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강제진압은 역사를 건 위험한 도박이다

기록하는 사람 2008. 6. 29.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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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돌발변수에 의해 만들어진다

평화로운 집회와 시위가 '항쟁'의 상황으로 바뀌는 동기는 대개 공권력의 과잉대응과 그로 인한 돌발변수에서 비롯된다.

3·15의거와 4·19혁명은 마산 남성동파출소 앞 경찰의 발포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떠오른 학생 김주열의 처참한 시신이 도화선이었다. 5·18광주항쟁도 대학생의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공수부대의 폭력에서 시작됐고, 6월항쟁도 경찰의 고문과 최루탄 난사로 숨진 박종철·이한열 학생의 희생에서 불붙었다.

지난 9·10일에 이어 다시 27·28·29일 2박3일간 서울 광화문 촛불시위를 지켜보며 떠오른 생각은 이랬다.

'경찰이 항쟁을 부르고 있다.'


조선·동아·중앙일보 등 '친정부 언론'이 연일 강경진압을 주문했고, 경찰이 강경대응 방침을 밝히며 광우병국민대책회의 관계자 2명을 구속했던 27일까지만 해도 광화문 촛불집회는 '평화로운 축제'의 성격을 이어나갔다.

한 때 경찰 저지선 앞에서 시위대와 충돌 위기도 있었지만, '평화유지군' 역할을 해온 예비군부대가 재빨리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들어가 '비폭력 라인'을 구축했다. 이렇게 되자 경찰도 명분을 찾지 못한 듯 물대포를 쏘지 않았고, 집회는 새벽까지 축제처럼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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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밤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비폭력 라인'을 구축한 예비군들.


토요일인 28일에는 더 많은 시민들이 모였다. 무려 10만을 헤아리는 숫자였다.

27일 오전 서울 상암동 누리꿈스퀘어에서 열린 오마이뉴스 세계시민기자포럼에서 <참여군중>의 저자 하워드 라인골드는 영상연설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참여군중이 늘 현명한 군중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이번 촛불집회는 과거 운동권이 주도했던 다른 투쟁에 비해 철저히 비조직된 자발적 군중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소수이긴 하지만 군중 속에는 '폭력투쟁'을 외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돌발행동은 다수의 현명한 군중에 의해 제지돼왔다. 집단지성의 힘이었다.

경찰이 무모한 진압에 나선 두가지 이유

문제는 경찰에 의해 평화집회가 위협당하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명령체계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경찰과 달리 군중은 언제든 통제의 범위를 벗어날 위험성을 갖고 있다. 바로 경찰이 극도의 자제력을 가져야할 이유다.

경찰이 시위진압에 동원할 수 있는 전국의 전·의경 상설부대 인력은 많아야 3만 명 정도다. 이들을 모두 서울로 불러모은다고 해도 28일 참석한 10만 군중에도 턱없이 못미친다.

더구나 28일 수많은 군중 속으로 투입한 진압경찰은 고작 300명 정도였다. 이 중 일부가 시위대에 의해 고립될 수 있고, 전경이든 시민이든 부상자가 속출하리라는 것은 것은 삼척동자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어쩌면 제2의 이한열, 제2의 김주열이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경찰이 이처럼 무모한 강제진압을 시도했던 이유는 뭘까? 그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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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후 대한문 앞 도로를 가득 메운 군중들.


첫째, 경찰 수뇌부는 시위군중이 전혀 조직과 무장이 안 된 '오합지졸'이므로 그 정도 인원으로도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둘째, 경찰의 고립과 시위대의 폭력을 유도하기 위해 이들 전경을 제물로 내놓았을 수 있다. 더 이상 내놓을 패가 없는 정부와 경찰은 불상사가 예측되는 무모한 진압작전을 통해 촛불시위의 과격성과 폭력성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내가 볼 땐 두 번째 의도였을 것이다. 정부는 몇 일 전부터 계속 '일반시민'과 '조직시위자'를 분리하는 용어를 쓰고 있다. 시위대가 좀처럼 전면적인 도발을 하지 않으니까, 경찰이 선제공격이라도 해서 폭력사태를 유발해 그들이 생각하는 '일반시민'을 떼어내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어쩌면 경찰 수뇌부는 진압 과정에서 전경 중 '열사'가 한 명쯤 나와주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언론이 진실만 보도한다면 정부와 경찰의 이런 의도는 말도 안되는 것이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들에겐 '조중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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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자 중앙일보 1면 머리. 부제목에 시위대의 폭력만 부각시키고, 경찰의 폭력은 없다. 사진도 시민들에게 고립된 경찰의 모습을 썼다.


아니나 다를까 30일 아침의 조중동의 지면은 '페이스풀 애니멀'처럼 폭력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들에게 경찰의 무모한 진압작전은 전혀 비판대상이 아니다. 경찰의 폭력이냐, 시위대의 폭력이냐도 중요하지 않다. 그냥 시위 자체의 폭력성만 부각하면 그들의 의도는 관철되는 것이다.

물론 정부와 경찰의 이런 전략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시위대는 경찰을 절대 자극하지 말고 끝까지 비폭력 평화시위를 유지하면서, 때리면 맞고, 밟으면 밟히고, 잡아가면 잡혀가면 된다.

그러나 과연 군중이 그럴 수 있을까? 그건 시위에 참여하는 수십 만 군중이 철저히 명령체계에 움직이는 경찰과 같은 조직에 소속돼 있을 때나 가능하다. 아니, 경찰 중에도 일탈하는 이는 있게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극렬 소수'로 전락하든가, 거대한 '항쟁'이 되든가

따라서 이런 경찰의 무모한 도발은 향후 두 가지 중 하나의 결과를 예측케 한다. 우선, 정부와 경찰의 희망대로 경찰이 무섭거나, 폭력이 무섭거나, 잡혀가는 게 두려운 시민들이 이탈하고, 그야말로 소수의 운동권 조직만이 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촛불시위대의 수는 급속히 감소하고, 전국의 전의경 상설부대 인력으로도 진압이 가능하게 된다. 이게 바로 정부와 경찰, 그리고 조중동이 절실하게 노리는 수다.

그러나 반대로 일부 시민이 떨어져 나가긴 하겠지만, 경찰의 무모한 진압작전에 분노한 절대다수의 시위대가 경찰의 폭력에 맞서는 것이다. 서울 뿐 아니라 전국 각 지역에서도 같은 기조로 들고 일어난다면 결국 이 상황은 4·19나 5·18, 6월항쟁과 같은 국면으로 나아갈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경찰의 무모한 진압작전은 오히려 군중의 자위수단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경찰의 곤봉과 방패에 맞서 시민은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지 모른다.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와 소화기에 맞서 돌멩이와 화염병을 들 수도 있다. 벌써부터 7월 5일에는 각 지역에서도 서울로 집중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경찰로부터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90년대 시위현장에서 사라졌던 '사수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28일 경찰의 강제진압과 체포작전 이후부터 29일 아침까지 거리 곳곳에서 실종된 민주주의를 개탄하는 '타는 목마름으로'가 비장한 목소리로 울려퍼졌다. '전대협진군가'도 등장했고, '님을 위한 행진곡'도 끊임없이 불려졌다. 시민들은 이미 지금 상황을 80년대로 인식하고 있다.

만일 두 번째의 경우처럼 상황이 진행된다면 경찰이 감당할 수 있을까? 10만·50만·100만 명이 모인 집회에서 80년대처럼 시위대가 조직화하기만 한다면 경찰은 무력화된다. 그러면 그 땐 군대라도 투입할 것인가?

정부와 경찰, 조중동은 이런 최악의 상황까지도 예측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더 꺼내놓을 패가 없는 그들로서는 마지막으로 이런 도박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건 그야말로 역사를 건 정부와 조중동의 위험한 도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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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 광화문을 가득 메운 군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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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
지역신문 기자의 고민과 삶을 담은 책. 20여 년간 지역신문기자로 살아온 저자가 지역신문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기자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풀어낸다. 이를 통해 서로 비슷한 고민을 가진 지역신문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촌지, 살롱이 되어버린 기자실, 왜곡보도, 선거보도 등 대한민국 언론의 잘못된 취재관행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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