실패 또는 두툼한 칼손잡이 모양이 여럿 있고 알구멍(性穴)도 많습니다.

 

바닷가 언덕배기 들머리 암각화는 고인돌에 새겨져 있는데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칼손잡이 모양과 화살촉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쳐다봐도 무엇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그 어떤 절박한 심정으로 바위를 쪼아 팠으리라는 짐작은 충분히 할 수 있었습니다.

 

칠포리 바닷가 암각화.

 

칠포리 바닷가 암각화.

 

이렇게 보면 거기 새겨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거기에 바위가 있었고 또 절박한 사람이 있어서, 무엇인가를 빌고 바라는 심정을 거기에 새겨 넣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절박한 그 무엇은 무엇일까요? 그 무엇을 이루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길가에 앉아 눈 앞에 펼쳐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잠깐 해 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답니다.

 

김훤주

※ 2012년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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